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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35화 (35/94)

35화. 악몽2016.05.03.

설이 숨이 막혀 쌕쌕 가쁜 숨을 뱉을 무렵에야 민준이 입술을 떼어 냈다.

호흡이 거칠어져 숨이 가쁜 건 민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어디까지 알았어?”

민준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설을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깊게 안고 싶었다. 작게 바스러질 것 같은 설을 품에 안고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이렇게 원하는데 그가 그동안 이 여자를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말 안 할래요.”

그녀를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에 열기가 가득했다.

설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되었지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열기 가득한 민준의 눈과 낮은 목소리만으로 설의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왜, 내가 별로였어?”

나 정도 되는 체력과 지구력을 갖춘 남자는 흔치 않을 텐데. 혹시, 실망스러웠나? 이 망할 기억력.

“그것도 말 안 할래요.”

설이 붉어진 얼굴로 민준의 품 안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가 기억을 못 하니 좋은 점도 있었다. 설은 이렇게 감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한 민준이 좋았다.

“다음 주에는 퇴원할 수 있을 거야.”

민준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두 눈이 생기 있게 반짝 빛났다.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내 두근거리던 설의 심장이 마침내 펑하고 터져버렸다.

**

휘이익-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민준은 오늘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재활 치료실에서 보냈다.

“내가 진짜 별로였나?”

솔직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워낙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엔 절대 강설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강설이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는 강설을 붙잡아 눈을 들여다보고 입을 맞추고 사랑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삐오삐오, 제어장치 에러.

“넌 죽었어, 강설.”

환자복 상의를 탈의한 민준이 침대에 발을 걸치며 병실 바닥에 두 팔을 짚고 엎드렸다.

“하나, 둘, 셋…….”

울퉁불퉁한 복근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에 똑똑 떨어졌지만, 몸은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땀에 젖은 민준의 얼굴엔 기분 좋은 설렘이 가득했다.

“뭔 운동을 그렇게 하냐?”

“다음 주엔 퇴원할 겁니다.”

병실 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박 팀장님은 오늘도 민준의 병실로 퇴근했다.

늦게 결혼을 해 이제 겨우 두 돌이 넘은 아기 재롱도 보고 싶을 텐데 말이었다.

“아우, 짐승 같은 놈!”

박 팀장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총알을 두 발이나 맞고도 살아나, 짐승 같은 체력으로 빠르게 회복하는 무서운 놈이었다.

“하긴, 금발 아가씨들을 만나려면 아무래도 하드웨어가 좀 중요하겠지?”

박 팀장이 보기 좋게 갈라진 민준의 등 근육을 내려다보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박 팀장의 말에 민준이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신이 한 달 뒤에 파견근무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민준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난간 위에 걸쳐 놓은 수건을 집어 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설에게, 혹시 나를 기다려 줄 수 있겠냐고 말을 꺼내야 한다.

위험한 일도 아니고 비교적 안전한 해외 대사관 파견 근무일 뿐이다.

이번엔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괜찮지가 않아요!’

“…….”

땀방울을 닦아내던 민준의 손길이 천천히 멈추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야. 이런 나도, 당신도, 난 너무 힘들어요!’

“민준아!”

“…….”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요!’

“김민준? 야!”

“…….”

쓸모없는 기억 같은 건 돌아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

“너무 말랐나?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설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았다.

하얀 원피스 아래로 길게 뻗어 있는 팔과 다리가 너무 가늘어 보이는 것 같아, 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주에는 퇴원할 수 있을 거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민준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설은 조금 이따 백화점 속옷 판매장으로 쇼핑도 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후끈후끈한 뺨에 두 손을 가져다 대며 달아오른 뺨의 열기를 식혔다.

똑똑.

“영애 님?”

누군가가 설의 방문을 노크한 후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설의 이름을 불렀다. 청와대 사택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이셨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설을 좀 보자고 했는데 깜박 잊고 있었다. 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설이 응접실로 나가보니 아버지께선 차를 마시고 계셨다.

대통령은 이른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하는 설을 쳐다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외출이 너무 잦구나. 그 친구도 정신이 들었다고 하니, 내가 보기엔 이제 그만 죄책감을 덜어도 될 것 같은데.”

그는 은은한 향이 도는 차를 입에 한 모금 머금은 후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던 딸을 생각해서 그동안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있었지만, 대통령은 설이 그 요원을 자주 만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연민이든 동지애든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설을 똑바로 응시하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감정 중에 설이 느끼고 있는, 민준에 대한 사랑은 없었다.

