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도돌이표2016.05.12.
비행기는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을 향하고 있었다.
수면 안대를 한 남자가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기장입니다. 저희 한국항공과 함께 즐거운 여행 되셨습니까. 잠시 후 이 비행기는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남자의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는 다시 한 번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이륙할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근사했기에 여자는 이따금씩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 남자의 왼손 손목시계를 살짝 건드려보았다.
“저기, 인천공항에 곧 도착할 거라는…….”
“치워.”
그는 자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입술 새로 싸늘한 말을 뱉어냈다.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내밀었던 손을 얼른 거두어들였다.
남자가 두 눈을 덮고 있던 안대를 천천히 걷어내자 어두운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준이 2년간의 파견 근무를 마치고, 마침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
탁-
민준이 거실 한가운데 캐리어를 세워 둔 채 실내등의 스위치를 켰다.
먼지 한 점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 집은 그가 떠나던 날과 똑같았다.
민준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난 뒤 상체의 물기를 닦아내며 밖으로 나왔다.
따르르르-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걸 알고 계시는 아버지거나 혹은, 이제 단장으로 승진한 박 팀장일 터였다.
민준은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스피커 모드로 바꾼 후 다시 테이블 위로 툭 던져놓았다.
“안녕하십니까.”
“김민준! 금발 머리 아가씨랑 뜨거운 연애는 많이 하고 왔냐?”
그가 거실 유리문을 옆으로 밀자 시원한 바람이 거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제법 차가워 이곳이 대한민국이고, 가을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단장님, 이제 전 어디로 갑니까?”
민준이 무덤덤한 말투로 물으며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미친놈아, 다른 놈들은 다 안 가겠다고 난리인데 넌 자원을 하냐?”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민준이 자원했던 이라크 파견 근무 신청은 반려되었고, 그는 귀국을 종용받았다.
“어차피 누군가는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매정한 놈.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반갑긴 하네. 넌 내가 잘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픽, 민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하얀 수건을 목에 걸고 주방으로 향했다.
민준은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쳐다보았다.
“…….”
“내일 하루 쉬고 모레 점심시간 맞춰서 들어와, 같이 밥이나 먹게.”
“…….”
“왜 대답이 없어?”
“……네.”
박 단장의 재촉에 잠시 딴생각에 잠겼던 민준이 뒤늦게 대답했다.
청소 업체에 입주 청소만 부탁을 했던 것 같은데, 냉장고 안에 생수와 비타민 음료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안 그래도 편의점에 마실 물이나 사러 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센스 있는 업체 덕분에 번거로운 일이 하나 줄어든 셈이었다.
민준은 플라스틱 생수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돌려 딴 후 꿀꺽, 한 번에 반을 비웠다.
그리고 식탁에 놓아둔 네모난 상자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입에 물고, 남아 있던 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탁, 민준은 실내등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저녁.
민준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러 본가에 들렀다. 아버지에게는 내일 사무실로 들어가 따로 인사할 생각이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민준아!”
“오빠!”
민준이 현관문을 들어서자 어머니와 동생 서연이 반색을 하며 민준의 앞으로 달려 나왔다.
민준이 옅게 웃으며, 그를 껴안고 좋아서 방방 뛰는 서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나 선물 줘, 오빠!”
서연이 민준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빙긋 웃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더니 이내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는 그를 못마땅해하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빠, 설마 이번에도 회사 그만두고 온 거 아니지? 그렇게 자주 이직하면 여자들이 싫어한다니까? 오빠 나이가 지금 몇인지 알아? 언제까지 그렇게…….”
“김서연, 선물 안 찾아볼 거야?”
“아, 맞다. 선물!”
퍼뜩 정신을 차린 서연이 민준의 손에서 쇼핑백을 빼앗아 들고 번개처럼 사라졌다.
민준의 어머니는 그제야 그의 손을 잡고 연신 민준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가 민준을 제 품에서 키운 세월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똑같이 키운다고 키웠어도, 서연과 달리 어리광 한번 부리지 않고 자란 민준은 그녀에게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배고프지? 밥 먹자, 민준아.”
