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39화 (39/94)

39화. 나를 잊었나2016.05.17.

민준은 박 단장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그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박인정이 누굽니까, 단장님?”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박 단장에게 물었다.

박 단장은 수사단장이라는 제법 권위 있는 직함을 달면서 중후함과 묵직함이라는 옵션을 추가 장착했다.

그 옵션의 성능이 꽤 쓸 만한 게, 후배 녀석들은 박 단장만 보면 그 앞에서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쫙쫙 균열이 가며 와르르 무너질 얼음조각처럼 바짝 얼어붙곤 했다.

여전히 존경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저놈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래. 보통은 그렇다는 말이다, 보통은.

박 단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민준은 소파 헤드에 느긋하게 한쪽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한결같은 놈이었다.

하지만 민준이 그렇기 때문에 박 단장도 그 앞에서는 민낯을 보일 수 있었다.

그도 불혹을 훌쩍 넘기다 보니 이제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그리운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몰인정 말하는 거야, 지금?”

“박인정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에요?”

“우리끼린 그냥 몰인정이라고 불러. 다른 여자 요원들한테 아주 인정머리 없게 생겼거든. 근데 자식, 벌써 들었냐?”

“뭘 벌써 들어요?”

박 단장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걔 때문에 우리 NIS도 드디어 외모를 보고 요원을 뽑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안 그래도 혈기 왕성한 놈들이 우리 인정이 보면 아주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요. 애들이 걔 옆에 붙여달라고 난리도 아니야. 그러나! 내가 또 그 꼴은 못 보지, 암.”

“요원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겠네요.”

민준은 별 관심이 없는 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 띄는 외모는 요원의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특히 여자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할 말이 겨우 그게 다야?”

“또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어떤 애인지 궁금하지 않냐?”

박 단장이 민준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국장님께서 굳이 그 자리에 민준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아름다운(?) 풍경이 절로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다.

역시 박 단장의 예상이 맞았다. 처음으로 민준의 눈빛에 강렬한 호기심이 깃들었다.

“싸움을, 그렇게 잘합니까?”

“……됐다.”

박 단장이 몸을 다시 뒤로 물리며 쯧, 혀를 찼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정은 집안도 좋고 외모도 훌륭하고, 성격도 털털하니 좋았다.

그래서 국장님께서 인정을 며느리로 점찍은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애가 이 모양이니 원.

“참, 너 영애 알지? 요즘 정,재계 내로라하는 집안들이 있는 줄 없는 줄 다 동원해서 청와대 쪽으로 줄을 댄다고 하던데, 난 건우가 영애랑 잘 지내기에 혹시나 했거든. 근데 역시 게네 둘은 어렵겠지? 아무리 Pakin 그룹이라고 해도 말이야.”

“…….”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찻잔을 뱅글뱅글 돌렸다.

이래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민준은 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그를 완전히 잊고 타인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그리움은 세월에 조금도 희석되지 않았다.

“안기영은 어떻게 지냅니까?”

민준이 화제를 돌렸다.

그는 퇴원 후 얼마 안 있다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지만, 당시 민준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줄곧 싱글벙글하던 박 단장의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먹구름이 꼈다.

서 박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백인회 회장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었다.

굵직한 기업 총수에게 7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20년 선고받았는데, 혹시 나중에 감형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최소 15년 이상은 살아야 하니까.”

“지금 청주에 있습니까?”

“거기 가 보려고??”

박 단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봐서요.”

민준이 바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영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나중에 박 단장에게 들어서 알았다.

만약 기영이 민준처럼 좋은 부모님을 만나 입양이 되었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던 민준과 그런 운이 닿지 않아 거기까지 흘러가 버린 안기영의 인생이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갑니다.”

민준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가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만난 여자아이를 다시 만나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인연은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마주치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합니까?”

설은 하얀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밖을 내다보던 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황 원장이 다가와 그녀 옆에 나란히 뒷짐을 지고 섰고, 설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가을이구나 싶어서요.”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한테나 시간이 빨리 가는 줄 알았는데, 젊은 사람한테도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10년 뒤에는 저도 누군가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고 있을까요? 10년 뒤, 20년 뒤 제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돼요, 원장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려면 먼저 남자를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설은 표정 없는 얼굴로 창문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미약한 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설은 자신이 마치 바닥에 엉망으로 굴러다니는 나뭇잎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준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설을 찾지 않았다.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 조용하다는 건 그가 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그냥 눈을 감았다 뜨면 나이가 들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생명공학을 전공해 인체의 신비나 연구할 걸 그랬죠.”

설이 힘없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가에만 서면 위를 올려다보는 습관이 든 그녀는 어디를 가든 항상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 살아도 겪기 힘든 일을 겪으며 설은 자신이 더 단단해진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더 약해지고 또 지친 것이었다.

그래서 설은 지금 자신이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크게 울 일도, 웃을 일도 없이 남은 세월을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모두 묻어두고만 싶었다.

“……두렵습니까?”

황 원장이 나지막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는 영애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득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이 박사님께서 살아 계셨어도 정말 그리하셨을지 자신이 없었다.

