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20화 (20/94)

20화. 오래된 인연2016.03.10.

경기도 모처에 있는 추모 공원, 납골당 안.

김 국장은 유리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사진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김 국장은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해마다 이 날만 되면 김 국장의 시계는 20여 년 전 그날로 다시 되돌아갔다.

가장 친한 동료이자 벗이었던 김재권은 작전 중 사망할 당시 두 눈을 감지 못했다.

연락을 받고 뛰어간 협력 병원 영안실에서 차가운 모습으로 누워 있던 재권의 두 눈을 감겨주며 김 국장은 오열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죽음을 예감해야 했던 그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면 김 국장은 아직도 심장이 저리고 숨이 막혀 왔다.

511번.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려야 했던 요원들은 사망 후에도 자기 이름을 저승으로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김 국장은 제수씨의 바람대로, 화장한 재권의 유골을 찾아 이곳 추모 공원에 안장했다.

그리고 재권이 많이 그리웠는지 1년 뒤 같은 날 세상을 떠난 제수씨의 유골을 귀국 후 어렵게 찾아 재권의 곁에 함께 두었다.

그날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딸 서연이 예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어린 민준을 집에 데리고 오던 날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김 국장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주문을 외웠다.

**

‘딸이라니 좋겠어. 나도 예쁜 딸 하나 더 낳아야 하는데. 우리 민준이가 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짜장면을 같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녀석이 그걸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하하하.’

어려운 임무를 마치고 NIS로 복귀했던 재권은 김 국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리고 아내의 진통이 예정일보다 빨리 시작돼 초조해하고 있던 김 국장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제수씨한테 다녀와. 기다릴 거 아냐. 대신 민준이 짜장면은 네가 사줘라. 녀석이 화가 많이 났더라고.’

당사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내와 아이를 빨리 보고 싶었던 김 국장은 자신을 대신해 임수를 수행하겠다고 나선 재권의 고마운 마음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욕심이 결국 재권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냈다.

**

“…….”

과거를 추억하는 김 국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재권아. 우리 아들이 말이야. 짜장면을 사줘도 먹지를 않았어, 그 녀석이.

김 국장은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어린 딸과 아내를 두고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넋을 잃은 제수씨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빠를 기다리며 대문 앞을 매일 서성거린다는 어린 민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숨이 막혀서 도저히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2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뒤늦은 제수씨의 부고를 들었고, 민준이 입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집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재권이 애달파 했던 아들 민준이 멍투성이가 되어 어두운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모습을.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슴속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김 국장이 떨리는 손을 차가운 유리에 올리며 물기 어린 두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재권아.”

아들 민준이가 우리와 같은 길을 걷게 해서.

**

“김서연, 여기 식당 아니야.”

낮 12시.

회사 사옥 1층에 또다시 나타난 서연을 보고 어이가 없어진 민준은 서연의 뺨을 두 손으로 쭉 잡아 당겼다.

민준의 신분이 밖으로 드러났을 때 행여 좋지 않은 상황에라도 휘말릴까 봐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런 민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서연이었다.

그렇다고 민준이 하는 일을 자세히 말해줄 수도 없고.

“으으, 이그 느르그!!”

“너 학교 안 가? 학생이 학교는 안 가고 여긴 왜 자꾸 오는데? 엉?”

“으으!! 으프드그! 에이 진짜!”

낑낑거리다 간신히 민준의 팔을 뿌리친 서연이 빨갛게 변한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민준을 찌릿 노려보았다.

“여기서 점심만 먹고 학교로 갈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점심을 왜 여기서 먹어? 학생이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지.”

“나, 오빠 회사 완전 마음에 들어. 나도 나중에 여기 취직할까 봐.”

서연이 생긋 웃으며 민준을 휙 지나치더니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야, 어디 가려고!”

이 녀석이 진짜!

“안 타? 우리 밥 먹으러 가야지, 오빠!”

“…….”

하아.

서연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는 민준을 향해 어서 타라며 빠른 손짓을 했다.

오빠한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서연은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

“자주 보네요?”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

서연 때문에 민망함에 얼굴이 벌게진 민준 앞에 건우가 식판을 들고 멈춰 섰다.

건우는 서연에게 아는 척을 하며 웃었다. 설은 이미 서연의 건너편 옆자리에 앉아 혼자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아직 학생인가 봐요?”

“여자 친구 아닙니다.”

건우의 말에 민준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후배라면서요.”

“백 팀장님은 후배랑 같은 집에서 사십니까?”

“그럼 동생이에요?”

“……김서연, 네가 대답해.”

민준이 밥을 한입 가득 넣고 오물거리는 서연을 바라보며 마침내 체념하듯 말했다.

이제 와서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아니, 숨기고 싶지 않아졌다.

민준이 왼쪽 대각선으로 앉은 설을 힐끔 쳐다보았다.

“우리 오빠 동생 김서연입니다, 후훗.”

“아, 진짜 동생이었어요? 그런데 왜 아는 동생이라고 했어요? 사람들 오해하게.”

아무래도 신분 노출에 따른 위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준이 NIS 요원이라는 걸 알려줄 수도 없었을 테고.

