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17화 (17/94)

17화. 괜찮아2016.03.01.

새벽같이 달려온 강원도 바닷가.

이곳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적막했다. 설은 모래사장 위에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 가까이 밀려왔다가 멀어져 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설은 이곳에서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는 일출을 지켜보았고, 파랗게 밀려온 파도가 하얀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설은 오늘 팀장님께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냈다.

언제고 이런 곳에 와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오게 되었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그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을 어떻게 비워내야 할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지우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은 또다시 심장을 날카롭게 긁어댈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나는 이곳에서 민준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설은 옆에 흩어져 있던 조개껍질 하나를 주워 손에 들었고 모래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천천히 그렸다.

“……찌그러졌네.”

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찌그러졌다. 꼭 지금 설의 마음처럼.

남들과 똑같지 않다는 건 특별한 거라고 말씀해 주시던 할아버지는 이제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동그라미처럼 살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혼자만 모양이 다른 도형을 같은 동그라미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필요한 존재. 소중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필요해서 소중한 강설.

대통령인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내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파일을 내게 남겨놓으신 것처럼.

그러니 민준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아빠처럼 그 파일이 더 중요했을 뿐.

하지만 민준이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그 어느 쪽으로 생각의 추가 기울어도, 마음을 잠식한 고통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아빠는 내가 위험할 수 있으니 나를 최대한 보호해야 했다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위험한 것인지, 아니면 중요한 파일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위험한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똑똑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저벅저벅, 인적이 드문 모래사장 저편에서 누군가 설을 향해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설은 다시 한 번 더 모래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그라미는 예쁘게 그려지지 않았다. 설은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다시 한 번 더, 조개껍질이 모래 위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설의 등 뒤에 다가와 멈춰 선 발자국의 주인은 설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할 말이 없거나, 할 수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동그라미 잘 그려요?”

설이 바닥에 작은 원을 다시 그리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등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민준이든 아빠가 보낸 경호관이든, 그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

하지만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경호관은 아닌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경호관이 맞겠다.

어찌 되었든 민준이 투입된 표면상의 명분은 설을 근거리에서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들었으니까.

또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NIS 국장은 특별히 아들인 민준을 설에게 붙였다고 했다.

민준이 준 목걸이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설을 찾기 위한 도구가 맞았다.

지금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설의 위치를 알고 찾아올 수 있도록, 이 사람에게 꼭 필요했던 도구.

밤마다 침대에 누워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던 마음이 조금 가엽긴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설이 괜찮든 괜찮지 않든,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설이 아니니까.

“……강설.”

무겁게 가라앉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네요.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

설의 무심한 목소리에 민준이 뜨거운 호흡을 안으로 삼키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앉아 있었던 건지, 설의 하얀 손등이 추위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 파일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없어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합니다.”

설은 다시 하얀 조개껍질을 손에 쥐고 무심히 동그라미를 그렸고, 민준은 욱신거리는 심장에 눈썹을 아래로 일그러뜨렸다.

민준은 설이 자신을 외면한다고 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보고 싶고 그리워해도 돌아올 수 없는 친부모님에 비하면, 자신의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설이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괴로운 마음을 혼자 안으로 삭이고 있는 설을 안아줄 수 없는 현실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도.

“당신의 임무는 이제 끝났어요. 그러니 더 이상 이렇게 나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돼요.”

쏴아-

깊숙하게 밀려왔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파도가 작은 물방울들을 공중에 흩뿌렸다.

설이 고개를 들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기운이 얼굴에 와 닿자 설은 인상을 조금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은 안 돼. 당신이 위험할 수 있어.”

설은 지금 민준에게 더 이상 곁에 있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겠지만, 민준은 그럴 수 없다.

설을 위험하게 할 수도 없고, 또한 설의 얼굴을 보지 않을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옆에 남아 있겠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게 어때서요.”

설은 손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빙글 뒤돌아 민준을 바라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민준이 두 눈에 힘을 주며 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은 지금 민준을 비웃고 있고, 민준을 상처 입히기 위해 자신에게 똑같은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건 민준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설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어리석게도 두 번씩이나 똑같은 배신을 당한, 자신에 대한 비웃음.

