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나무가 되어2016.03.08.
동생 서연이 사옥 1층 중앙 현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지고 난 후, 민준은 1층 카페를 바라보았다.
설은 한 손에 테이크아웃 용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설이 가까이 다가오자 민준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설은 고개를 들어 상단의 빨간 숫자가 하나씩 바뀌는 것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와 멈추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부딪칠 듯 가까워지자 민준은 습관처럼 설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그녀의 어깨 가까이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닫힌 엘리베이터의 은색 문에 비쳐 보이자, 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민준은 문에 비친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9층에 도착했고, 민준과 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사무실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유리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오늘은 웬일인지 각 팀 팀장들 모두가 일찍 출근해서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네.”
민준이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정한(?) 사회인으로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처음인지라, 민준은 눈앞에 왜 이런 광경이 펼쳐졌는지 의아했다.
“누가 오나 보네.”
“…….”
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마케팅 팀 파티션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팀장들의 낯선 모습에서 유추해 보건대, 최소한 전무이사 이상의 임원이 오늘 아침 이 공간을 들를 터였다.
정확히 민준에게 한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의 대꾸에 민준의 얼굴에는 따듯한 온기가 돌았다.
민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설의 뒤를 따라 해외사업부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민준이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해외사업부 최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화답했다.
우리가 이 정도의 사이는 아닌데.
몸은 민준을 향해 있지만 최 팀장의 시선은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은 등 뒤를 돌아보았다.
“김민준 대리님.”
눈앞으로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민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까 1층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던데. 혹시 만났나요?”
“……그렇습니다만.”
“다행이네요.”
건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하자, 해외사업부 팀장이 건우의 뒤를 따라 걸었다. 민준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마케팅팀을 바라보았다.
설은 노트북을 켜고 하얀 화면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건지, 설의 귀에는 주변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색이 안 좋네.”
“…….”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잠을 잘 못 잤어?”
백건우,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왜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거지?
“……이건 또 뭐죠?”
이제 김민준 한 명으로는 부족한 건가?
픽.
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지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 마우스에 얹은 검지를 의미 없이 까딱거렸다.
“오늘부터 마케팅팀에서 일하게 됐어. 잘 부탁해, 강 주임.”
설은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건우가 설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여기 구내식당 밥은 맛있어?”
냉랭한 분위기를 풀고 싶었던 건우의 친근한 말투에 설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설이 고개를 들어 건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궁금하면 직접 먹어봐요. 맛이 있나 없나.”
“…….”
눈빛만큼 차가운 설의 말투에 건우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하.하. 백 팀장님, 강 주임이랑 서로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노, 농담도 막 하고 말입니다. 하.하.하.하.”
괜히 건우의 뒤를 따라 붙었다 심상치 않은 광경을 목격하게 된 해외사업부 팀장의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씰룩거렸다.
하지만 건우는 최 팀장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이제 들어왔어. 사실 여기로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네가 이곳에 있어서.”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쩌면 우린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네가 나를 예전처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매일 조금씩 커져서.
“…….”
건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주변을 서성이던 직원들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백 팀장, 백 회장님 아들이잖아? 근데 강 주임이랑 둘이 아는 사이인가 봐.’
‘강 주임 잘하면 팔자 고치겠네! 대박이다!’
“그럼 강 주임 이제 신데렐라 되는 거야?”
누군가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야 할 말을 신중치 못하게 입 밖으로 불쑥 내뱉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쯧. 미운털 박히면 어쩌려고, 이 사람이.
“신데렐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숨죽인 공간의 무거운 공기가 일순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외 발주 넣었던 제품들 입고되었다는데.”
“…….”
“물품하고 수량 맞나 확인해 봐. 중요한 거라며.”
직원들을 헤치고 나타난 민준이 설에게 까만 글씨가 빼곡하게 인쇄되어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설은 민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고맙습니다.”
민준에게서 종이 뭉치를 건네받은 설은 곧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오른손에 펜을 쥐고 종이 위에 써진 숫자들을 빠르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직원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갔고, 설 앞에는 민준과 건우만이 남았다.
“그런데, 직책이 뭡니까.”
민준이 빙글 몸을 돌려 건우를 마주 보고 섰다.
“마케팅팀 팀장입니다.”
민준이 시선을 조금 내려 건우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쳐다보았다. 하얀 플라스틱 조각 안에 부장 백건우 마케팅팀 팀장이라고 써진 글씨가 보였다.
“……아, 백 팀장님. 그럼 전에 계시던 홍 팀장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잘 가시라는 인사도 못 드렸는데.”
“다른 계열사로 이동한 걸로 아는데요.”
“아, 이동이요.”
