16화. 알게 된 진실2016.02.25.
탕! 탕! 탕!
철컥, 빙그르르-
리볼버의 탄창이 돌았다.
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탄환을 채워 넣었다.
국정원 내부 사격장, 민준은 오늘 오후에 이곳으로 들어와 벌써 두 시간째 과녁에 총구를 겨누며 서 있다.
박 팀장에게 안 주임에 대한 조사 자료를 받으러 들어왔지만, 민준의 발걸음이 먼저 이곳을 향했다. 형체 없는 불안감이 민준의 집중력을 계속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빌딩들 사이로 태양의 붉은빛이 옅게 스러져 갈 무렵, 설은 설을 기다리고 있던 까만 자동차 뒷좌석에 올라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민준의 눈앞에서.
탕!
민준이 어릴 적, 아빠는 민준이 좋아하는 짜장면을 먹으러 가기로 약속해 놓고,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미안한 얼굴로 민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탕!
작은 집 담벼락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눈물을 훔치던, 어린 민준의 눈앞에서 멀어지던 까만 자동차.
탕!
그리고 그날 밤, 까만 자동차도 아빠도 민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철컥, 빙그르르-
리볼버의 탄창이 다시 한 번 돌았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이제 그만 좀 하지?”
다시 탄창 안에 탄환을 집어넣는 민준의 등 뒤에서 시큰둥한 박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때문에 지금 애들이 무서워서 여길 못 들어온다잖아! 왔으면 사무실로 올 것이지, 너 지금 여기서 뭐하냐?”
“…….”
그제야 민준이 고개를 돌려 박 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없다 했더니.
“우리 밥 먹자, 민준아.”
박 팀장이 씩 웃더니 민준의 목 주위를 한 팔로 빙 둘러 감쌌다.
버르장머리도 없고 상관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괘씸한 녀석이지만, 민준의 외로움을 모르지는 않는다.
민준이 어떻게 국장님의 아들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 년 중 하루는 민준이 이런 얼굴로 찾아가는 곳이 있다는 것과 그날이 바로 국장님 딸 생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국장님은 그날이 오면 언제나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홀로 머물러 있곤 했다.
그래서 알고 있다.
민준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민준이 어떤 마음인지를.
“밥, 밥, 밥!!! 안 사주면 자료 안 줄 거야.”
“저 말고 젠틀한 그놈한테 사달라고 하세요.”
민준이 귀마개를 벗으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끼, 이거 뒤끝 있네. 그리고 놈이 뭐냐? 놈이. 그래도 네 선배인데.”
“누가 선배예요?”
“어?”
“그만뒀으면 끝이고, 한 번 끝났으면 끝난 거지.”
이제 와서 누구 맘대로.
“……역시, 내가 민준이 너 때문이라도 여길 때려치울 수가 없어.”
박 팀장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마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도 이러는데, 내가 여길 나가면 네놈이 날 얼마나 막 대할 거야?”
암만. 네놈 눈에서 1g의 존경심을 발견할 때까지 내 이곳에 뼈를 묻으리라.
“뭐 드실 건데요.”
민준은 까만 방탄조끼를 벗으며 찌푸린 얼굴로 박 팀장을 바라보았다.
“맛있는 거 먹어야지.”
“구체적으로 말합시다. 기분도 안 좋은데.”
박 팀장은 민준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그와 함께 실내 사격장 유리문을 열고 나섰다.
“우리, 짜장면 먹을까?”
“그건 말고요.”
“그럼…… 치킨 먹을까?”
“그것도 빼고.”
“야! 구체적으로 말하라며?”
이 자식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짜장면, 치킨, 맥주 빼고 아무거나 먹어요.”
민준이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더니 이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 설은, 무얼 하고 있을까.
**
“같은 동료였는데 뒷조사라니 찜찜하긴 하더라.”
그래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박 팀장은 민준에게 왜냐고 묻지 않았다.
잘 정리된 종이 파일을 민준에게 건네주고 난 후, 박 팀장은 앞에 놓인 잔에 담긴 소주를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둥근 테이블 위 넓적한 불판에서 하얀 곱창이 기름에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박 팀장에게서 종이 파일을 건네받은 민준은 종이를 넘겨가며 서류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보면 알겠지만, 특별히 이상한 건 없어. 이상한 건 안기영이 왜 거기에 있냐는 거지.”
하필이면 영애와 같은 회사에.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민준이 고개를 들어 박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그거 Pakin 그룹 계열사 아니야?”
