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27화 (27/94)

27화. 자물쇠를 풀고2016.04.05.

안으로 들어간 설은 김 국장 옆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우리 요원입니다. 암호해독 전문이고 혹시 필요할지 몰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내보내겠습니다.”

“아니요, 국장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컴퓨터는 이 박사님께서 작고하시기 전 상태 그대로 복원시켜 놓았습니다. 다행히 본체를 구동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때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하드는 깨끗합니다.”

김 국장은 설에게 USB를 건네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컴퓨터는 텅 비어 있는데, 영애는 이 USB로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다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물리학자셨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도 뛰어나셨어요.”

설은 김 국장에게서 건네받은 USB를 단자에 꽂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항상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곤 하셨죠.”

위잉-

컴퓨터 본체에서 팬이 돌아가는 소음이 들렸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설을 지켜보던 김 국장과 암호해독 요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잠하던 모니터 화면이 갑자기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치 USB가 단잠을 깨운 것처럼 컴퓨터 화면에 숫자들이 가득 찼고, 숫자들은 화면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만 모니터 화면에 어지러운 알파벳과 숫자들이 가득 차올랐다 사방으로 흩어졌고, 빙글빙글 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설은 어지럽지도 않은지 눈을 한 번도 깜빡거리지 않은 채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알파벳과 숫자들은 화면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문자들이 흩어져 자리 잡는 찰나의 순간 하나의 문자만 미묘하게 자리를 어긋나게 잡았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마냥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문자들로만 보였을 테지만 설의 눈에는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아주 작은 퍼즐 조각이 하나씩 보였다.

모든 문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찰나의 순간 혼자만 미세하게 박자를 달리해 자리를 잡는 문자.

“S.”

“9.”

“B.”

“K.”

“4.”

“…….”

설이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일정한 간격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열다섯 개의 불규칙한 문자들을 끝으로 설은 입술을 다물었고, 그녀가 자판을 여러 번 빠르게 두드리자 조금 전과는 또 다른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하도 많이 들여다봐 이제 눈에 익숙해지다 못해 친근해지기까지 한 원자력연구원의 로고였다.

“찾았어요.”

설이 마우스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돌려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의연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입술이 파르르 떨려, 아랫입술을 안으로 꽉 깨물었다.

설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할아버지의 컴퓨터에서 본 적이 있는 그 문서였다. 아직도 손에 잡힐 듯 기억이 생생했다.

김 국장과 암호해독 요원은 멍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영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정보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아. 김 국장이 가느다란 탄식을 뱉어냈다.

“그런데…….”

설은 할 말이 남은 듯 다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정신을 차린 김 국장이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 휠을 아래로 천천히 굴려 화면에 나타난 자료를 읽어 내리던 설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배열이…… 제 기억과 조금 달라요, 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아마 할아버지께서 일부러 흩어 놓으신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손에 파일이 들어갈까 봐 이렇게 여러 겹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럼 원자력연구원(KAERI)에 협조를 요청하고 당시 연구원들을 전부 소집하겠습니다.”

“아니요, 이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파일을 원래 상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애께서 그걸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설은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신 김 국장의 얼굴을 보며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놀란 김 국장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누가 필요합니까? 대통령 각하께 보고 후 필요한 연구원들을 부르겠습니다.”

김 국장의 말에 설이 잠시 머뭇거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연구원분들 모두를 신뢰한 건 아니셨어요.”

연구원분들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뭐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세요.”

김 국장은 이인호 박사가 왜 이 USB를 설에게 남겼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영애인 강설만이 풀고, 다시 만들 수 있는 파일이었다.

아끼는 손녀에게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시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박사님의 심정을 이제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각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끄덕.

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강 주임, 지금 어디야? 외근 나갔다고 하던데, 거기서 바로 퇴근하는 거야?”

안 주임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설이 경호관의 차량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쓰러질 수 있을 만큼 피곤했기에, 일이 끝나면 바로 퇴근을 하라고 말해준 건우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김 대리님 회사 그만둔다고 오늘 사표 냈다던데, 알고 있었어?”

“……그래요?”

민준이 회사를 그만둔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물먹은 솜처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 주 안으로 인수인계 끝내고 다음 주부터는 안 나올 거래. 그래 봤자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서 사무실 직원들이 송별회 해준다고 다들 여기에 모여 있거든.”

“…….”

“둘이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송별회도 안 올 거야?”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요. 김 대리님께는 따로 인사드릴게요.”

