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수면 위로2016.04.07.
“여어, 좋은 아침이야!”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기영은 벽에 기대 서 있는 민준을 발견하고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민준이 태연하게 오른손을 들어 기영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기영은 순간 몸을 움찔거렸지만,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하며 침착하게 민준을 바라보았다.
또각또각, 기영이 민준 앞에 다가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섰다.
“아침 일찍부터 여긴 무슨 일이세요, 대리님?”
영애에게 경호관이 붙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NIS 요원이 붙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내 직원으로 위장해서 들어와 있을 줄이야.
기영이 이른 새벽에 CCTV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던 민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민준이 조만간 기영을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내가 화면발을 잘 받았나 모르겠네? 얼굴이 워낙 작아서 여백이 많이 남았을 텐데 말이야.”
민준이 벽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기영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대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요원을 그만두고 감이 떨어지셨나? 좀 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야지.”
민준의 나직한 목소리에 기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민준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하.
기영이 기가 찬 듯 입가에 조소를 띄었다
“당신이 옆에서 얼쩡거린다고 해서 강설이 당신 게 될 것 같아? 당신 지금, 강설의 연애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거야, 알아?”
기영이 표독스런 표정을 지으며 감춰뒀던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된 이상 뭘 더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아, 그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백건우가 네 것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영애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전직 요원께선 카메라까지 설치해가며 영애 옆을 얼쩡거리는 걸까? 안기영이, 영애한테,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NIS 현직 요원께서 고작 영애의 경호라니, 정말 이상하지 않아? 도대체 강설한테 뭐가 있길래, 도대체 그 계집애한테 뭐가 있길래 말이야.”
한껏 치켜뜬 기영의 두 눈에 시퍼런 독기가 가득 퍼졌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3년 전 강설이 건우 선배와 헤어졌을 때 말이야,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내가 그날 선배를 몰래 뒤따라갔었거든. 그날 강설이 아파트로 다시 돌아오는 걸 보고도 난 선배한테 알려주지 않았어. 들키라고, 버림받고 헤어지라고! 선배의 임무고 뭐고 그런 건 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지. 안 그랬으면 그날 밤 백건우는 강설하고 호텔에서 뒹굴고 있었을 테니까. 선배는 그날이 디데이라고 말했는데, 선배가 말한 디데이가 진짜 무슨 의미인지 난 알고 있었거든. 결국, 선배가 비워놓았던 호텔 스위트룸에는 강설이 아닌 내가 들어갔지만 말이야.”
기영은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강설은 다 가지고 태어났잖아. 지가 버려서 내가 갖겠다는데, 이제 와서 또 남 주기는 싫어?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백건우가 Pakin 아들이라서? 혼자 그렇게 고상한 척, 깨끗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놈 저놈 붙어 다니는, 윽!!”
갑자기 민준이 기영을 벽에 밀어붙이며 목을 짓눌렀고, 기영의 얼굴이 금세 파랗게 질렸다.
기영은 두 손으로 민준의 팔을 붙들고 발버둥 쳤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민준은 그 모습을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 동요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말조심해야지, 안기영. 네가 백건우랑 뭘 하고 싶어도 그건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잖아. 대통령께서 얼마나 딸이 소중하셨으면 요원인 나를 영애 옆에 붙여놓았겠어, 안 그래?”
민준이 오른손을 떼어 내자 기영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컥컥 뱉어냈다.
파랗게 질린 얼굴빛은 쉽사리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민준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가쁜 숨을 들이켜는 기영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뭘 믿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라서.”
“…….”
“또 한번 거슬리면, 죽인다.”
민준이 기영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카메라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던 민준의 싸늘한 눈빛이 생각난 기영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
“그러니까 여기 안기영하고 백인회 회장이 있어. 안기영이 백 회장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해도 백 회장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겠지. 당연히 수요자가 있으니까 공급자가 있는 거고.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걸 사들일 수 있는 곳은 사실 전 세계에 몇 군데 안 되잖아. 그중에 Pakin의 방위산업체 DX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군수업체가 하나 있어. 백 회장이 파일을 판다면 아마 이곳이겠지.”
투명 보드에 마커로 표시까지 해가며 열정적인 브리핑을 끝낸 박 팀장은, 뿌듯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런 브리핑, 얼마 만인지.
짝짝짝.
박수 소리가 세 번 들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NIS로 기어들어 와 본부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 마침내 박 팀장의 사무실에 정착한 민준이 그의 열렬한 브리핑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너 지금 나 잘했다고 칭찬하냐?”
박 팀장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손에 들고 있던 보드마커를 민준에게 있는 힘껏 던졌다.
민준이 픽 웃으며 한 손으로 그것을 가볍게 잡아채 뱅그르르 돌렸다.
“돈, 권력, 로비에 치정극까지, 없는 게 없는데 사랑이 빠졌네.”
민준은 보드마커를 공중으로 던졌다 잡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서 사랑 얘기가 왜 나와? 집착과 환멸이면 몰라도.”
