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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36화 (36/94)

36화. 당신이 없는 동안 (1)2016.05.05.

민준은 차곡차곡 짐을 챙겨 담은 캐리어를 세워 놓고 거실을 빙 둘러보았다.

이것으로 출국하기 전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면 당분간 이 아파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민준은 며칠 전 가족에게 인사를 하러 본가에 들렀을 때 어머니께 해외 지사로 갑자기 근무를 나가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꽉 붙든 채 민준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건강하게 다녀오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그 역시 어머니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 외에 다른 말은 건네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민준은 당연히 자신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가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어졌다고 해도, 만약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민준은 여기로 오고 싶었다.

그는 뒤 베란다로 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거센 비바람이 들이쳤다. 민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하루 종일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퍼부어대는 굵은 빗줄기를 바라보던 그는 온몸에 한기를 느꼈다.

“……춥네.”

탁탁-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민준의 시선이 왼손 손목시계에 멈추었다.

그날 이후 설의 위치는 언제나 청와대에서 변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병원에 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항상 같은 자리였다.

설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민준의 일상과 수면을 방해했고 되돌아온 기억은 그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는 밤이면 어김없이 고통스러운 악몽을 꿨고,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마다 설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는 설이 그와 다르게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잠재울 수 있었다.

딩동딩동-

민준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누군가가 아파트 초인종을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누구세요!”

짜증이 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현관문을 벌컥 연 민준은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졌다.

“…….”

그건 꿈일 것이다.

“…….”

그의 간절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일 터였다.

“내 곰인형 내놔요!”

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민준 앞에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로 젖어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준 거니까 얼른 내놔요.”

민준은 표정 없는 얼굴로 설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설의 얼굴빛은 창백했지만, 다행히 아픈 것 같진 않았다. 그녀의 영롱한 눈빛도, 단단히 다문 입매도 처음 설을 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혹시 꿈이 아니라 진짜 현실인 걸까?

민준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자, 설의 눈동자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게 흔들렸다.

그러나 설은 곧 마음을 굳게 다잡고 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던 말을 마음속에 다시 되새겼다.

자신은 민준이 그녀에게 준 선물을 찾으러 왔을 뿐이고, 눈앞의 남자는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민준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수없이 그렇게 다짐을 했어도 막상 민준을 대면하자 어렵게 다잡은 마음은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예전처럼 아득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려.”

민준은 한참 동안 설을 뚫어지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뒤돌아선 그의 등을 바라보는 설의 두 눈에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그녀가 못 본 사이에 민준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차라리 더 건강해 보일 정도로 민준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민준의 왼손 손목에 가 닿았다.

설은 그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시계는 왜 아직도 차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준이 그녀에게 저번보다 더 심한 말을 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

민준은 방 안에서 하얀 곰인형을 들고 나와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설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곰인형을 빼앗듯 홱 낚아채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설은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으며 민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 ……정말 떠나요?”

“응.”

“…….”

민준이 아직도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고 잠시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품었던 희망만큼 더 비참해졌다.

그는 내일이면 예정대로 한국을 떠날 거였으면서도 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준은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생각조차 없었던 거였다.

설은 곰인형을 품에 안고 힘없이 뒤돌아섰다. 그녀는 울컥하는 마음에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혹시 기억이 조금이라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준이 기억해 냈다면 당장 설을 찾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설은 흐느껴 울며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1층으로 내려와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물이 그녀의 마음속까지 차갑게 스며들었다.

설은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추웠지만,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그녀의 눈물을 감춰 주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죄 없는 곰돌이가 그녀와 함께 비를 맞고 있는 게 슬플 뿐이었다.

설은 차를 마시러 나간다는 핑계로 경호관과 함께 외출했다가 그 사람 모르게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이곳으로 왔다.

정신없이 내리느라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린 줄도 몰랐다.

“……미안해, 내가 지금 우산이 없어. 흐흐흑.”

설은 곰인형을 더 꽉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우산이 없었다.

설이 이렇게 울고 있어도, 비를 맞고 있어도 비바람을 막아줄 우산이 없었다.

그녀에게 나무가 되어주겠다고 했던 사람도 곁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설의 몸이 뒤로 빙그르르 돌아갔다.