설이 다니고 있는 회사 Boni는 Pakin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왜요.”
“백건우.”
역시, 몇 번 들어도 달갑지 않은 이름이다.
“…….”
“건우 아버지가 백인회 회장이잖아. Pakin 그룹 회장 백인회. 몰라?”
“…….”
백인회 회장은 당연히 알고 있다. 일간지 경제면에 얼굴과 이름이 종종 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건우가 백인회 회장 아들이라는 건 금시초문이다.
“옛날에 안기영이 백건우 좋아했었거든. 흐흐흐.”
“…….”
“그래서 나는 기영이가 건우를 쫓아갔나 보다 했지. 물론 건우야 외국에 있다 이제야 한국에 들어오긴 했지만 말이야. 거기 보면 Pakin 그룹 본사와 통화한 기록도 있어.”
“건 겁니까, 받은 겁니까.”
“받기도 하고 걸기도 하긴 했는데…… 업무상 통화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일개 직원이 회장실과 통화할 일은 별로 없겠지? 아니면 혹시 건우 때문에 통화를 한 건가?”
박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실이요?”
“어, 거기 그 번호. 알아보니까 백인회 회장 비서실 전화번호던데?”
박 팀장은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곱창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안에서 호호 굴려가며 다른 한 점에 젓가락을 뻗었다.
“그 외의 다른 건요.”
민준이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뭐가 그렇게 조급해?”
“느낌이 별로 안 좋아서요.”
“……나쁜 일이면 안 되는데 말이야.”
“뭐가 안 돼요?”
어쩐지 기운이 빠진 것 같은 목소리에 민준이 고개를 들어 박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때 동료였잖아.”
“…….”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NIS 요원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간다.
아주 가끔 그 정도를 벗어난 동료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박 팀장은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후배의 뒷조사를 해야 하는 박 팀장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근데, 영애 실물도 그렇게 예쁘냐? 사진 보니까 영부인을 닮아서 아주 미인이던데.”
“……다른 얘기 하죠.”
민준은 호기심 가득한 박 팀장의 시선을 피하며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앞에 놓인 술잔을 보니 또다시 설의 생각이 났다.
“넌 안 마셔?”
“…….”
“하긴. 예쁘면 뭐 하겠냐, 어차피 다른 세상 사람인데. 백건우 정도면 몰라도.”
“다 드셨어요?”
“아니? 더 먹을 건데? 왜, 약속 있어?”
“네.”
“…….”
매정한 놈.
박 팀장이 곱창 한 점을 입에 넣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민준을 째려보았다.
**
비슷한 시각,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설은 청와대 사택이 아닌 대통령 집무실 안에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다닐 만하고?”
“다닐 만하고 안 하고가 어디 있어요. 그냥 다니는 거죠.”
아버지인 대통령과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분명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시려고 설을 부른 게 아니실 텐데.
“봄이라도 밤공기가 아직 차니까, 옷 따듯하게 입고 다니고.”
“아빠.”
아버지는 아까부터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잖아요.”
“…….”
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고, 대통령은 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대통령은 이내 가느다란 한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장인어른께서 남겨놓으신 파일을 찾았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은 절로 벌어진 입술을 다시 굳게 다물며 대통령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됐네요.”
그리고 애써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찾았는데, 파일을 풀어낼 수가 없어.”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내 생각엔,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
왜 이런 말씀을 나한테 하시는 거지?
설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번졌다.
이제 와서 왜 또다시.
“장인어른께서, 너한테 남겨놓으셨으니까.”
읊조리듯 낮게 탄식하는 대통령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말도 안 돼요! 저도 모르게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없…….”
있었을 리가…… 없는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나도 모르게 그런 일…….
“…….”
갑자기 설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잠결에 무심코 만졌던 펜던트의 서늘한 감촉.
“강조국.”
“…….”
“기회가 많지 않아.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많지가 않다.”
“…….”
이건, 꿈이 아니다.
“……미안하다.”
꿈이 아니야.
**
늦은 밤, 설을 태운 자동차가 설의 아파트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설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 왔습니다.”
앞에서 남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민준을, 갑자기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의 목걸이를.
목걸이.
그래.
민준이 설에게 준 목걸이.
‘어젯밤엔 잘 잤어?’
“…….”
설이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민준과, 그의 아파트 거실에 놓여 있던 이상한 오디오.
‘목에서 절대 빼면 안 돼.’
“…….”
민준은 아버지에게 다녀오던 날, 설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다시 청와대로 모실까요?”