“연민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제가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을 봐야 제가 살 것 같아서요.”

“강조국.”

“아직도 꿈속에서 그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요.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

“난 살고 싶어요, 아빠.”

설은 민준의 기억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처음처럼 다시 시작해 서로의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괴로움도 민준이 곁에 없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통령의 이런 불편한 기색을 계속 모른 척할 것이었다.

대통령은 말없이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애 님의 경우 분리 불안 장애 초기 증상의 소견이 보입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빠른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조국의 주치의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 괜찮은 줄 알았더니, 실상은 조국이 괜찮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통령은 며칠 전 비서실장을 통해 김민준 요원이 조만간 해외 파견 근무를 나가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시름 놓았는데, 지금은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딸아이는 남보다 많이 총명하다는 이유로 외롭게 자라야 했고, 정치가인 자신과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외할아버지 때문에 늘 긴장의 연속인 삶을 살아야 했다.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길 바랄 뿐인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요원이었다.

대통령이기 전에 부모로서, 그는 딸이 더 이상 불안한 삶을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절대적인 사람도 없지. 네가 그걸 깨닫게 된다면 그땐 이 아빠 말도 좀 들어주면 좋겠구나.”

대통령이 체념하는 얼굴로 설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설은 아빠의 말씀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설이 민준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민준도 그러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민준이 묵고 있는 VIP 병실은 병실이 아니라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편안한 분위기의 별장 같았다.

병실 앞에는 작고 아담한 옥상 정원도 있었고, 민준은 종종 이곳에 나와 바람을 쐬곤 했다.

그는 아까부터 옥상 정원 잔디 위에 서 있었다.

민준은 오늘 눈을 뜬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지 않았다.

빠른 회복력 덕분에 신체는 90% 이상 제 기능을 되찾았지만, 정신력이 많이 흐트러졌다.

“여기서 뭐 해요?”

설이 등 뒤에서 민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의 등에 고개를 묻었다.

민준이 입고 있는 환자복에서는 희미한 약품 냄새가 났다.

설은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섭거나 슬프지 않고 만날 수 있는 두 사람이, 이 현실이 그녀는 꿈만 같았다.

“광합성 하고 있는 중이야.”

설은 민준의 등에 기대 눈을 감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민준의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말투가 예전과 똑같았다.

민준이 허리에서 설의 손을 떼어내고 뒤돌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은 하늘거리는 연한 물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여름 햇살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강설은 참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영애 역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당신은 왜 일은 안 하고 매일 내 병원만 쫓아다니는 거야?”

민준의 질책하는 말투에 설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그녀는 늘 민준 생각뿐이었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어도 민준이 보고 싶어, 날이 밝으면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올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민준이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해 자신에 대한 마음이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거였다.

“왜요, 이곳으로 출근도 하고 퇴근도 하는데요? 지금은 이게 내 일이라고요.”

설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예전의 민준이라면 분명 좋아했을 거였다. 민준의 시선은 항상 설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설 앞에 있는 민준은 냉랭했다.

“영애가 직업은 아니잖아.”

‘아무래도 젊은 아가씨가 감당하기에는 정신적인 충격이 컸겠지.’

“앞으로 뭘 할지 고민해 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요. 아직 당신 퇴원도 안 했잖아요.”

“내가 퇴원을 하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할 건데?”

“…….”

민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혹시 해외 파견 근무를 국내 복무로 대체할 수 있는지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다.

유럽이라 근무 환경도 좋을 것이고, 안정적인 나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요원들은 주위에 여럿 있었다.

꼭 민준이 아니더라도 되는 일이기에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왜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민준은 오히려 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영애한테 분리 불안 장애 증세가 보여 빨리 격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민준이 이곳에 남으려는 이유를 이미 알고 계셨다.

‘네가 지금 영애 옆에 있는 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왜 대답을 안 해?”

“…….”

민준이 재차 물었지만, 설은 아직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설은 민준 옆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은 지금 꼭 대답을 들어야 하는 사람처럼 설을 무섭게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주체성 없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지만 주치의 말로는 영애보다 네 케이스가 더 좋지 않아.’

민준이 서늘한 얼굴로 설을 쳐다보았고, 그 낯선 눈빛에 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예전의 민준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 옆에 있으려고 했을 것이다.

설은 눈앞의 민준이 낯설어, 새삼 민준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내가…… 너무 자주 와서 불편해요?”