잔뜩 물을 먹어 무거워진 곰인형이 툭 떨어져 바닥에 엉망으로 나뒹굴었다.

놀란 설은 눈을 크게 뜨고 팔을 붙든 남자를 쳐다보았다.

“경호관 어디 있어!”

빗속에서 민준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경호관은 어디다 두고 혼자 다니는 거냐고!”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누구랑 어딜 다니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몰라서 물어?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문책당하는 사람들이 한둘인 줄 알아?”

“지금 그게 중요해요? 우리 아버지한테 문책당할까 봐, 그게 무서워요? 내가 어떻게 되든 당신은 책임만 면하게 되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강설!”

쏴아-

마주 선 두 사람 사이로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졌다.

민준과 설은 흠뻑 젖은 채로 거칠게 숨을 내쉬며 서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 그건 다 거짓말이야!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 있어요, 당신이 나를 진짜 사랑했다면 나를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엉엉.”

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민준이 많이 안고 있었는지 인형에서 그의 향기가 났다.

대체 왜 그녀의 눈에 민준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흐흐흑. 제발 그 사람 도로 데려와요, 흐흐흑.”

설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민준이 너무 보고 싶었다.

“당신은 나 잊어버리면 정말 안 된단 말이에요, 흐흐흑.”

“…….”

민준은 눈을 감으며 설을 품에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손과 발이 그녀를 그대로 보내야 한다는 민준의 생각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울지 마.”

“나 잊어버리지 마요, 흐흐흑.”

설은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아이처럼, 자꾸만 민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흐느꼈다.

그녀의 등을 감싼 민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물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서 정말 다행이었다.

**

흑, 흑, 흑. 하아-

아직도 설의 잔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설이 딸꾹질처럼 울음을 뱉어낼 때마다 한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민준의 아파트로 돌아온 설은 욕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그의 스웨터와 바지를 빌려 입었다.

소매와 바지의 기장이 길어 옷매가 우스꽝스러웠지만, 설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설은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윙윙-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를 맞고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된 곰인형은 세탁기 안에서 거품 목욕 중이었다.

“마셔.”

민준이 다가와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설에게 내밀었다. 따듯하게 데운 우유였다.

설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순순히 머그잔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따듯한 온기가 설의 몸 안으로 사르르 퍼져 나갔다.

설은 조금 전 경호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호관은 곧 이곳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난 뒤 소파에 앉아 민준을 기다리며 침착하게 생각했다.

설의 마음과 상관없이 민준은 내일 떠나야 했고 어쩌면 오늘이 그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설은 이렇게 눈물만 보이다가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민준이 나중에라도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녀가 울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설은 기억이 돌아온 그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떠날 준비는 잘했어요?”

민준은 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당신 얼굴을 이렇게 보고 보내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만약 내가 당신을 그냥 보냈다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했을 거예요.”

설은 민준과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준은 설을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 그 어디쯤에 무심하게 머물러 있었다.

“……날 좀 봐요.”

설이 조용한 어조로 민준을 부르자 그제야 민준이 시선을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당신한테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요. 정말 고마웠고 또…….”

그와 보냈던 시간이 행복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사랑했고, 또 사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정말 지금 이 순간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설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잘 지낼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거기에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기억나더라도 너무 마음 쓰진 말아요, 난 정말 괜찮을 거니까요.”

혹시 나중에라도 그녀를 기억하고, 이 순간을 기억한다면 민준은 무척 괴로울 것이었다.

그녀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설보다 더 많이 아프고 힘들어 할 것이다.

그녀가 아는 민준이라면 분명 그러할 터였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해요.”

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혹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민준은 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경호관이 민준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고 설은 곰인형을 들고 그의 집을 나섰다.

그녀는 우는 얼굴을 민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대신 안고 있던 곰인형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민준은 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를 눈에 담았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그녀의 뒷모습이 민준이 기억하는 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정신없이 쏟아지던 장맛비가 그치고 가을이 왔다.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반짝이던 잎들이 빛을 잃고 생기를 잃어, 아주 작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맥없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위로 눈이 내렸고, 또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사랑은 멈추었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설은 다시 한 번 시린 계절을 맞이했다.