“3년 전에 찾지 못했던 걸 당신이 찾았으니 이제 승진을 하게 되나요? 당신이 그걸로 무얼 얻어내든지 간에 하나만 부탁할게요. 사람들한테 이야기할 당신의 영웅담에 내 얘기는 끼워 넣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

아프다.

설이 아파서.

“그리고 혹시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나와의 모든 기억을 당신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줘요. 부탁합니다.”

“…….”

민준이 잠시 숨을 멈추고 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을.

설은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민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원망도 미움도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차분한 눈동자.

마치, 민준의 존재를 전부 비워낸 것처럼.

“그게 지금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거예요.”

“…….”

“김민준 요원님.”

쏴아-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뒤로 거대한 파도가 두 사람을 덮칠 듯 밀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다시 되돌아갔다.

설이 시선을 돌리며 뒤돌아 앞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민준은 우두커니 선 채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한남동 주택가. 붉은 벽돌로 높게 둘러진 담장 너머 위로 하얀 저택의 2층 창문이 보인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의 회장들이 여럿 살고 있어 유명한 동네, 그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웅장한 저택은 Pakin 그룹 백인회 회장의 저택이다.

하얀 철문이 안쪽으로 열리자 건우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색 잔디가 잘 다듬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건우가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아주머니 한 분이 현관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와 건우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요?”

건우는 서류가방을 받아들려는 아주머니께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물었다.

“좀 전에 서재로 차 내다 드렸어요.”

“저녁은 먹었습니다.”

건우는 몸을 틀어 곧장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안쪽에 위치한 아버지의 서재 앞에 다가서자, 건우는 가볍게 노크를 하고 손잡이를 안쪽으로 밀었다.

“……몸이 아프다라…… 하여튼 알겠습니다. 그럼 또 전화하기로 하지요.”

누군가와 한참 통화를 하던 백 회장이 힐끗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건우와 눈이 마주치자 건우에게 등을 보이며 서둘러 대화를 끝마쳤다.

“다 늦은 밤에 누구랑 그렇게 전화를 하세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래, 저녁은. 먹었고?”

백 회장이 건우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고, 건우는 서류 가방을 소파 옆에 내려놓으며 백 회장 대각선 방향 소파에 앉았다.

“그럼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요.”

“젊다고 방심하지 말고 몸 단단히 챙겨, 너도 곧 서른이야. 이제 슬슬 결혼도 해야 하는데.”

결혼이란 말에 건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결혼이라.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때가 되면 집에 데리고 올게요.”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흐음.

백 회장이 흥미롭다는 듯 건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어떤 아가씨인지는 몰라도, 네가 만나는 사람이라니 궁금하긴 하구나.”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건우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건우는 이제 더 이상 설을 피하지 않고 그녀 곁으로 갈 생각이었다.

“말해 봐.”

“저 Boni에 자리 하나 마련해주세요.”

“Boni는 왜? 넌 원래 백화점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생각이 바뀌었어요. 거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백 회장은 두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건우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들 건우가 설마 무얼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냐?”

“아버지께서 설마 계열사 말단 직원까지 아시겠어요?”

건우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 회장을 쳐다보았다.

“강설이라고, Boni 마케팅팀에 있는 친구예요.”

이제 난 설에게 거짓 없는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엔 그때처럼 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건우는 설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골치가 아파진 백 회장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하필 영애인 건지, 아니면 영애라서 다행인 건지를.

**

“얘기 좀 해.”

하루 종일 설의 몇 발자국 뒤에서 설을 따라 걷던 민준이 마침내 테이블 가까이 다가와 설에게 말을 건넸다.

“난 당신한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

설은 오늘 바닷가를 걷고 나서 조그만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2층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차게 식은 커피 잔을 옆에 둔 채 가방에서 작은 다이어리를 꺼내 까만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설은 민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스케치한 그림 위에 명암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선 밖으로 까만 명암이 삐져나올까 봐 설은 조심스럽게 모서리 부분을 색칠했다.

“난 정말 아는 게 없다고 말했잖아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선 밖으로 까만색이 조금 삐져나왔다. 설이 이마를 조금 찡그리며 삐져나온 자국 위로 굵은 선을 덧칠하기 시작했다.