“한쪽은 사랑인데 반대쪽은 집착이라…….”
어느 한 사람이 내 모든 시간을 지배한다면 그건 사랑일까, 집착일까.
안기영은 백건우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래된 습관처럼 집착하고 있는 걸까.
“건우 말이야?”
“글쎄요.”
“근데 민준이 너, 다시 밖으로 나간다며?”
내내 툴툴거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무게를 실어 진중해졌다.
박 팀장이 진지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에게 해외 파견 근무 일정이 잡혔다.
기간은 2년. 외국 주재 대사관에서 외교관 신분으로 혹시 있을지 모를 테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 발생 시 우방국과의 협조 아래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근래에 일어나는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의 연쇄 테러 때문에 어느 나라나 긴장감이 팽배했다.
테러 집단이 전 세계적으로 세를 확장시켜 나가, 이제 어느 나라도 안전하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민준이 대기 상태가 되자마자 곧바로 민준의 출국 일정이 잡혔다는 게 자연스럽지 못했다.
김 국장님의 굳은 얼굴로 봐서는 김 국장님의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일인데요, 뭘.”
민준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가을의 강설은 못 보려나, 잠깐만 봐도 되는데.
몇 달 전 같았으면 좋아했을 것이다. 지루하고 따분한 NIS 사무실보다, 해외로 도는 편이 민준에겐 훨씬 더 나았으니까.
하지만 몇 달 사이 많은 게 바뀌었다.
사랑 하나가 가슴에 들어왔을 뿐인데,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민준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과연 안기영과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가야 하고, 설은 남아야 하는데.
으쌰!
민준이 구령과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듯 팔을 위로 쭉쭉 뻗고, 옆으로도 길게 뻗어 굳어 있던 근육을 풀어주었다.
요새 쓰지 않은 근육들이 아우성인 게, 무박 7일 지리산 종주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너 그렇게 밖으로만 돌면 언제 연애하고 언제 결혼하냐? 네가 아직 젊기는 하다만 그래도 시간 금방 간다. 내일모레 서른 되고, 마흔 되고 그러는 거야.”
“저 연애도 했고, 결혼도 했는데요?”
민준이 슬쩍 박 팀장을 쳐다보며 웃었다.
“뭐, 뭐라고?”
“저 갑니다.”
“야야,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렇지?”
저 새끼 지금, 나 몰래 비밀 결혼한 거야?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진담을 농담처럼,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방금 전 민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박 팀장은 도저히 농담 같지가 않았다.
민준이 피식 웃으며 박 팀장의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결혼이란 게 꼭 둘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모를 수도 있다.
좋은 점은 강설은 내가 없어도 매일 내가 돌아오길 바라며 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설은 따듯한 세상에서, 그녀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도청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는 전화기입니다. 필요할 때 전화하세요.’
회사로 출근하는 차 안, 뒷좌석에 앉은 설은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국장님은 설에게 이 전화기를 건네주셨고, 앞으로는 이 전화기를 이용해 연락을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도청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설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자신의 아파트가 상대방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영도 모르고 백 회장도 모르는, 의심받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설 뒤에 사람을 붙였을지도 몰라 그마저 만만치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영애 님, 회사 근처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설의 귀에 여자 경호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이 곁에서 멀어진 후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설에게 여자 경호관이 붙었다는 사실이다.
설은 감사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다.
일부러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렸기 때문에, 앞으로 몇십 미터 정도는 걸어가야 했다.
빠앙-
“강설!”
백건우였다. 건우는 설의 이름을 부르며 자동차 뒷좌석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타.”
백건우, 백 회장이 절대 의심하지 않을 사람.
“고마워요.”
설은 순순히 건우의 자동차 뒷좌석에 올랐고, 자동차는 회사를 향해 달렸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건우가 걱정하는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눈에 창백한 얼굴까지, 분명 어제 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설은 운전석에 앉은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건우를 바라보았다.
아.
건우가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누르자,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로 견고한 방음창이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며 위로 올라갔다.
“이제 얘기해봐, 무슨 일이야.”
“어제 누군가가 우리 집을 다녀갔어요.”
설은 건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고, 건우는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건우의 표정을 살피려는 것이었는데,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건우를 의심했던 게 조금 미안해졌다.
“……다친 데는 없어?”
그는 한참 후에야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괜찮아요.”
“그러게 왜 밖에 나와 혼자 살고 있는 거야, 이번 기회에 청와대로 들어가.”
“그건 싫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버지 신경 쓰이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어요.”
설이 한숨을 내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로 말했다.
설사 건우가 설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건우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다.
건우에겐 백인회 회장이 아버지이고, 어찌 됐든 설을 위협하는 안기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빈말이 아니라 아버지는 이제 정말 이 일과 무관해야 한다.
아버지와 대립하는 정치인들이 아버지를 더욱 힘들게 압박할 구실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일이 잘되더라도 본전이고,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그 책임을 아버지께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싫은 게 아니라,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그래서는 안 된다.