“네, 어머니.”
민준의 어머니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뒤돌아섰다. 그녀는 민준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2년 전 자신의 생일인데도 오지 않았던 민준과, 얼굴이 납빛이 되어 잠 못 이루던 남편을 보면서 민준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잠시 후, 민준과 서연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의 동생 서연은 못 본 사이 대학을 졸업했고 이제는 사회인이 되었다.
“직장 다닌다며,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는 거야?”
“일찍도 물어보네. 내가 오빠랑 같은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다니고 있는데.”
“어디 다니는 데. 혹시 오빠가 아는 데야?”
“응. 오빠도 아는 데야. Boni, 밥 완전 잘 나오는 데.”
서연은 쇼핑백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며 건성으로 대답했고, 그녀의 대답에 민준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하필이면 설을 만났던 Boni였다.
“왜 거길 갔어?”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서연이 슬쩍 민준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원래 거길 가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다른 데는 다 떨어지고 거기만 붙었어.”
“……다른 데를 더 찾아보지 그랬어.”
“그만 한 곳을 찾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런데 참 오빠! 그 예쁜 언니 말이야, 그 언니도 회사 그만뒀어? 내가 거기서 찾아봤는데 그 언니 거기에 없던데?”
“…….”
“왜 있잖아, 오빠랑 나랑 셋이서 같이…….”
“선물은 찾았어?”
민준이 서연의 말을 잘라내며 말을 돌렸다.
그가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설의 흔적을 보게 된다.
“아니, 찾고 있는 중이야.”
서연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박스 하나를 귀에 대고 흔들더니 서둘러 포장지를 벗겼다.
“이씨. 내가 향수 그만 사라고 했어, 안 했어?”
식탁 위에 포장지가 뜯긴 향수를 탁 내려놓은 서연이 씩씩거리며 민준을 노려봤다.
“옆에 와인도 있을 거야.”
“……그것도 내 거야?”
“응, 두 병 다 니 거야.”
서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오빠, 그 언니는 만났어? 오랜만에 한국에 왔는데 제일 먼저 그 언니를…….”
“……서연아.”
아.
서연이 입술을 꾹 다물더니 쇼핑백에 선물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민준이 그녀를 저렇게 부른다는 건 서연이 실수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민준아, 밥 먹자.”
그때, 어머니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를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식탁은 어느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찌개를 가운데 올려놓으며 민준을 마주 보고 앉았고, 평소처럼 맛있는 음식을 민준 앞으로 밀어놓으셨다.
서연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침을 꼴깍 삼켰고, 민준은 자신 앞에 놓인 음식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왜, 다른 것도 더 해줄까?”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민준이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연이도 젓가락을 멀리 뻗으며 밥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민준은 눈빛을 감추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가장 좋고 맛있는 음식을 민준에게 내밀었고 서연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민준은 이 따듯한 식사가 언제나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그는 자신이 꼭 동생 서연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고, 그래서 되도록 본가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어머니.”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에 그제야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
다음 날.
서연이 회사 1층 유리 회전문을 열고 힘차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취직했을 때 그녀는 목에 건 사원증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집에서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항상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녔다.
띠딕-
사원증을 리더기에 대면 어서 들어가라며 초록 불이 반짝이는 그때의 기분이 좋아, 일없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경비 아저씨의 눈총을 받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이렇게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사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기분도 좋았다.
서연은 커리어 우먼에게 필수 아이템인 사원증과 테이크아웃용 커피만 있으면 아무도 부럽지 않았다.
“카페 모카에 휘핑크림 추가해 주시고요, 생크림은 아주 많이 올려주세요, 아주아주 많이요.”
그녀는 카페 계산대 앞에 서면 언제나 이렇게 얘기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생크림의 양은 오늘도 일정했다.
늘 생크림을 많이 달라고 말을 하는 서연이나, 알았다고 친절하게 웃으면서도 늘 정확한 양을 주는 직원이나 도긴개긴이었다.