**

2년 뒤,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걔 연구 논문도 누가 대신 써준다는 소문도 있어.”

“꼴랑 학부 졸업장 하나 가지고 여길 들어와 있는 걸 보면 진짜 빽이 좋긴 좋아. 원장님이 걔한테 단독 연구실까지 내주셨다는데,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니야?”

“학부 때도 전혀 눈에 안 띄고 되게 평범했다던데, 역시 줄 중에 최고의 줄은 탯줄이야.”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설은 얼굴에 책을 덮고 벤치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녀의 가운 왼쪽 가슴 위에는 강조국이라는 이름이 파란 실로 새겨져 있었다.

설과 같은 가운을 입은 여자 두 명이 수다를 떨며 지나간 자리에 한 남자가 남았다.

그 남자는 방금 지나간 여자들을 힐끗 쳐다본 뒤 설이 누워 있는 벤치 가까이 다가와 섰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광합성 하는 중이에요. 요새 햇빛을 너무 못 봤거든요.”

설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채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아.”

“이제 내 이름도 아닌데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요.”

“그래, 강조국. 얼굴 좀 보자.”

그제야 설은 얼굴을 덮고 있던 두터운 연구 서적을 아래로 내렸다. 해를 등지고 선 건우가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은 강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명했고 작년부터 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일 때문에 왔다가 다이아몬드 숟가락 얼굴 좀 보고 가려고.”

“들었어요?”

설이 피식 웃으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자, 설은 손목에 묶어뒀던 머리끈을 풀어 한데 모아 묶었다.

“진짜 대전까진 웬일이에요?”

“Pakin이 KAERI에 개발 투자하는 거 있잖아, 그거 때문에 황 원장님 좀 뵈러 왔어.”

“건우 씨,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건우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백인회 회장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고, 직책상으로 Boni 부사장인 그는 Pakin의 실질적인 오너가 되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KAERI에 상당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원자력 연구 개발을 돕고 있었다.

“참, 다음 주에 청와대에서 오찬 열린다며?”

“건우 씨도 거기에 와요?”

설이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물었다.

며칠 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들과 기업 총수들의 오찬이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건우는 그 자리에 기업 총수인 부친을 대신해 젊은 재벌 3세 몇 명이 대신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례적인 그들의 행보는 영애인 강조국이 오찬에 참석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설은 그 자리에 과학자로 참석하는 것이겠지만, 그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영애를 보기 위해 참석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 때문에 못 가니까, 너무 예쁘게 하고 가지는 마.”

건우가 설을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또래 재벌 3세들이 왜 그곳에 가려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푸른 기와지붕 아래 사는 미혼의 아름다운 영애는 충분히 욕심내고 싶은 사람이었다.

“예쁘게 하고 가야 해요. 원장님이 내주신 미션을 클리어하고 돌아와야 하거든요.”

“미션이 있어? 무슨 미션?”

“기업의 기술 개발 투자요. 원장님께서 나더러 부족한 정부 지원금 대신 투자 많이 받아오래요.”

설이 못마땅한 듯 샐쭉한 표정을 짓자 건우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아, 황 원장님 진짜 너무하시네. 영애를 이런 식으로 써먹다니, 하하하하.”

“좀 그렇죠?”

설은 건우와 눈이 마주치자 마침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 덕분에 이렇게 잠시 그리움을 내려놓고 웃을 수 있었다.

“우리 영애 님은 연애 안 해? 벌써 가을이야, 그렇게 허송세월 보내다가 내 꼴 날 수 있어.”

물론 건우도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게 꼭 애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뜨거운 사랑을 나눌 연인이 아니라 어깨를 기대고 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건우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웠다.

“내가 왜 연애를 안 해요? 어젯밤에도 남자들이랑 술 마셨는데.”

“강조국이 진짜 그랬다고?”

“내가 건우 씨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설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런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과 술을 마셨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 남자들이 유부남이라는 것과 그분들의 자식들이 설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은, 굳이 건우에게 들려줄 필요가 없어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난 네가 김민준을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

건우의 나지막한 음성에 설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민준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과의 끝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민준이 떠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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