가급적 안 주임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아침 건우가 설에게 당부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민준이 그곳에 있다고 하니 한편으론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민준은 곤혹스런 얼굴로 그곳에 앉아 있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찌푸리며,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설은 민준을 만난 이후로 이렇게 긴 시간을 그와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몸에 밴 습관처럼, 의식하지 않고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민준의 부재가 주는 허전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가슴에 생긴 커다란 구멍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숭숭 불어왔다.

터벅터벅.

차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민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송별회라 술을 많이 마시려나, 잘 안 취한다고 했으니 설마 취하진 않겠지.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 끝에 항상 민준이 있었다.

이렇게, 내 시선의 끝에도.

“오늘 송별회 한다면서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설 앞에 민준이 불쑥 나타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목표물이 움직였어. 거기로 올 줄 알았는데, 다른 데로 가더라고.”

송별회에 갈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다만 그곳에 마케팅팀 직원들도 온다고 했고, 혹시 강설이 그곳으로 올지 모르니 기다렸을 뿐이다.

민준이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얘긴 들었어요. 이번 주까지만 근무한다면서요.”

“응. 꽤 즐거운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설을 만나고, 함께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고개를 돌리면 설의 책상이 보였다.

언제든지 새로운 신분으로 위장할 수 있도록 임무가 끝나면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그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이번엔 사람이 남았다.

아니, 사랑이 남았다.

“백 팀장님이 오늘 나한테 안 주임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말했어요.”

“백건우가 그런 말을 했어?”

건우가 한 말이 의외였는지 민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나한테 해를 입히려는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에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내가 없어도 강설이 웃고 있어서 다행이고.

“들어가요. 나도 들어가서 쉴래요.”

“……그래, 들어가.”

민준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파트 입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는 짧은 대화가 많이 아쉬웠지만, 설이 많이 지쳐 보였기에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설이 아파트 입구 안쪽으로 사라진 후에도 민준은 그녀의 집 현관 센서등이 켜질 때까지 위를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는 아파트 현관의 불이 켜졌다가 꺼지는 걸 보고 난 후에야 뒤돌아섰다.

**

집 안으로 들어온 설은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 위에 올려놓으며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에겐 너무 많은 일이 남아 있었다.

설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다 샤워를 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장식장에 무심코 시선이 닿는 순간 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이 천천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예요.”

심장이 쿵쿵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송별회 선물을 주려고 했는데…… 깜빡 잊었어요. 멀리 가지 않았다면, 지금 주고 싶은데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떨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 말이 뚝뚝 끊어져 나왔다.

민준이 뭐라 말을 했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몸을 돌려 현관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얼어붙은 발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오늘 대리님한테.”

순식간에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거실 장식장 위에 놓아두었던 물건의 방향이 조금 달라져 있을 뿐인데, 어쩌면 설의 과민반응일 수도 있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띠띠띠띠-

도어록 버튼을 빠르게 누르는 소리에 급격히 팽창한 두려움은 공포심이 되어 힘겹게 호흡하고 있던 숨구멍을 더 강하게 짓눌렀다.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세게 닫혔고, 마술처럼 설의 눈앞에 민준이 서 있었다.

“선물, 받으러 왔어.”

설을 똑바로 바라보며 숨을 고르는 민준의 호흡이 거칠었다.

민준이 스위치에 손을 뻗어 거실 등을 끄자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의 형체만 보였다. 안도감에 그녀의 몸에서 한꺼번에 힘이 빠져나갔다.

민준이 한 손으로 설을 당겨 안으며 재킷 안에 숨겨놓은 감지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나는…….”

“쉬이…….”

민준의 입술이 설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민준의 재킷 안에서 빨간 동그라미가 깜빡거렸고 곧이어 삐이- 하는, 작은 경보음이 들렸다.

CCTV, 그리고 적외선 카메라.

누군가가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

“하!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하더니?”

책상 앞에 앉아 손톱을 깨물며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기영이 두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

설의 떨리던 몸이 잔잔하게 잦아들 무렵 민준이 입술을 떼어내고 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나 봐.”

민준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설의 뺨을 어루만졌다.

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민준은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매만졌다.

“우리 집 갈까?”

민준의 속삭임에 설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청와대로 데려다줄까?”

“…….”

청와대.

지금 청와대로 들어가면 설이 무언가 숨겨야 하는 게 있지 않나 하는, 괜한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빠한테 누가 될 수 있다.

설이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었다.

“이리 와봐.”

민준이 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침실을 향했다. 침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삐- 울리던 경보음 소리가 멈췄고, 빨갛게 반짝이던 작은 동그라미도 사라졌다.

“이제 괜찮아.”

