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37화 (37/94)

37화. 당신이 없는 동안 (2)2016.05.10.

민준이 떠난 지 6개월 뒤.

쪼르르르-

설은 에스프레소 머신기 앞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설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후 머그잔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이 한국을 떠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고, 설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로 되돌아왔다.

청와대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갑갑하고 숨이 막혔다.

설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경호관들이 그녀 가까이 따라붙었고,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보고되었다.

설은 자신이 꼭 투명한 유리로 만든 방 안에 갇혀 있는 인형 같았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설은 그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싶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설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들며 완강히 반대했지만, 그녀의 설득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설은 여자 경호관이 그녀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마침내 청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

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 아래에 보이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9시였다.

얼마 전 원자력연구원장으로 취임한 황 박사가 며칠 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꼭 전해줄 것이 있으니 바쁘지 않으면 주말에 얼굴을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사건 이후로 황 박사님을 한 번쯤 찾아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동안 경황이 없어 따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설은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황 박사와 약속을 잡았고, 그날이 오늘이었다.

설은 노트북을 그대로 켜둔 채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풀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이제 더 이상 할아버지와 민준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설의 목 언저리는 허전했고, 그건 그녀의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민준은 결국 설을 기억하지 못한 채 외국으로 떠났고, 그 후로 그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만약 그가 설을 기억해냈다면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얼마 전 설은 김 국장에게 조심스럽게 민준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요원의 신변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김 국장은 설의 안부를 물었고,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병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대답에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국 양도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닐까 많이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도 김 국장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조국 양도.’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

황 박사는 광화문 근처 카페 2층의 창가에 앉아 눈이 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젊은 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며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황 박사가 고개를 돌렸다.

설이 목에 둘렀던 머플러를 풀며 맞은편에 앉았고, 황 박사는 반가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은 이제 마음의 안정을 찾은 건지 건강해 보였다.

황 박사는 그런 큰일을 겪었는데도 여전히 또렷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조국 양!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네, 박사님 덕분이에요.”

설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황 박사의 얼굴을 보니 호텔에서 함께 마음 졸였던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때요, 많이 바쁘진 않아요?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 내가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냥 논문이나 책을 읽으며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 뭘 할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황 박사는 설의 대답이 아주 만족스러운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박사님, 제가 박사님께 받아야 할 게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아, 잠깐만요. 여기, 이겁니다.”

황 박사는 옆 의자에 올려놓았던 노란 서류 봉투를 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이 박사님께서 조국 양에게 남기신 유산입니다.”

“할아버지께서요?”

의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설의 눈에, 순식간에 당혹감이 어렸다.

황 박사님에게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그녀에게 남긴 유산이라니, 유산에 관한 이야기는 부모님에게서도 따로 들은 게 없었다.

“열어 봐요.”

황 박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설은 얼떨떨한 얼굴로 노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봉투 안에는 두툼한 종이 뭉치가 들어 있었다.

종이 뭉치 상단에는 등기 권리증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고, 그 밑에 권리자 강조국이라는 이름이 단정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설은 얼른 페이지를 넘겨 서류에 적힌 주소지를 읽었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박사님, 이건!”

설이 놀란 눈으로 황 박사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이 박사님께서 생전에 가끔 머무셨던 서울 자택입니다.”

“저도 알아요. 근데 이걸 어떻게 박사님께서…….”

설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그렇게 주인을 찾고 싶어 했어도 꼭 누군가 일부러 숨겨놓은 것처럼 찾을 수가 없던 집이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집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언젠가 꼭 되찾겠다고 수년째 마음만 먹고 있던 차였다.

“저는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강조국 양에게 전해주라는 이야기만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집은 박사님께서 생전에 사용하시던 그대로입니다. 제가 맘대로 정리할 수 없어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

“그리고 이건 집 키입니다. 한번 가서 확인해 보세요.”

황 박사는 설 앞에 하얀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고, 그녀는 멍한 눈으로 플라스틱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설은 플라스틱 카드를 손에 쥐고 매끈한 표면을 조심스런 손길로 어루만졌다.

기쁘다는 말로는 벅찬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집을 다시 볼 수 있다는 벅찬 감동에 취했기에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 같은 건 하지 못했다.

“조국 양.”

“……네, 박사님.”

황 박사가 옛 추억에 잠겨 눈시울이 붉어진 설을 조용히 불렀다.

이걸 전해주기 위해 이곳에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혹시 나랑 같이 일해보고 싶지 않아요?”

황 박사는 그녀를 만나기 며칠 전 대통령을 만났고 그때 넌지시 운을 띄워보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대통령은 그에게 딸 조국은 이제 영애로서만 살게 할 생각이라고 분명히 잘라 말했다.