설은 정치라는 건 잘 모르지만, 자신이 아버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아버지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셨던 것도, 아마 이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집에서 혼자 지낼 수 있겠어?”
건우의 근심 섞인 목소리에 설이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었다.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고 싶은데 사람들 눈에 띌까 봐 걱정이에요. 호텔을 들락거린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아버지가 곤란해지실 수도 있고요.”
설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쉰 후 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다.
그래서 설은 건우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이렇게, 설이 원하는 대답을 선뜻 내놓으리라는 것을.
“우리 계열사 호텔이니 보안은 안심해도 될 거야. 내가 당분간 사용할 거라고 말하면 아무도 그 층엔 얼씬거리지 않을 거고. 호텔에 네 흔적이 남지 않도록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팀장님이 사용한다고 했는데 팀장님이 호텔에 없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요.”
“층을 다 비우고 그중 하나를 내가 사용하지 뭐. 전망이 좋아 내가 가끔 사용하는 곳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당신한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건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나한테 고마워할 것 없어.”
건우의 두 눈이 차분하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겨우 이런 걸로 마음의 짐이 덜어질 수만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런데 김 대리는 왜 그만두는 거야?”
“그건, 나도 잘 몰라요.”
“내가 알면 안 되는 건가 보네?”
“…….”
설의 침묵이 건우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요 근래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설과 건우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이제, 더 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
저녁에 집에 돌아온 건우는 며칠간 밖에서 지낼 수 있도록 간단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오기 전 호텔에 연락을 해 로열 스위트룸이 있는 16층 예약을 당분간 받지 말라는 말을 전했고, CCTV도 전부 꺼놓으라는 당부도 해두었다.
아마도 호텔 총지배인은 건우가 밖에 얼굴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연예인을 데리고 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A1 16층을 비워달라고 했다면서.”
“……네, 아버지.”
방문이 열려 있었는지 어느새 백 회장이 건우의 방 안으로 들어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짐을 챙기는 건우를 쳐다보며 백 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건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거기서 지내려고? 근데 굳이 층을 다 비울 필요까지 있었어?”
백 회장이 슬쩍 건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기분 좋은 나무람이었다. 여자 문제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아마 영애인 강설일 터였다.
“사람들 들락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그랬어요.”
“그래, 아무래도 조심스럽기야 하겠지.”
이해한다는 듯 백 회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필요한 거 있으면 네가 알아서 하고. 내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을 테니까.”
캐리어에 옷가지를 챙겨 넣던 건우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래, 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건우가 다시 굳은 얼굴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무관함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끔찍한 모습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건우는 설을 원하면서도 의심스러운 행태를 보이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싱겁기는, 녀석. 며칠 뒤에 청와대에서 경제인 오찬이 있다. 내 거기서 대통령께 슬쩍 두 사람 얘기를 꺼내 보마. 두 사람이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다는데 아비로서 도와줄 게 그런 것밖에 더 있겠느냐, 껄껄껄.”
“……어떻게 아셨어요?”
“영애 말이냐?”
백 회장이 두 눈을 반짝이며 반색을 했다.
“관심 두지 마세요, 아버지.”
아니면 내가 아버지를 의심하고, 아버지를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니.
건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냥 네가 관심이 있다는 아가씨가 있다길래 살짝 알아봤을 뿐이야. 녀석, 며느리가 될 사람인데 아비로서 궁금해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정색을 해?”
파일도 넘기고 대통령과 사돈도 되고,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할 것이다.
파일은 안기영과 서 박사가 알아서 찾아올 것이고, 만약에 일이 틀어진다고 해도 대통령과 사돈이 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설마 사돈이 될 사람을 어찌하진 못하겠지.
띠리리리-
백 회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백 회장이 핸드폰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웃는 얼굴로 건우의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럼, 준비 잘하고.”
“…….”
건우가 품 안에서 무음으로 반짝이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귓가에 가져갔다.
그것은 며칠 전 건우가 백 회장의 핸드폰을 몰래 복제해 만들어 놓은 전화기였다.
-……국정원에서 3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록을 샅샅이 뒤지고 있단 말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잔뜩 흥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어때서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잡히면 회장님이라고 무사할 듯싶으십니까?
-난 서 박사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사실, 이인호 박사를 죽인 건 서 박사였지 않습니까. 그 뒤처리를 해준 사람한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러시면 안 되지요. 지금 누구 덕에 연구원장을 하고 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툭.
눈물 한 방울이 건우의 뺨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난 장사꾼입니다, 서 박사. 필요한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장사꾼이요. 난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했지 사람을 죽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지금 당장 물건을 가지고 오세요. 그게 아니라면 나도 더 이상 서 박사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통화 시작과 동시에 녹음 버튼을 누른 건, 오랜 습관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건우가 초점 없는 눈으로 음성 파일 삭제 버튼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으아아아아!
건우가 핸드폰을 집어 던지며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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