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47화 (47/94)

47화. 당신의 우산.2016.06.14.

‘2년 전과 비교해 별로 차도가 없군요. 진료 기록을 보니 그동안 향정신약물치료도 받지 않았고요. 잠재되어 있는 불안함이 숙면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원인을 찾아 심리적인 안정을 먼저 취해야 합니다.’

“우리…… 점심 먹어야지? 나 좀 배고픈 거 같은데.”

대전으로 가는 고속도로 자동차 안, 민준이 설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을 건넸다.

설은 병원 문을 나서면서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사육사가 동물들 밥 굶기고 그러는 거 아니…….”

“도대체 약은 왜 안 먹었어요?”

드디어 설이 민준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앙칼진 목소리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설은 화가 많이 났는지, 그에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아까부터 정면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던 민준은 이내 체념했다.

“약을 복용하면 내가 아프다는 걸 인정해야 하잖아. 나는 충분히 건강하고 잘 이겨낼 수 있어. 정말 괜찮다는 뜻이야.”

“지금 괜찮지가 않잖아요!”

고개를 홱 돌려 민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민준이 여전히 2년 전 일로 고통받고 있는 줄 몰랐다. 설은 그게 꼭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니 민준이 스스로 그에 대해 말해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친부모님 이야기도, 평창동 집에 관한 이야기도 전부 그녀의 아버지나 김 국장을 통해 들어 알게 된 것뿐이었다.

민준은 그녀에게 돌아왔지만, 설은 여전히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민준이 무슨 생각으로 그녀에게 집을 돌려주고 모른 척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난 정말 괜찮지만 당신이 바란다면 괜찮지 않은 걸로 할게.”

“당신 정말 못됐네요.”

설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민준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고 했는데 설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론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겠다고 약속해요.”

“그렇게 할게. 그래야 당신 마음이 편하다면.”

민준이 금방 꼬리를 내리며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는 더 이상 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병원 주치의 방을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설은 줄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준은 밖에 있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주치의가 설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정말이죠?”

“정말이야.”

민준을 만난 후 설에게는 예전에 없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설은 그에게 여러 번 다짐을 받고, 또 확인받고 싶어 했다.

앞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치료를 열심히 받으라는 것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민준이 앞으로도 그녀를 속이거나 거짓말할까 봐, 또 치료를 받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된다는 뜻이었다.

민준의 대답에 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자 긴장하고 있던 그의 얼굴근육도 그제야 느슨하게 풀어졌다.

설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

‘김민준 씨는 어렸을 때 이미 이와 유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 관계의 단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내재되어 있던 경우입니다. 영애 님의 경우와는 다르게 불안을 느끼는 대상을 가까이 두고 그 원인을 제거해야 했지요. 대상과의 밀착 관계가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예전에 제가 분명히 그렇게 소견을 적었던 것 같은데요. 김민준 씨도 잘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2년 전 민준은 설이 필요했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그는 그녀의 곁을 떠났다.

“……당신, 기억이 정확히 언제 돌아왔어요?”

민준이 곁눈질로 힐끗 설을 쳐다보았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설이 알아서 좋을 것 없는 불필요한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와 ‘솔직한 전부’ 사이에서 적당한 대답을 골라냈다.

“2년 전. 병원에 있을 때.”

“그럼 혹시 나 때문에 떠났던 거예요?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해서요?”

주치의가 한 말 중 ‘영애 님의 경우와 다르게’라는 말이 그녀에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2년 전 설이 격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민준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이상한 상상 하지 마. 그건 원래부터 예정되어 있던 내 일이었어.”

그 당시 민준의 출국은 설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떠나기를 바랐던 대통령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온전히 민준의 결정이었고,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발생한 일들은 모두 그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민준이 설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그런 얼굴 하게 만들어서.”

민준이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들어 설의 머리카락을 쓱 쓰다듬었다.

미안하게, 설에게 자꾸 쓸데없는 걱정을 시킨다. 강설은 걱정하는 얼굴보다 화를 내는 얼굴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데 말이다.

민준은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이제 진짜 돌고래 밥 줄 시간이야! 우리 밥 먹자, 강서, 아니 강조국.”

“……뭐가 먹고 싶은데요.”

“아무거나 맛있는 거.”

볼멘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민준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돌고래라는 단어에 마법이 들어 있는지, 그녀는 이 말만 들으면 잔뜩 화나 있던 얼굴도 눈 녹듯 사르르 풀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강설이 도대체 왜 이 돌고래라는 동물에 집착하는지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배 많이 안 고프면 우리 대전 가서 먹어요.”

“대전 맛집도 벌써 종류별로 다 섭렵한 거야?”

“그렇지만 이번엔 내가 진짜로 다 가본 식당이니까 믿어도 돼요.”

“그 많은 식당을 다 누구랑 같이 갔는데?”

설을 흘끔 쳐다본 민준의 눈썹이 한껏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의 질문에 설은 대답 대신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누구랑 갔냐고 물었는데 왜 웃어.”

“내가 거기서 누구랑 갔겠어요? 연구원들이랑 같이 갔죠.”