그가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조국 양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 박사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영애로서만 살아가게 하기엔 조국 양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그는 만약 이인호 박사가 지금도 살아 있었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설은 황 박사의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원자력연구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황 박사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은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설이 희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그럴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조국 양.”

황 박사는 두 눈을 감았다 뜨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잠시 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2층 저택 앞에 자동차가 멈춰 섰다.

설은 자동차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뒷문을 열고 내려 대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할아버지 집을 다시 찾았다는 게 꿈만 같았다.

설은 차가운 철문에 손을 대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키를 꺼내 잠금장치에 갖다 댔다.

철컹-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대문이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설은 이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나지막하게 내쉬었다.

“영애 님, 저는 여기에 있을까요?”

대문 앞에 함께 서 있던 여자 경호관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설에게 물었다.

그동안 영애는 한 번도 그녀에게 어딜 가자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영애가 지금 당장 갈 곳이 있다면서 그녀를 호출했을 때 경호관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었다.

영애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자신이 끼어들면 안 되는 사적인 부분인 것 같았기에 경호관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설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대문을 밀며 저택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 위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정원의 푸른 소나무도, 짙은 흑색 기와도, 서재의 둥그런 창문도 설의 예전 기억과 똑같았다.

정원의 잔디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말끔히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길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가 이 집을 왜 황 박사님께 맡겨 놓았는지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제 언제라도 설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설은 현관문을 열고 1층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할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그녀가 서재 문을 열자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 그런지 오래된 책방 같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설은 곧장 창가로 다가가 둥근 모양의 유리창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탁한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설은 그제야 서재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들과 할아버지의 책상 연필꽂이에 꽂혀 있는 만년필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어느 것 하나도 설의 기억과 어긋나지 않았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할아버지만이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흐흑-

설은 울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흐느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책상 가까이 다가가 책상을 어루만진 뒤, 가죽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뺨을 기대며 엎드려 눈을 감았다.

책상 의자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뒤에서 껴안고 장난치던 그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녀가 책상 서랍을 열라치면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똑딱 눌러 서랍을 잠근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곤 했다.

하지만 설은 그때 이미 책상 서랍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다고 말하면 할아버지가 다른 방법을 쓸 것 같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설이 왼손을 책상 아래로 뻗어 구석에 볼록 튀어나온 작은 플라스틱을 찾아 앞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딸깍-

소리가 나자 설이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이걸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은 이런 식으로 할아버지의 서랍 안을 종종 들여다보곤 했다.

설은 잠금장치가 풀린 책상 서랍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제일 먼저 정갈하게 정리된 수첩과 필기도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나 좋은 글귀를 발견했을 때, 수첩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설은 두툼한 수첩들을 차례로 뒤적거리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까만 가죽 수첩을 집었다.

수첩을 펼치자 할아버지가 빼곡하게 기록해 놓은 짧은 글들이 보였다.

설은 애틋한 눈빛으로 문장들을 읽으며 한 장, 한 장 뒤로 넘겼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종이를 넘기던 설의 손길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난 항상 자네를 생각하고 있었네. 그 친구를 떠올릴 때마다 어린 자네 생각이 나서 살아오는 동안 내내 괴로웠다네.’

‘그러니 이렇게라도 괴로움을 덜어내려는 이 늙은이의 마음을 부디 자네가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네.’

이게 무슨 소리지?

설은 눈을 크게 뜨며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잘 자라주어 너무 고맙고 감사하네, 민준 군. 난 진심으로 자네가 행복하길 바란다네.’

민준…… 군?

툭, 가죽 수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수첩 가운데 끼워져 있던 사진 한 장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설이 떨리는 손으로 얼른 사진을 바닥에서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서, 제복을 입은 민준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국장님, 강조국 양이 오셨습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결재 서류를 들여다보던 김 국장이 고개를 들었다.

김 국장은 잠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설은 창백한 얼굴로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설은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설을 본 경호관은 사색이 되어 그녀를 자동차에 태웠다.

곧장 병원으로 가겠다는 경호관에게 설은 이곳으로 가자는 말을 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조국 양.”

김 국장은 태연하게 서류를 덮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황 박사에게서 미안하다는 전화를 받은 터라 영애가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국장님, 이게…….”

설은 손을 가늘게 떨며 김 국장 앞에 까만 수첩을 내밀었다.

김 국장이 무심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게, 뭐예요?”

김 국장은 시선을 내려 수첩을 바라보았다.

수첩 옆으로 삐져나온 사진에서 민준의 얼굴이 얼핏 보이자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예전에 이 박사님께 드렸던 사진이었지만, 김 국장은 이 사진을 박사님께 드렸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김 국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저는 모르는 사진입니다.”