“강설.”

민준이 서늘한 목소리로 설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설은 지금 민준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면서도 일부러 대화를 피하는 것이다.

“3년 전 당신들이 했던 조사가 전부예요. 내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여태껏 그게 나한테 있었던 거겠죠.”

이번엔 파란 펜을 꺼내 조심스럽게 선을 그려 넣었다.

바다색과 같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파란 등대.

설은 자신이 지금 파란 등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파란 등대.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그 얘기 말고 당신과 나 사이에 다른 할 말이 뭐가 있는데요?”

낮에는 바다색과 같아 보이지 않고, 밤이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등대.

둥근 타워 부분이 예쁘게 그려지지 않자 설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나한테는 당신 안전이 더 중요해.”

“당신이 채워놓은 위치 추적기도 이렇게 얌전히 차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죠?”

“…….”

설의 목 언저리에 민준이 선물한 목걸이가 그대로 걸려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의 징표인 줄 알았던 위치 추적기.

펜을 움켜쥔 설의 오른손이 제가 한 말에 상처를 받아 희미하게 떨렸다.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녹아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울지 마.”

설의 오른손이 떨리는 것을 바라보던 민준이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내가 왜 울어요.”

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민준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무표정하던 얼굴에 어느새 단단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당신은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아 놓고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나한테 울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난 안 미안해.”

“…….”

“내 마음은 진짜니까. 그래서 난 당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거야.”

미안하지 않다.

이제 설이 아니라면 갈 곳 없어진 내 마음은 설에게 미안하지 않다.

가짜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에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은 설과 함께 있는 미래를 꿈꾸는 욕심이 생겨 버린 내 마음은.

“당신한테도 진짜라는 게 있어요? 당신이 실패하면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요. 나한테서 뭔가를 얻어낼 때까지 당신 뒤에 도대체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남아 있는 거죠?”

“……있어.”

나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당신이 차라리 고맙고 다행인 내 마음은 진짜야. 이렇게 아픈 당신을 안아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내 마음도 진짜야, 강설.

“아니, 전부 다 가짜야.”

외로워 보여 손잡아 주고 싶었던 당신의 눈빛도, 어린아이처럼 나를 보며 웃던 당신의 미소도.

당신 몸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흉터가 여전히 아픈 상처일까 봐 감히 묻지 못했던 내 마음이 무색하게 NIS 국장 아들이라는 당신은.

“당신은, 전부 다 가짜라고.”

“…….”

나에게 음악을 들려주던 당신도, 커다란 곰 인형을 선물로 안겨주던 당신도, 작고 어두운 공터에서 발아래 펼쳐진 야경을 보여주며 뿌듯한 미소를 짓던 당신도 다 거짓이었어.

따듯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설의 눈앞이 눈물로 뿌옇게 흐려졌다.

“당신 때문에 우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아요.”

내게 주어진 무거운 짐이 사실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그런 당신이라도 내게 변명을 해주길 바라고 괜찮다고 안아주길 바라는 내가 너무 초라하고 한심해서 우는 거야.

당신 앞에 보이는 이 눈물마저도 비참하고 한심해서.

설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창백한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고,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설을 바라보던 민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설이 울고 있는데, 설을 안아줄 수가 없어서.

“……강조국.”

나지막한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렇게 부르지 마요!”

가짜인 강설에게는 처음부터 진짜일 수 없는 사랑이었다.

가짜와 가짜가 만나, 마치 진짜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하며 거짓 사랑 놀음을 했다.

“당신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

“그러니까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사랑으로, 행복한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묻어둔 내 진짜 이름을.

설은 민준을 차갑게 바라보며 떨리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마음을 베어내는 설의 싸늘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아프게 베어내도 어차피 설이 아니라면 갈 곳 없는 마음이었다.

“……나 때문에 울지 마.”

아니라고 해도 설이 울고 있는 게 나 때문임을 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나 때문에 상처받고 울지 말기를.

“아무것도 아니잖아,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이 상처를 줬다 해도 그건 상처가 아니라, 그저 운이 나빠 일어난 사고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하면 된다.

그러니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그러니까, 당신은 괜찮아.”

당신은 상처받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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