민준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설이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비로소 무서운 현실이 실감이 난 설의 두 눈에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자.”

설은 고개를 들어 눈물로 흐릿해진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별일 아니야, 괜찮아.”

민준이 설을 안심시키려는 듯 두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다.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괜찮지가 않아요.”

갑자기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설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야! 이런 나도, 당신도, 난 너무 힘들다고요!”

마음속에 깊숙이 감춰두고 꺼내지 않았던 말들이 기어이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동안 의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겉으로 내색할 수 없었기에 누구한테도 말을 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요! 어엉엉.”

“…….”

설이 침대에 엎드려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원망하고 싶은데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도대체 왜.

두려움이 사라지자 서러움이 가득 밀려와 아픈 표정으로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설은 민준의 떨리던 눈빛을 보지 못했다.

“……걱정 마, 그렇게 살 수 있어, 강설.”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도, 그녀는 듣지 못했다.

**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울다 지쳐 깜빡 잠이 들었는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어느새 아침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일어났어?”

“…….”

깜빡깜빡.

설이 퉁퉁 부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서 들리는 게, 아직 꿈인 건가.

“눈 다 뜬 거야? 절반만 뜬 것 같은데?”

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민준이 팔짱을 끼고 화장대에 기대서서 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 여기서 뭐 해요?”

“7시 넘었어. 출근하려면 빠듯할 텐데.”

민준이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다시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설을 바라보았다.

“씻고 나와, 거울 보면 아마 잠이 확 깰걸?”

“……뭐, 뭐라고요?”

당황한 설이 말을 더듬으며 얼른 두 손으로 뺨을 가렸다. 민준이 웃으며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요!’

거실 커튼을 옆으로 활짝 열어젖히자 아침 햇살이 거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정말 가깝네.”

민준은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던 사람은 이제 민준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민준을 보았을 테니 공격을 하던 방어를 하던 좀 더 큰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을 테고, 뒤에 숨어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다.

딸깍-

등 뒤에서 침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의 공포가 떠올랐는지 발걸음을 내딛는 설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민준이 뒤를 돌아 엉거주춤 서 있는 설을 바라보았다.

방금 씻고 나와 그런지 머리카락의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았고, 설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마음 아프게.

“손들어!”

민준의 짓궂은 말투에 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른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또 진짜 멈춘다.

민준을 바라보며 동그랗게 뜬 눈이 꼭 잔뜩 겁을 집어먹은 토끼 같았다.

하얗고 보들보들하고, 작고 예쁜 토끼.

“말도 잘 듣네.”

내내 강하고 씩씩해 보이던 모습은 설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밝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라고 쓰여 있던 파일의 내용이 맞았다.

설은 애초에 두려움, 공포, 눈물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막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 분명히 거실에 카메라가 있다고 했는데, 민준이 활개 치고 다니는 모습이 이상했던 설은 용기 내어 눈을 굴렸다.

“벗고 다녀도 괜찮아, 커튼만 친다면.”

“뭐라고요?”

“그렇다고 진짜 그러진 말고.”

지난 몇 달 동안 과분한 꿈을 꾸었다.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슴속에 헛된 욕심이 자라났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긴장이 풀어지니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민준의 잘못이 아닌데, 한걸음에 달려와 준 그에게 그동안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설움을 다 토해냈다.

설은 내 곁에 있지 말라고 등을 떠밀어 놓고 그 순간 민준에게 전화를 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이렇게 나약해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스스로를 책망하고 또 채찍질했다.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민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설은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뭐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남들처럼 예쁜 사랑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설을 마음에 담았다.

평생 그녀 곁에 머물겠다는 약속도 쉽게 해줄 수가 없으면서.

이제야 비로소 친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어머니를 남기고 떠나야 했던 아버지는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대문 밖을 쳐다보며 오지 않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고, 어머니를 사랑한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을 것이다.

“밑에 차 와 있네, 1층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같이 갈게.”

민준이 고갯짓으로 베란다 쪽을 가리키며 웃었고 그 옅은 미소 사이로 시린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오고 있는데 민준은 지금 겨울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민준의 셔츠 자락을 붙들고 앞으로 가볍게 잡아당겼다.

“……우리 나중에.”

“응?”

민준이 잠깐 셔츠를 바라보았다가 눈을 들어 설을 바라보았다.

민준의 두 눈이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번 그 할머니네 집 짜장면 먹으러 가요.”

“그럴까?”

“응.”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웃으며 설을 가만히 품에 당겨 안았다.

“……한번 안아보자, 강설.”

“…….”

민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아, 설은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온기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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