하루아침에 다른 계열사로 이동하는 것쯤이야 월급쟁이 직장인들이 얼마든지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
그렇지만 백건우의 사랑을 위해 영문도 모르고 책상을 비켜줘야 했을 홍 팀장은 참 기분 엿 같겠네.
민준이 보일 듯 말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제 출근했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설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안 주임을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이야, 안 주임.”
민준의 목소리에 안 주임이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네. 안녕하세요, 대리님.”
그리고 민준과 마주 보고 선 건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건우가 힐끗 기영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민준을 바라보았다.
안기영이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백건우가 이곳으로 출근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백건우가 알려줬을까?
“혹시 안 주임도 아십니까?”
민준이 태연한 목소리로 건우에게 물었다.
“아니요, 오늘 처음 봤습니다.”
건우는 기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분명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아직 마음을 열지 않은 설 앞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
민준은 잠시 건우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백건우는 자신이 안 주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설에게 들키고 싶지 않거나 적어도 안 주임과 엮이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누가 알려줬을까.
민준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건우를 보자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서는 거짓말하는 훈련도 한다던데요.’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
딩동.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민준의 귀에 핸드폰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5,000원 카페 Boni.
픽.
민준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거라도 살 것처럼 굴더니 1층 카페에서 정말 커피만 마시면서 민준을 기다릴 생각인 건지.
한번 울린 핸드폰은 그 뒤로 12시가 될 때까지 계속 잠잠했다.
12시 조금 전, 민준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리에서 좀 일찍 일어섰다.
여느 때 같으면 설의 자리로 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동생 서연이 와 있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동생이 1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식사 잘하고.
9층 복도로 나온 민준은 서둘러 설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녀가 민준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민준이 설을 피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설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간 민준은 곧바로 카페를 향해 걸어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를 기다리던 서연이 반색을 하며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심심하지 않았어?”
“전혀 안 심심했어.”
혼자서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도 않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서연의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가 가득했다.
“뭐 먹고 싶어? 시간이 1시간 정도밖에 없으니 빨리 말해야 할 거야.”
“아무거나 먹자. 이 건물 지하에 식당도 있던데, 거기는 회사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야?”
“그건 아니지만 거긴 말고.”
“그래. 거기로 가자, 오빠.”
어쩌면 민준의 일방적인 대화 스킬은 가족 내력인지도 모른다.
서연이 민준의 팔짱을 끼고 출입문을 향해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거기 말고 다른 데 가자니까.”
“혹시 내가 창피해서 그러는 거야? 회사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창피해서?”
서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걸음을 멈춰 서자, 민준이 눈썹을 찡그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민준이 팔짱을 끼고 서연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밥만 먹고 간다고 오빠한테 약속해.”
“당연하지!”
카멜레온도 아닌데, 서연의 얼굴 표정은 휙휙 잘도 변했다. 서연이 두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
“누굽니까, 대리님?”
“예쁘네요.”
“결혼하십니까?”
하지만 서연이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도, 민준은 낯선 여자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 대상이 되었다.
식판을 들고 민준 옆을 지나치는 사무실 직원들이 마치 덕담이라도 건네듯 민준에게 한마디씩 던지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후배입니다.”
민준은 매번 같은 대답을 하며 맞은편에 앉아 야무지게 식사를 하고 있는 서연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고, 그럴 때마다 서연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후배였어요? 친한 동생이라더니.”
“…….”
“친한 오빠, 찾았네요?”
“네!”
민준의 테이블 근처에 멈춰선 건우가 서연을 쳐다보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건우는 마케팅팀 직원들과 함께 식판을 손에 들고 서서 서연과 민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이 서연의 뒤를 스쳐 지나갔고, 서연의 자리 몇 칸 옆에 하얀 식판을 내려놓았다.
“그럼 맛있게 먹어요.”
건우가 서연에게 말을 건넨 후 테이블을 지나 설의 맞은편에 식판을 놓고 마주 앉았다.
하아.
민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판 위에 내려놓았다. 식욕이 싹 달아나 버렸다.
“오빠, 왜 그래?”
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준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서연이 너,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할 말도 있고, 또 받을 것도 있고. 후훗.”
“받긴 뭘 받아.”
“내 생일 선물 말이야. 오빠가 저번에 나한테 괜찮은 쥬얼리 숍 좀 알려달라고 했잖아. 후후후.”
“…….”
“목걸이? 반지? 뭐야 응응?? 나한테 뭘 사주려고? 응?”
“사주려고 물어봤던 거 아니야.”
민준의 얼굴이 굳어지자 서연이 슬쩍 민준의 눈치를 살피더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난 또 오빠가 나한테 선물해주려고 물어본 줄 알고.”
“…….”
“……에잇. 역시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
여자들은, 아니 세상 모든 여자들은 어렵다. 어떻게 물리적인 힘도 들이지 않고 이렇게 원하는 걸 얻어낼 수가 있는 건지.