“편하진 않아.”

요 몇 주 사이에 마음이 많이 약해졌나 보다.

금세 두 눈에 눈물이 차올라 설은 고개를 얼른 아래로 숙였다.

“……내가, 샌드위치 싸 왔어요.”

설이 말을 돌리며 뒤돌아섰다.

그녀는 넓적한 유리창을 옆으로 밀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고, 민준은 힘들게 참고 있던 숨을 그제야 밖으로 뱉어냈다.

“샌드위치는 왜 싸 온 거야.”

탁.

민준이 유리창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피크닉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설은 바구니 안에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꺼냈다. 샌드위치를 좋아하지 않아 이번에 처음 만들어 보긴 했지만 만드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같이 먹으려고, 내가 만들어 왔어요.”

설이 하얀 유산지에 싸인 샌드위치를 민준에게 내밀었다.

민준이 샌드위치를 받아들며 설에게 물었다.

“샌드위치를 좋아해?”

“응, 좋아해요.”

“…….”

민준이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곁눈질로 바구니 안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아도 비슷한 재료로 만든 게 하나도 없어 보일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샌드위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이걸 만드는 데 시간이 꽤 걸렸을 것으로 보였다.

“맛있어요?”

“…….”

민준은 목이 메어 억지로 꾸역꾸역 목구멍 뒤로 음식물을 밀어 넘기느라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퇴원하면 내가 집에서 음식 해줄게요. 의사 선생님께서 당신 몸 회복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당신이랑 예전에 우리 집에서 소고기 샤부샤부를 해먹은 적이 있는데 말이에요…….”

“강설.”

민준이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말해요.”

설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바구니 안에서 다른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

“나는 이제 괜찮고 며칠 뒤엔 퇴원도 할 거야. 기억이야 돌아오면 좋겠지만 사는 데 지장 없으니 돌아오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고.”

민준의 담담한 목소리에, 바구니 손잡이를 붙든 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설이 고개를 돌려 원망스런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당신 인생을 살라는 말이야.”

“……뭐라고요?”

“내 임무는 이제 끝났고, 나한테도 내 인생이란 게 있어.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거 아주 별로야.”

“싫어요! 당신 기억이 돌아오면 분명 후회할 거야. 난 알아요, 당신 나한테 이렇게 말한 거 분명히 후회하고 또 후회할 거예요!”

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가엔 눈물이 맺혔지만 민준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나 3주 후에 출국해. 당신한테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건지 몰랐는데, 지금 하는 걸 보니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네.”

“……거짓말.”

“사실이야. 2년 혹은 그 이상,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어.”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

설이 애원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이제 겨우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녀한테 이런 잔인한 말을 하는 민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 얼마나 기다리면…….”

“기다릴 수 있겠어?”

“2년이라면 시간이 금방 갈 수도 있…….”

“1년, 2년, 혹은 앞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괜찮냐, 아프냐 이런 거 안 물어봐. 죽었냐, 살았냐 두 개만 묻지. 그렇게 가는 시간이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아?”

“…….”

“언제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당신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냐고.”

설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숨이 턱턱 막혀 와 뭐라 대꾸를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민준의 눈빛이 너무 차가워 그 한기에 입술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제 나한테 오지 마. 부탁이야.”

민준이 말을 내뱉듯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의 뺨을 타고 눈물이 아래로 툭툭 떨어졌지만, 민준은 그녀를 예전처럼 안아주지 않았다.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아침 해가 뜨고 하루를 멍하게 보내다 보면 다시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병원 치료 외에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설의 얼굴은 한여름인데도 핏기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부모님은 설을 걱정하면서도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혹시 설이 외출하고 싶다고 말할 경우를 대비해 여자 경호관을 대기시켜 두셨다.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민준을 다신 볼 수 없는 걸까.

설은 눈을 뜨면 언제나 이 생각뿐이었다.

민준이 낯선 얼굴로 기다려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이대로 그녀를 사랑하던 민준을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민준의 말대로, 그를 보지 않는 시간은 하루하루가 더디게만 흘러갔다.

머릿속을 비워내려 해도 설을 바라보던 민준의 애틋한 눈빛과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지금이라도 설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보슬비처럼 내리던 빗줄기가 이제 제법 굵어져 창문을 사납게 때렸다.

우르르 쾅쾅-

요란한 천둥소리에 설이 침대에서 일어나 굵은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비는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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