서연은 커피 위로 수북이 쌓인 생크림을 혀로 할짝거리며 1층 카페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사옥 앞 장식물에 기대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며칠 전에 너무 멀리 나갔다 길을 잃어버린 후로 서연은 절대 회사에서 반경 20m 이상 벗어나지 않았다.
“살쪄요.”
“응, 살쪄요.”
안 그래도 눈앞에 쌓인 생크림 산이 점점 줄어들어 기분이 언짢은데, 누군가 서연의 앞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앵무새처럼 남자의 말을 따라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 아저씨다!”
“아저씨?”
아차, 이제는 회사 선배님이니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될 텐데.
서연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의 목에 사원증이 없었다.
“아저씨는 이제 우리 회사 안 다녀요?”
“우리 회사? 아니, 예전에 나한테는 당장 회사 그만두라고 하더니 정작 본인은 Boni에 입사를 한 거예요?”
곤란하게도 남자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냥……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워서요.”
“정말 이유가 그것뿐이에요?”
“네.”
남자는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오빠는 잘 지내요?”
“그럼요! 우리 오빠 되게 좋은 외국 회사 다녀요,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회사.”
서연이 고개를 들고 어깨를 한껏 펴며 으스댔다.
똑똑하고 잘생긴 오빠는 항상 그녀의 자랑거리였고, 민준의 얘기만 나오면 그녀의 고개는 한껏 위로 치켜 올라갔다.
“여기보다 훨씬 좋은 데로 갔다니 나도 가고 싶네요.”
“으응? 아저씨 아직도 우리 회사 다녀요? 근데 왜 난 아저씨를 한 번도 못 봤죠?”
“일하는 부서도 다르고 층도 다른데 당연히 못 볼 수 있죠.”
“그럼 아저씨는 왜 사원증이 없어요?”
“응?”
“이거요, 사원증.”
서연이 목에 걸린 사원증을 손으로 잡고 건우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커피사업부 마케팅 팀 김서연 사원.”
그러자 건우가 서연의 사원증에 적힌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아니, 읽으라는 게 아니라요, 아저씨는 왜 사원증이 없냐고요.”
서연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건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실 이제 여기 안 다녀요. 가끔 일 있을 때만 들어오지.”
건우는 Boni 부사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Boni보다는 다른 계열사 사옥에 가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Boni에 들렀다가 우연찮게 서연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회사 너무 자주 바꾸지 마세요, 그거 별로 안 좋아요.”
“그러는 서연 씨는 여기가 다닐 만한가 보네요?”
“뭐 그럭저럭요, 사실 원래 다른 데 가려다가 여기로 오긴 했지만요.”
“더 좋은 회사가 있으면 거길 가지 그랬어요, 요즘 구직자들한테 Boni 별로 인기도 없던데요.”
건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연은 건우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사실 2년 전부터 Boni는 구직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인회 회장이 구속되면서 회사 계열사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다.
뭐, 그랬기 때문에 서연이 이곳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저도 아저씨처럼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어요. 여긴 제 워너비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서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말했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도망가려고요?”
건우가 깜짝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요. 제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데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말이에요.”
처음 봤을 때에도 느꼈지만 서연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구김이 없고 밝은 아가씨였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건우가 힐끗 시선을 들어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는 비서실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팅에 늦었는데 건우가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도 알아요, 제 별명이 비타민이거든요. 스트레스 받을 때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애들이 절 그렇게 불러요.”
서연이 빨대로 모카커피를 쭉 빨아올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서연 씨 친구들은 우울할 때 서연 씨 만나면 참 좋겠네.”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아저씨랑 얘기하고 있잖아요.”
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건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아닌데, 난 지금 꽤 즐거운데.”
“아닌데요, 아저씨 지금 되게 우울한 것 같은데요. 아저씨 무슨 속상한 일 있어요?”
“……속상한 일 같은 거, 없는데요.”