“오빠가 사줄 수는 있는데, 그런 건 남자친구한테 사달라고 해야지.”
민준의 어조가 조금 전보다 한층 누그러졌다.
“어제 헤어졌어.”
“…….”
“The end.”
그는 밥 한 숟가락을 야무지게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헤어졌는데?”
만나고 헤어지는 게 이렇게 쉬운 건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감정을 싹둑 잘라내고 이렇게 흔적 없이 깨끗하게 비워낼 수 있는 건지…….
“내 생일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
서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민준의 눈빛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그 아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
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동차가 그녀의 아파트를 지나 계속 달리자 설이 민준을 정색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난 집으로 가야 하는데요.”
“내가 잠깐 어딜 들러야 하거든. 잠깐이면 돼.”
“당신 개인적인 일정까지 같이할 생각은 없어요.”
“동생 생일이 내일모레인데, 선물을 아직 못 샀어. 아까 회사에서 본 동생 말이야.”
“당신 후배 선물을 사는데, 나더러 지금 같이 동행을 하라는 말이에요?”
“후배가 아니라 동생이야. 친동생은 아니지만, 진짜 여동생은 맞아.”
친동생도 아닌데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고 카드를 건네주는 사이를 여동생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설은 마음속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그대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민준에게 그런 말을 물을 필요가 없는데, 내가 왜.
무거운 침묵 속에 잠시 후 민준의 자동차가 어느 쥬얼리 샵 앞에 멈춰 섰다.
“같이 골라 줄래? 이왕이면 좋아할 만한 걸로 사주고 싶은데 내가 그런 걸 볼 줄 몰라서.”
나에겐 위치 추적기가 달린 목걸이를 선물했던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당신의 친한 동생을 위해 선물을 골라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건지.
“……그래요. 당신한테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도와드리죠.”
설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민준의 모습이 가짜인 것처럼, 이런 위선적인 내 모습도 가짜이다.
우리 사이에는 이렇게 거짓만이 존재하는데, 아직도 그걸 실감하지 못하는 심장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슴을 아프게 옭죄고 있을 뿐.
설이 자동차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린 뒤 쥬얼리 숍 안으로 들어갔다.
**
“이십 대 초중반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아무거나 좀 보여주십시오.”
“여자 친구 선물하시게요?”
“아니요. 동생 생일 선물입니다.”
투명한 사각 유리 진열대 안에 반짝이는 보석들이 하나하나 케이스에 소중하게 담겨 있었다.
직원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민준에게 이런저런 제품을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무심코 민준을 바라본 직원이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응? 손님!! 그 왜, 나무 목걸이 주문하셨던 분 아니십니까! 목걸이 찾아가셨잖아요. 나무에 무성한 나뭇잎까지 일일이 세공하느라 저희 진짜 죽을 뻔했는데, 받는 분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아무 표정 없이 진열대 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던 설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고, 민준의 얼굴이 씁쓸하게 굳어졌다.
“그거 만들어보니 꽤 예뻐서 저희도 비슷하게 만들어봤는데 결혼을 앞둔 커플에게 꽤 반응이 좋았어요. 아, 물론 똑같이 만든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세밀하게 그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만들 수도 없고요. 그런데 큰 나무, 이게 뜻이 좋잖아요. 너한테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큰 나무가 되어주겠다, 뭐 이런 뜻 아닙니까? 받는 여자 분들이 엄청 감동하시더라고요.”
“그런 뜻 아닙니다.”
“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무슨 뜻입니까??”
“술 마시고 아무 나무나 붙들고 얘기하지 말라고요.”
네가 외롭지 않도록 내가 너의 나무가 되어주겠다고.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너를 안아주는 그런 나무가.
“그런 뜻도 있습니까??”
“……목걸이나 보여주세요. 젊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민준은 굳은 얼굴로 정면 진열대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게 좋을까.”
그리고 직원이 보여준 몇 개의 목걸이를 앞에 두고 설에게 물었다.
“새로 사지 말고 사 놓은 걸 주면 되잖아요.”
“…….”
움찔.
민준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운데가 괜찮을 것 같네요. 그걸로 포장해 주십시오.”
직원이 조심스럽게 제품을 꺼내 한쪽으로 가져가 포장을 하기 시작했고, 민준은 허리를 곧게 펴고 설을 마주 보고 섰다.
설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민준의 시선이 설의 쇄골 근처에 가 멈추었다. 설의 목에는 아무런 목걸이도 걸려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펜던트도, 민준이 준 목걸이도.
“……목걸이가 없네.”
“무거워서요.”
“…….”
“추적기는 가방 안에 잘 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
설의 담담한 말투에 민준의 눈빛이 짙어졌다.
소리 내지 않는 고통도, 그 괴로움의 크기를 가늠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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