민준이 왜 그랬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지만 건우는 부러 짓궂게 물었다.

“우리 오빠가 곤란할까 봐요.”

서연은 건우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안에 여전히 음식을 가득 물고 있었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날 곤란하게 하는 거거든?

쯧.

민준이 서연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설을 힐끔 곁눈질한 뒤 다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의 대답에 잠깐 멈칫했던 설의 젓가락이, 다시 그녀의 식판 위에서 무심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있잖아요.”

갑자기 서연이 고개를 옆으로 쑥 내밀더니 말없이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설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서연의 두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사실 서연이 오늘 이곳에 다시 온 이유는 이 예쁜 언니의 정체가 궁금해서였다.

어제 오빠가 밥을 먹으면서 이따금씩 이 언니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걸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 음식만 보던 오빠가 그러는 것은 아주 이상하고 의심할 만한 행동이었다.

“……저 말인가요?”

설이 고개를 돌려 서연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 언니요.”

“내 이름이 왜 궁금해요?”

“저 언니랑 밥 같이 먹어도 되죠?”

서연은 설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민준의 두 눈이 반사적으로 휘둥그레졌다.

서연은 민준이 말릴 새도 없이 후닥닥 설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리 와, 김서연.”

서연을 제자리로 소환하는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저게 진짜 무슨 말을 하려고.

메롱~

서연은 당황한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월척을 낚았다는 걸 확신했다.

“언니도 우리 오빠랑 같은 곳에서 일해요?”

“……아니요. 다른 부서예요.”

“김서연, 질문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민준은 식판을 들고 서연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의자를 당겨 앉으며 눈앞의 설을 바라보았다.

“일일이 대답해 주지 않아도 돼.”

민준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들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연이 민준에게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설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우리 오빠랑 저녁 먹을 건데 언니도 올래요? 내일이 제 생일이거든요.”

“…….”

설은 당황한 얼굴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밝고 구김살 없어 보이는 사람 같긴 했지만, 초면인데 생일에 초대를 하다니 지나치게 구김이 없었다.

“혹시 생일이라고 하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러세요? 괜찮아요! 오빠랑 밥만 먹을 거니까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7시 어때요, 언니? 혹시 시간이 너무 이른가요? 전 조금 더 늦게 만나도 괜찮아요.”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요.”

이 집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남의 말을 안 듣는 거야?

설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좋아요, 그럼 7시! 여기 건너편에 제가 봐둔 곳이 있어요. 후훗.”

“…….”

설이 입을 다물고 서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 혹시 패밀리 레스토랑은 싫어하세요? 그럼 제가 다른 데 알아볼게요.”

“생일 식사는 가족끼리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생일이라면서요.”

“…….”

설은 담담한 말투로 서연에게 말을 건넨 후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설이 생각하기에 심한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줄곧 싱글벙글거리던 서연이 금세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은 가족들이 바쁘거든요. 그래서 언니는 올 수 없어요? 잠깐이면 되는데.”

“…….”

“……안 되는가 보네.”

서연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판 위로 힘없이 내려놓았다.

“…….”

“그래도 괜찮아요. 언제나 그러니까요.”

“…….”

설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닌데, 서연의 표정을 보니 왠지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식당을 나와 발랄하게 걸어가는 서연의 등 뒤에서 민준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홱 뒤돌아 민준을 바라보더니 씩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웃어?”

민준이 눈을 위로 치켜떴다.

어이가 없다. 오빠의 직장(?)을 이렇게 정신없이 휘저어 놓고 가면서 웃다니.

“그래서. 오빠는 싫어?”

설은 의기소침해 앉아 있는 서연에게 잠깐 정도는 함께 있다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연기 많이 늘었네, 김서연. 연극 동아리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훗. 연기라기보다는 오빠를 위한 동생의 마음이지.”

서연은 긴 머리카락을 도도하게 어깨 너머로 쓸어 넘겼다.

“나를 위해? 뭘 위해?”

“오빠, 그 언니한테 관심 있잖아.”

“……그런 거 아니야.”

민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연을 쳐다보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빠가 그 언니 쳐다보는 거 다 봤거든? 그 언니는 오빠를 안 쳐다보는데 말이야.”

“…….”

어린 동생한테 별걸 다 보여준다, 진짜.

그래서 서연은 조금 속상했다. 오빠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처음 봤는데, 그 언니는 오빠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쪽팔리게 짝사랑이 뭐냐?”

서연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민준이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럼 그 언니 이따 오지 말라고 할까?”

“……까분다.”

민준이 검지로 서연의 이마를 꾹 누르며 가볍게 밀었다.

몽글몽글한 기분은 가슴속 깊이 감추었지만, 기분 좋게 위로 말려 올라간 미소는 감춰지지 않았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김서연~ 생일 축하합니다!!!”

서연은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후 하얀 케이크 위에 꽂힌 스물네 개의 촛불을 훅 불어 한 번에 껐다.

설과 민준이 이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이미 둥근 케이크가 올라와 있었다.

서연은 케이크를 셀프로 사왔고, 셀프로 노래를 불렀으며, 마침내 씩씩하게 입바람을 불어 촛불을 한 번에 꺼트렸다.