“할아버지 수첩 속에 이게 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김민준 씨를 알고 계셨다고요!”

“조국 양, 그 사진이 왜 거기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국장님. 국장님께서 황 박사님께 부탁하셨다는 말씀 다 듣고 왔어요.”

설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황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황 박사는 사실은 김 국장에게 부탁받은 일이었다며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다.

하지만 설은 황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평창동 집을 김 국장에게 맡겨놓았는데 그가 설에게 전해주기 껄끄러워 대신 황 박사에게 부탁을 했을 수는 있었다.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할아버지와 접점을 가질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전 이 박사님께서 조국 양에게 남긴 자택을 대신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전해주기 뭣해서 황 박사님께 부탁을 드렸던 거고요. 정말 그뿐입니다, 조국 양.”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국장님.”

“조국 양, 때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고 지나가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 집을…… 저한테 주신 게 아니군요.”

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김 국장이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조국 양에게 남기신 게 아닙니다.”

이건 결코 민준이 원하던 장면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박사님께서는 그 집을 제 아들 민준이한테 남기셨습니다.”

김 국장이 단단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할아버지께서 왜요……?”

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고, 김 국장이 골치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

민준의 출국 며칠 전.

김 국장은 민준의 출국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이번에 생사의 고비를 넘긴 민준을 보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가 이인호 박사의 이야기를 꺼내면 민준의 친부인 재권의 이야기를 꺼내야 했기에, 그동안 민준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민준이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 지 몰랐다. 그래서 김 국장은 더 늦기 전에 이인호 박사의 뜻을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들어와.”

민준이 노크를 한 후 김 국장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민준에게 소파로 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잠시 후 그는 테이블 위에 노란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내려놓으며 소파에 민준을 마주 보고 앉았다.

“이게 뭡니까?”

“열어 봐.”

민준이 두툼한 봉투 윗면을 뜯어 안에 들어 있던 서류를 꺼냈다. 그건 서울에 있는 개인 주택의 등기 권리증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젠 너한테 줘야 할 것 같다. 네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해.”

“이건 등기 권리증 아닙니까? 이걸 아버지께서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내가 아니라…… 이인호 박사께서 생전에 네게 남겨 놓으신 거다.”

“이인호 박사님이요?”

이인호 박사라면 설의 외할아버지……?

민준이 의아한 얼굴로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혹시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 맞아. 원자력연구원장이셨던 이 박사님, 그분이 너한테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던 거야.”

“그분이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고 이건 또 뭐고요.”

“박사님께서는 네가 아니라…… 재권이와 아는 사이셨다.”

“…….”

무언가를 예감한 민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박사님은 재권이의 마지막 임무 대상이었으니까.”

김 국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민준은 시선을 내려 당혹스런 눈빛을 감추었다.

**

‘20여 년 전에 이 박사님의 엄호를 맡았다가 순직한 요원이 있습니다. 김재권, 민준의 친아버지이자 제 동기입니다.’

‘조국 양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민준이를 데리고 이 박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그때 민준이한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셨지만 제가 마음만 받았습니다.’

‘그의 친아버지와 박사님과의 인연은 민준이도 모르고 있었던 일입니다. 다만 그 서류는 제가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 출국 전 민준이한테 전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서류를 강조국 양에게 전해 달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강조국 양이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나중에라도 민준이한테 아는 척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NIS에서 나와 멍한 얼굴로 무작정 앞을 향해 걷는 설의 뒤를 경호관이 불안한 얼굴로 따라 걸었다.

‘내가 찾아줘?’

‘아니요. 나중에 내가 꼭 다시 되찾을 거예요.’

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영애 님!”

당황한 경호관이 얼른 설의 팔을 붙들었지만, 설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이런 이야길 꺼내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 조국 양.’

아아아.

설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

촤악-

거실 커튼을 옆으로 힘껏 열어젖히고 설은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설은 평일에는 대전에 있는 오피스텔에 머물렀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되돌아왔다.

“가을이네.”

설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뱉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민준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민준의 아파트는 늘 고요했다. 밤에는 깜깜했고 낮에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넌 곰이니까 추위를 타지 않을 거야, 그렇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는 곰인형을 바라보았다.

‘김민준이 이번 주에 귀국한다던데.’

건우는 아는 국정원 단장님께 이야기를 들었다며 설에게 민준이 귀국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급비밀이라던 요원의 거처는 돼지껍데기와 소주 몇 잔에 건우에게 넘어왔다.

“당신은 정말 나를 잊어버린 거야?”

설은 마치 민준에게 말을 걸듯 인형에게 말을 건넸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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