“누가 예전에 저한테 직업이 영애냐고 물었어요. 그때는 대답을 못 했는데…… 지금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어요, 난 영애가 아니라 과학자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묻지 않으셔도 돼요.”

김민준, 당신이 지금의 나를 만나게 되면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아니면 그냥 대충 살라며 인상을 찌푸릴까?

당신은 정말 나를 잊어버린 걸까?

우린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는 걸 나만 모르고 있었을까 봐, 난 당신이 돌아온 지금이 더 겁이 나는 것 같아.

“좋은 세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황 원장이 아득한 눈빛으로 희뿌연 하늘을 쳐다보았다.

**

“이제 좀, 칸막이 쳐진 곳에서 드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난 여기가 좋다, 민준아. 사람 냄새 나고 얼마나 좋아?”

“곱창 냄새가 좋으신 건 아니고요?”

“예리한 놈.”

박 단장이 끄끄, 기괴하게 웃으며 곱창이 지글지글 익는 불판 위로 젓가락을 뻗었다.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칠 수 있는, 마음 편한 술자리는 점점 줄어갔다.

그래서 박 단장은 속에 있는 말을 마음껏 지껄일 수 있는 지금이 참 좋았다.

그걸 아는 민준은 시차 적응이 덜 돼서 피곤하다고 인상을 쓰면서도 순순히 박 단장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으로 초록색 술병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넌 연애 안 하냐?”

박 단장이 슬쩍 민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예전에 여자가 있다고 했는데 눈치를 보니 헤어진 모양이었다.

귀국을 했어도 별로 할 일이 없는 듯,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니 딱 견적이 나왔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2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장님은 남의 연애사에 왜 그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어이, 김민준이, 우리가 남이가.”

“남입니다.”

망할 놈.

박 단장이 곱창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민준을 노려보았다.

“기다려 봐, 올 때 되었으니까.”

“누가 또 옵니까?”

“오지, 새로운 사랑이.”

“취하셨네요. 그만 드세요, 이제.”

찰랑-

식당 유리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왔다! 여기야, 여기!”

박 단장이 반색을 하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민준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자, 어떤 여자가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왔어요, 단장님.”

여자는 박 단장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여기는 김민준, 여기는 박인정.”

박인정? 아, 그 여자 요원.

민준이 여자를 흘끔 쳐다본 후 별말 없이 소주잔을 비웠다.

“안녕하세요, 박인정입니다.”

“…….”

민준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여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박 단장의 눈치를 살폈다.

“얘가…… 한국말을 잘 못 해서 그러니까 인정이 니가 이해해, 알았지?”

“아…… 선배님께서는 외국에 오래 계셨나 봐요?”

여자가 생글 웃으며 다시 물었지만, 민준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박 단장이 박인정을 왜 이 자리에 불렀는지 알 것 같았던 그의 심기가 사나워졌다.

“우리 민준이가…… 빨리, 한국말을 배워야 할 텐데 말이야. 하. 하. 하.”

“재미없습니다, 단장님.”

“야!”

박 단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민준에게 눈을 부라렸다.

NIS의 연예인인 인정을 불러줬는데도 저 자식은 도대체 고마움이란 걸 모른다.

“선배님 한국말 잘하시는데요? 그리고 단장님, 저 소주 말고 맥주 마셔도 돼요?”

“그럼, 그럼. 나 그렇게 막돼먹은 상사 아니야.”

인정이 손을 들더니 직원에게 맥주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우리 인정이 맥주는 잘 마시나?”

“잘 마시진 못하는데, 오백 두 잔 정도는 괜찮아요.”

민준이 소주잔에 손을 뻗으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잔을 들어 마셨다.

“소주를 마셔야 진짜 인생을 아는 거야. 맥주는 애들이나 마시는 거지.”

박 단장이 혀를 쯧쯧 차며 인정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전 소주가 꼭 눈물 같아서 마시고 싶지 않더라고요, 단장님.”

민준이 고개를 돌려 인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선배님?”

“……아니야, 아무것도.”

민준이 짙은 눈빛을 감추며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나저나, 선배님 한국말 잘 못 한다는 건 거짓말이었군요?”

“아이고, 이런 순둥이. 진짜 그걸 믿었어?”

“단장님 말씀인데 당연히 믿어야죠.”

“아우, 우리 인정이는 어쩜 이렇게 생긴 대로 말할까? 우리 공주님도 딱 인정이처럼만 컸으면 좋겠는데. 참, 민준아. 내가 우리 딸 사진 보여줄까?”

박 단장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민준에게 자랑하듯 불쑥 내밀었다.

“우리 딸 진짜 예쁘지?”

“……예쁘네요, 진짜.”

민준이 박 단장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진 속의 아이는 박 단장과 싱크로율 100%를 자랑하는, 예쁨과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며 얼굴이 넓적한 꼬마였다.

박 단장이 딸이라고 미리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민준은 참 늠름하고 씩씩하게 생겼다는 덕담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내가 진짜, 2세 생각해서 우리 와이프랑 결혼했잖아. 흐흐흐.”