“연구원에 여자 연구원들이 그렇게 많아?”

“우리 연구실에는 없는데요?”

대꾸 없이 와락 인상을 구기는 민준을 보며 결국 설은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을볕이 참 따듯한 날이었다.

**

점심시간 Boni 사옥 1층 카페.

유리창 너머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오전 내내 맑던 하늘이 점차 어둑해지더니 갑자기 빗방울이 거침없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서연은 아쉽게도 ‘점심 후 커피와 함께 햇볕 쬐기’라는 숭고한 의식을 치르지 못했다.

서연은 창가 테이블 앞 하이체어에 앉아 다리를 공중에 흔들거리고 있었고, 그녀 앞엔 오늘도 어김없이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카페모카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서연은 빨대 뒤쪽의 스푼으로 생크림을 떠먹으며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두두둑.

시야를 가리며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튕겨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오늘 오전 그녀는 커피사업부의 내년도 사업 계획안을 작성하다가, 하늘은 아니고 구름 정도 되는 김 팀장에게 모난 말을 잔뜩 들었다.

김 팀장은 서연이 커피에 조예가 깊다며 칭찬할 때는 언제고 요즘 갑자기 그녀에게 까칠하게 굴고 있었다.

그녀는 서연에게 어디어디가 잘못되었으니 고치라는 구체적인 지적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냥 다시 만들라고만 말했다.

서연은 누군가 그녀를 사랑하는 건 잘 캐치하지 못해도 그 반대의 감정에 대한 눈치는 빨랐다.

덕분에 그냥 다시 만들라는 말은 ‘나는 네가 싫다’라는 말과 동의어임을 금방 알아들은 그녀였다.

그래서 서연은 오늘 카페모카에 생크림을 아주아주 많이 올려야만 했다.

달콤한 생크림으로 꿀꿀한 가슴속 염기를 희석시켜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연이 주변을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하아-

그녀는 차가운 유리창에 대고 길게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유리창 위에 금세 불투명한 동그라미 하나가 생겼다.

서연은 검지로 불투명한 동그라미를 쓱싹쓱싹 문질러 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하아- 불었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 입김을 불었고, 동그라미는 긴 날숨과 비례해 그만큼 더 커졌다.

하지만 뿌듯한 기분도 잠시,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의 동그라미가 금세 찬 기운을 머금어 투명해졌다.

그녀는 작은 동그라미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씨이.

서연이 인상을 쓰더니 이번에는 좀 더 오랫동안 하아아아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는 연필로 곧 변신할 준비를 마치고 유리창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노려보는데.”

그때 그녀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그 아저씨였다.

아니지, 이 아저씨도 이 회사를 다녔으니까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그를 이렇게 또 만나다니, 서연은 마치 길에서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잘 지냈어요?”

건우가 테이블 위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며 서연의 옆에 앉았다.

그는 며칠 전 서연을 만나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눈앞의 아가씨는 기억이 모조리 리셋이라도 되었는지 건우를 보자마자 대뜸 함박웃음부터 지어 보였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던 그녀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건우와 그녀 사이에 무슨 케이블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건지 그가 Boni에 들를 때마다 이렇게 서연을 만나게 되었다.

조금 전 어떤 아가씨가 유리창에 무언가를 열심히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기에 살펴보니 또 그녀였다.

건우의 눈에만 자주 띄는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 Boni에 들를 때마다 번번이 서연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까진 잘 지냈어요. 정확히 말하면 오전 10시 30분까지요.”

“그럼 10시 30분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안타깝게도 불행해졌거든요.”

“저런. 비타민 아가씨께서 어쩌다가.”

건우가 안타까운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별명이 비타민이라던 그녀 말대로 서연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눅눅한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가슴이 뽀송뽀송 말라갔다.

“근데 아저씨는 왜 자꾸 여기로 와요?”

“서연 씨. 날 아저씨 말고 다른 호칭으로 좀 불러주면 안 될까요? 내가 아직 그렇게 불릴 나이가 아닌데요.”

“알겠어요, 로미오.”

로미…….

고개를 끄덕이는 서연을 바라보던 건우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커피 한 잔 마실 건데, 뭐 더 마실래요? 작명도 해줬으니 내가 사줄게요.”

“그럼…… 전 에스프레소 마키아토요!”

“아…….”

여유 있게 미소 짓고 있던 건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차 사라져 갔다.

“로미오도 한번 마셔 봐요! 아마 좋아하게 될 거예요.”

“…….”

쏴아-

유리창 너머로 가을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

설의 오피스텔은 연구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입주민인 그녀와 동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비 팀은 민준의 신분을 꼼꼼히 확인했다.

덕분에 그의 자동차는 정문 출입구 앞에 한참 동안 멈춰 있어야 했다.

“당신이 있어서 깐깐한 거야, 아니면 원래 저렇게 깐깐하게 구는 거야?”

“반반이에요. 워낙 경비를 꼼꼼히 서기도 하고, 또 내가 누군지 대강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것 말고도 다른 게 또 있어?”