민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았지만, 곧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일 축하해, 김서연.”

민준이 서류 가방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 서연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어제 설과 함께 들렀던 쥬얼리 숍에서 산 목걸이였다.

“생일 축하해요, 서연 씨. 그런데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대신 오늘 저녁은 내가 사게 해줘요.”

사실 설이 선물을 사려고 했으면 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곳이 설이 앉아 있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설과 불편한 관계인 민준의 동생, 서연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아니요, 오늘 말고 다른 날 사주세요. 오늘은 우리 아빠가 사주는 거거든요.”

서연이 설의 눈앞에 카드 한 장을 흔들며 웃었다.

아빠는 내일도 늦으실 테고, 엄마는 매년 이날 그랬듯이 표정이 숙연해지실 것이다.

서연의 생일은 부모님께서 그녀가 갖고 싶어 하는 선물을 별다른 말씀 없이 사주시는 유일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분들께 기쁜 날은 아니었고, 생일을 축하해 주며 웃고 있는 오빠의 눈빛은 유난히 짙었다.

그래서 생일이 되면 하루 종일 친구들과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혹시나 사랑받지 못하는 딸이라는 못된 생각이 들까 봐.

“우아. 진짜 목걸이야, 대박!”

서연은 재빨리 포장지를 벗겨낸 후 사각 케이스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곰돌이가 뭐야.”

목걸이에 달린 앙증맞은 곰돌이에 시선이 가 닿자 서연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다른 동물은 없었어. 진짜야.”

민준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동물 종류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

서연이 씩씩거리며 민준을 째려보았고, 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다 큰 성인인데도 친구처럼 아옹다옹하는 남매를 보니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언니 것 좀 보여주세요. 한번 비교해 보게.”

서연의 말에 당황한 설의 눈빛이 흔들렸고, 민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밥 먹자. 뭐 먹을 거야?”

눈치를 줘도 일부러 눈치를 튕겨내는 건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설을 쳐다보는 서연에게 민준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 언니가 아니야??”

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녀가 민준의 귓가에 재빨리 속삭였다.

서연은 작게 속삭였지만,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설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못 듣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스테이크 뭐 먹을래?”

“아니면, 혹시 차였어? 나 지금 괜한 데 삽질한 거야?”

“……샐러드는.”

민준이 이를 악물고 두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서연을 노려보았다.

그만해, 김서연.

“……미안해, 오빠.”

민준의 얼굴 표정이 험악(?)해지자 서연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하지 마.”

“넵.”

서연이 재빨리 메뉴판을 펼치더니 그 속에 얼굴을 파묻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분명히 정황상 그 선물의 주인공은 앞에 있는 언니가 맞는데, 그럼 진짜 차인 건가?

잠시 후, 세 사람의 식사가 어색한 침묵 속에 시작되었다.

**

또르르르.

투명한 글라스에 다시 한 번 붉은 빛이 차오르는 소리.

“와인은 맥주보다 더 취해.”

설이 두 번째 잔을 입가에 가져가자 민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맞아. 오빠, 나 취했나 봐. 어떡하지?”

서연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고, 민준이 그런 서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한 병 더 시켜줘?”

“…….”

하지만 민준은 서연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오빠였다.

“그렇지만 맛있어요.”

줄곧 팽팽하던 설의 얼굴 근육이 풀어져 있었다. 설이 손안의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빛깔도 예쁘고.”

설의 입술 안으로 붉은빛이 또다시 흘러들었지만, 민준은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가 반가워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당신도 줄까요?”

오랜만에 설이 민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웃었고,

“……아니. 괜찮아.”

민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설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았다.

**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취한 척 두 눈을 감고 뒷좌석에 숨죽이며 앉아 있던 서연을 집에 데려다주고 난 후, 민준은 설의 아파트를 향해 다시 자동차를 몰았다.

설은 아까부터 창문에 고개를 기댄 채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잠시 후 자동차가 설의 아파트 앞에 멈춰 섰고, 민준은 사이드브레이크를 잠근 후 고개를 돌려, 잠든 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어나야지.”

“…….”

민준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설은 깊이 잠들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민준이 오른손을 천천히 뻗어 설의 머리카락을 뒤로 가만히 쓸어 넘겼다.

그러자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창문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설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설을 바라보던 민준이 자동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설의 안전벨트를 딸깍 푼 후 어깨와 무릎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그녀를 두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으응.

설이 인상을 찡그리며 민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그는 설을 가슴 안쪽으로 좀 더 당겨 안고 아파트 출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설의 집 비밀번호를 누른 후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을 감지한 전등이 밝게 켜졌다가 곧 꺼졌다.

민준은 설의 구두를 벗기고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위에 그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설은 이불을 아이처럼 가슴 안으로 말아 쥐며 그 안에 고개를 파묻었고, 이내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민준은 설이 잠든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설의 침대 옆 탁자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어쩌면 버릴 수도, 혹은 민준에게 다시 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설의 눈에 먼저 담길 수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잘 자.”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뒤로 돌아 침실 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감겨 있던 설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파르르 떨리며 다시 감겼고, 눈물방울이 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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