하지만 그는 딸 사진을 보물처럼 어루만지는 박 단장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그 사람을 닮은 아이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민준은 자신에게 남은 인생에 그런 행복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불필요한 시간은 참 더디게만 흘러갔다.

“그러니까 인마, 너도 빨리 연애하고 결혼해서 이렇게 예쁜 딸 하나 낳아. 아들 말고 딸. 왜냐하면, 네 아들이 우리 딸 좋아하면 안 되니까, 으흐흐흐흐흐.”

바보 같은 박 단장의 웃음에 민준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박 단장의 딸 이야기를 듣자 민준은 어렸을 때 만났던 꼬마 강설이 생각났다.

둘이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민준이 출국하기 전 이인호 박사의 이야기와 함께 아버지께 들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강설이 누구랑 결혼을 하고 딸을 낳으면 꼬마 강설 같은 딸이 태어나려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민준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근데 선배님,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도대체 술병이 몇 개야. 하나, 둘, 셋…….”

“괜찮아, 쟤는 안 취해.”

인정이 놀란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았지만, 박 단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딸 사진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녀에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진짜요? 이렇게 많이 마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안 취해요?”

“그러게, 저런 놈도 있더라고. 그래서 저놈이랑 술 먹으면 술값이 아주 많이 들지.”

“그러면 선배님 여자 친구가 싫어하지 않아요? 난 남자 친구가 그러면 많이 미울 것 같은데…….”

인정이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슬쩍 민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에 은근한 애교가 실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박 단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얼른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잘생기고 예쁘면 1차 통과인 엿 같은 세상은 잠시 잊고, 자, 드디어 그린라이트인 것인가! 그럼 민준이 너는?

두구두구두구두구, 박 단장의 가슴속에서 작은 북이 울렸다.

“박인정.”

그래, 좋아. 박인정! 그리고 그다음 말은?

박 단장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끼 부리지 마라.”

“아…….”

민준이 무심하게 술잔을 비웠고 당황한 인정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박 단장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인정이 찬바람이 쌩쌩 부는 시베리아 벌판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잔인한 현장을 지켜보았다.

잔인한 새끼. 모른 척 좀 받아주면 어때서, 사람 무안하게.

“저 그런 것 아닌데요?”

인정이 그에게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전 그냥 선배님이 술을 드셔도 안 취한다고 하시기에 그게 신기해서 물어봤을 뿐이고, 또 제가 그렇게 물어봤다고 해서…….”

“아, 시끄러!”

민준이 갑자기 한쪽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다다다다 연달아 쏟아지는 소리에 골이 울렸다.

“딱따구리냐?”

민준이 험상궂게 인상 쓰며 인정을 바라보자, 인정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야! 때리지 마라.”

민준의 표정이 한 대 때릴 것처럼 험악해 보여, 박 단장은 얼른 두 사람 사이로 손을 뻗었다.

물론 인정을 때릴 리는 없겠지만, 민준은 이미 애를 서너 번 죽이고도 남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린라이트는 무슨, 박인정이 그렇게 싸움을 잘하냐고 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박 단장은 미안한 마음에 슬쩍 인정의 눈치를 살폈다.

인정이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맥주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딴청을 부리고 있는 그녀의 뺨은 여전히 발그레했다.

인정아, 미안하다.

박 단장은 마음속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숙연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

“인정이 차 안 가지고 왔지?”

“네, 차 놓고 오라고 하셔서 그냥 왔어요.”

늦은 밤, 세 사람이 곱창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민준과 박 단장은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잠시 식당 앞에 서 있었다.

박 단장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자신보다 인정이 집이 훨씬 더 가까운 민준이 도중에 그녀를 내려주고 가는 것이었는데…….

“저기, 민준아. 인정이 집이 일원동인데 말이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단장님. 너도 잘 가라.”

“……그래, 인정이는 목동에 사는 내가 내려주고 갈게, 너도 잘 가고.”

민준은 때마침 도착한 대리운전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네고 조수석에 올라 쌩하니 두 사람 눈앞에서 사라졌다.

“김민준 선배는 되게 특이한 것 같아요, 단장님.”

인정이 민준의 자동차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척 무례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단장님 앞에서 선배의 흉을 볼 순 없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놈이야. 밤늦게 괜히 불러서 미안하다, 인정아.”

“아니에요, 단장님. 괜찮아요.”

인정은 민준이 사라진 쪽을 잠시 바라보다 박 단장의 차에 함께 올랐다.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그레해진 뺨에 두 손을 올렸다.

**

집으로 돌아온 민준은 실내등을 켜고 차 키를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민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창문을 열었다.

설의 아파트는 깜깜했다. 어젯밤에도 그리고 오늘도, 그곳엔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녀가 저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민준은 미련스럽게 그녀가 살던 아파트를 내려다보았다.

탁탁-

민준은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허공에 하얀 연기를 날렸다.

“……조랑말.”

“조련사.”

“조미료.”

“조…… 국.”

조국, 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자 그의 마음이 담뱃재처럼 하얗게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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