“…….”
“영애 님.”
남자의 곤혹스런 말투에 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영애.
아아, 그래. 난 이 나라 대통령의 딸이지.
‘미안하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남긴 중요한 파일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면서.
‘몸조심해야 한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핸드폰 한 번만 빌릴 수 있을까요?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여기 살아? 우리 집 앞 동이네?’
그래서.
‘……혹시, 날 좋아해요?’
‘……관심 있어.’
“…….”
설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느새 무섭게 뛰던 심장 소리가 잠잠해졌고, 마음은 지나치리만큼 고요해졌다. 이윽고 설의 입술이 움직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은 두 눈을 차분하게 내리깔며 뒷좌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경호관이 무어라 이야기를 건넨 것 같았지만, 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자동차에서 내려 보니 아파트 출입구를 밝히는 은은한 조명도 그대로였고, 설을 보자 반가운 듯 눈인사를 해 주시는 경비실 아저씨도 그대로였다.
모든 건 그대로이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을 다르게 보았던 건 설의 부푼 가슴이었고, 또다시 같은 거짓말에 놀아난 것은 설의 어리석음 탓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탓이 아니다.
이건 단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설의 헛된 기대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드디어 오랫동안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원하는 걸 찾았고 아빠는 근심거리를 덜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그러니 사랑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랑이 아니었어도, 그저 좋은 수단에 불과한 연극이었을 뿐이라도 나는 괜찮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까.
“……늦었네.”
“…….”
바닥을 보며 천천히 걷던 설 앞으로 긴 그림자가 졌다. 설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준이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설의 아파트 출입구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랑 얘기가 길어졌어요.”
설은 고요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맥주, 마실까.”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은 아무 말 없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제가 좀 피곤해서요. 대리님도 늦었는데 그만 주무세요.”
“…….”
설은 민준을 지나쳐 아파트 출입구 안쪽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 개의 계단을 지나면 붉은 카펫이 깔린 좁은 복도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돌아 엘리베이터를 타면 집에 올라갈 수 있다. 모든 건 어제와 같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나는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 세수를 하고, 차를 몰고 회사로 출근할 것이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이신 아빠에게 누가 될 수 있으니 민준에게 부탁해야 한다.
원하는 걸 찾았으니, 혹시 동료들과 가지는 술자리에서라도 내 얘기를 꺼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아마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예전으로 돌아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조용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설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어 마침내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어제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거실의 불을 켰다.
느릿하게 옷을 벗은 설은 욕실의 불을 켠 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위의 수도꼭지를 위로 들자 뜨거운 물이 욕조 안으로 콸콸콸 쏟아지면서 따듯한 공기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
다만,
첨벙!
핸드폰을 실수로 물이 가득한 욕조 안에 떨어뜨렸을 뿐이다.
설은 욕조 바닥에 가라앉은 핸드폰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까만 자동차를 타고 갔던 설은 다시 까만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설은 자동차에서 내려 민준의 앞으로 걸어왔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아파트로 돌아온 민준은 뒤 베란다에 서서 설의 집 베란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커튼이 쳐진 틈 사이로 거실의 불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민준은 설의 아파트 앞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운전석에 앉아 아파트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조금 더 지체하면 회사에 지각하게 될 것 같은데.
마침내 민준은 자동차 문을 열고 내려 설의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설의 집 현관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
민준이 도어 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딩동.
하지만 설의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곧이어 벨을 여러 번 눌러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민준은 잠시 망설이다 이윽고 설의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띠디-
민준의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현관에서 바라본 거실엔 깊은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민준은 굳은 얼굴로 성큼 들어서서 곧장 설의 침실 방문을 열었다.
깨끗이 정돈된 침대, 그리고 고요하기만 한 설의 아파트.
다급하게 욕실 문을 연 민준의 눈에 욕조 바닥에 가라앉은, 설의 까만 핸드폰이 보였다.
“…….”
민준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뒤돌아섰다.
떨리는 손으로 손목시계에 부착된 GPS를 추적하여 설의 위치를 확인하는 민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언제라도 이런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잘못 꿰어진 단추는 마지막에 단춧구멍을 찾지 못하고 결국 혼자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설의 손을 놓을 수 없어 계속 붙들고 있었다.
‘그럼 내가 잡아줄게요.’
이제 설은 나를 보고 웃어주지 않을까.
‘네. 그렇게나 좋아요.’
어제 웃으며 떠나갔던 설은 결국 민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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