“이상하다, 아저씨 되게 우울해 보이는데.”
서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건우의 눈빛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모르는 사람 얘기를 그렇게 쉽게 하다니, 서연 씨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날 이후로 건우의 마음은 늘 지옥이었다.
크게 소리 지르며 울고 싶어도 겉으론 내색할 수 없었고,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밑바닥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런데 걱정 마세요, 전 기억력이 안 좋아서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
“어, 들어갈 시간이다. 전 이제 일하러 들어가야 하거든요? 반가웠어요, 아저씨. 잘 가요!”
서연은 건우의 갑작스런 냉대에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서연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비슷한 시각.
“지원서가 반려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민준이 김 국장의 사무실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서 있었다.
그가 그동안 못 뵌 사이 아버지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김 국장은 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화분을 줄지어 세워놓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가며 부드러운 천으로 정성스럽게 잎사귀를 닦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도를 닦는 도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나도 알고 싶다, 도대체 네놈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는지.”
김 국장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푸른 잎에 광택을 더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도망치듯 떠났던 그의 옛 모습이 민준의 모습 위로 겹쳐 보였다.
그는 더 멀리 도망쳐봤자 괴로운 마음을 두고 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민준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잠은 잘 자냐?”
“그럼요.”
김 국장이 힐끗 민준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반짝거리는 잎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영애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구나.”
“……그렇습니까.”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올해의 주목 받는 신인 과학자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고, 저명한 과학 전문 잡지에 그녀의 이름이 작게 실려 있는 것도 보았다.
가슴에 원자력연구원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웃고 있던 그녀는, 그녀가 원하던 평화로운 삶 속에서 꿈을 이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업 보안 팀으로 발령 낼 테니 당분간 거기 있어.”
“국장님.”
민준이 눈썹을 강하게 꿈틀거렸다.
산업 보안 팀은 기업의 핵심 기술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산업 스파이를 잡아내는 부서였다. 위험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민준의 적성에 맞는 부서는 아니었다.
“완치 증명서 받아와. 그럼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김 국장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는 민준이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현지 주치의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최고의 집중력을 요하는 부서에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 요원을 둘 수는 없었다.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약물치료보다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민준은 어렸을 때 친부모와의 갑작스런 관계 단절로 생긴 트라우마가 잠재되어 있다가 영애의 납치사건을 계기로 그 불안함이 증폭되어 나타난 케이스였다.
그가 사고 후 겪었던 단기 기억상실증도 소중한 사람을 다시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행히도 민준의 기억은 금방 돌아왔지만, 그는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받아 오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전 무슨 일을 합니까?”
“다음 주에 청와대 녹지원에서 과학자들과 기업 총수들과의 비공식 오찬이 열린다. 기업들의 개발투자를 독려하는 자리지.”
청와대, 설이 있는 곳.
민준의 귀에 청와대라는 세 글자가 들어와 박혔다.
그는 수면 위로 떠오르려던 뜨거운 감정을 다시 어두운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누굽니까.”
“뭐가?”
“목표물이요.”
김 국장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방금 꺼낸 말은 아마 재벌 총수 중 누군가를 겨냥해 던진 말일 것이다.
목표물이냐, 아니냐만 생각하는 저 이분법적 사고가 혹시 사랑에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김 국장은 민준이 아직도 영애를 마음에 담고 있는 건지 아닌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2년 전 민준이 처음으로 한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계속 그의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 있었다.
키우는 동안 한 번도 무엇을 갖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그런 민준이 처음으로 영애 곁에 남아 있고 싶다는 바람을 보였는데, 그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들어주지 못했다.
“박인정, 네 후배고 지금 대민그룹 2세 이대철과 관련된 마약 밀매 조사 중이야. 그날 오찬에 이대철도 참석한다고 하니 가서 도와줘.”
“제가 말입니까?”
그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김 국장은 그런 민준을 못 본 척하며 다시 마른 헝겊으로 잎사귀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민준이 다시 돌아온 이상, 이제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민준이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봐야, 재권의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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