“내가 보여줄까요?”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설의 오피스텔은 7층에 있었다. 701호는 설이 거주하는 오피스텔이었고, 마주 보고 있는 702호는 설의 경호관들이 숙소로 사용하며 교대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설이 살고 있는 701호는 702호와 출입구부터 달랐다.

설은 키패드 번호를 누르는 대신 지문 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댔고, 붉은 레이저 선이 옆으로 한 번 지나간 후에야 띠딕- 소리가 나며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설이 민준과 함께 거실에 들어서자 삐- 소리와 함께 벽에 부착된 스피커를 통해 보안 경비 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911입니다. 별일 없으십니까.

“네. 오늘은 일이 있어 지금 집에 들어왔어요. 수고하세요.”

-네. 수고하십시오.

“봤죠?”

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민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민준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항상 저렇게 체크를 하는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내가 들어올 시간이 아닌데 집에 누가 들어올 때만 저렇게 확인을 해요.”

민준이 베란다 유리창에 등을 대고 팔짱을 끼며 비스듬히 기대섰다.

그는 문득 이런 삶이 정말 강설이 살고 싶었던 삶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모습은 그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강설의 행복한 삶과는 많이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강조국.”

“응. 왜요?”

“당신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야?”

민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했기에 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무척 좋아하셨을 거고요. 그리고 또…….”

“아니. 당신 지금 행복하냐고 물었어. 당신 아버지나 할아버지 말고 당신 말이야.”

“음…….”

“이리 와봐.”

민준이 잠시 생각에 빠진 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민준이 설의 손을 앞으로 잡아당겨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왜요?”

“팔은 위로 올리고.”

잠깐 망설이던 설이 피식 웃으며 민준의 목 주변에 양팔을 둘렀고, 민준은 두 손으로 설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며 그녀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강조국 씨는 나를 다시 만나 행복하나?”

“아마도요?”

설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나른하게 웃었고, 민준은 설의 허리를 앞으로 당겨 안으며 그녀의 입술 위로 입술을 내렸다.

통유리를 통해 들어온 반짝이는 햇살이 두 사람 위로 하얗게 쏟아졌다.

그녀의 입안을 탐험하듯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민준은 잠시 후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고 싶지 않은데.”

민준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으며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많이 서운해요?”

“아마도.”

“그래도 이젠 주말에 볼 수 있잖아요.”

설은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민준을 바라보며 기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민준이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 밖으로 쿵쿵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고, 힘차게 울리는 심장 소리는 꼭 민준의 사랑 고백 같았다.

민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와 설의 하얀 목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허전해 보이던 설의 목덜미가 신경 쓰였다.

“내가 목걸이 사줄까?”

민준은 예전에 줬던 목걸이는 어디 있냐고 물어 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그녀가 무언가를 징표처럼 몸에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왜 목걸이, 반지 등을 서로의 몸에 수갑처럼 채워 놓는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건 상대방에게, 당신이 나의 사람이라는 흔적을 남겨놓고 싶은 거였다.

“이거 말이에요?”

설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왼쪽 소매를 위로 살짝 걷어 올렸다.

그러자 가느다란 팔목에 두어 번 감겨 있는 목걸이가 보였다. 민준이 선물해 준, 나무가 새겨진 목걸이였다.

민준과 애인 사이가 아닌 이상 목에 걸고 다닐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다고 목걸이를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설은 가깝지도 또 너무 멀지도 않은 손목에 목걸이를 팔찌처럼 감고 다녔다.

민준이 생각해 보니 그녀가 목걸이를 팔찌처럼 두어 번 감고 다니는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팔찌를 좋아해? 그럼 팔찌로 사줄까?”

“아니요.”

설이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그녀가 목걸이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민준은 설이 목걸이보다는 팔찌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이 목걸이를 손목에서 풀어 다시 그녀의 목에 걸었다. 목걸이에 새겨진 나무가 햇빛을 받아 설처럼 반짝거렸다.

그녀의 목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를 바라보며 민준이 미소 지었다.

“얼른 나아요. 다 나으면 내가 선물해 줄게요.”

“선물?”

“응. 선물. 당신이 갖고 싶은 걸로요.”

민준은 잠시 갖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뭔가 절실히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누군가가 무얼 갖고 싶냐고 묻는다면 이제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예쁜 민들레, 강설을 갖고 싶다고.

“뭐든지 다?”

“응. 뭐든지 다요.”

“…….”

“어때요, 동기 부여가 됐나요?”

“완전.”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치의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빠른 시간 내에 완치 증명서를 받아올 생각이었다.

“지금 곧장 서울로 올라갈 거죠?”

“아니.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어디를요?”

“어디를.”

“…….”

“위험한 데는 아니니까 인상 쓰지 마.”

설이 근심스럽게 이마를 찡그리자 민준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꾹 눌러 다시 펴 놓았다.

“일 끝나고 전화해.”

“응.”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설을 두 팔로 가슴에 가득 안았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설이 좋아서,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민준의 입가에 따듯한 미소가 머물렀다.

민준은 오늘 대전에 내려온 김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청주를 방문할 생각이었다.

그는 안기영을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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