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새로운 임무2016.06.16.
하얗게 칠해진 건물 외벽은 얼핏 보면 교도소가 아니라 대학 건물처럼 보였다.
민준은 조금 전 대전을 떠나, 이곳 청주에 있는 여자 교도소에 도착했다.
민준은 접견 신청서를 작성한 후, 접견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깥쪽에서 기영을 기다렸다.
그는 이미 박 단장에게서 그녀가 건우의 면회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안기영이 민준 자신은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는 안기영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잠시 후 유리창 너머 안쪽 철문이 열렸고, 곧이어 옅은 녹색 수의를 입은 기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2년 만이었다.
민준이 기영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가 민준에게 총을 겨눴던 그날 밤이었다.
민준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기영을 바라보았고, 곧 두 사람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건강하네.”
민준이 툭 내뱉듯 말을 던지자 줄곧 시선을 내리고 있던 기영이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2년이 흘렀어도 기영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정제되지 않은, 그녀의 날카로운 말투도 여전했다.
“내가 워낙 건강 체질이라서 말이야. 어떻게, 팔은 이제 좀 괜찮나?”
“보다시피 멀쩡해.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다정하게 면회를 할 사이였어?”
기영이 그를 비웃듯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민준이 그녀를 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기영을 만나러 온 이유는 그녀가 접견 신청을 받아들인 이유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2년 전 그날, 민준과 기영은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서 있었다.
목표물의 심장 부위를 빠르게 저격하는 것은 그녀가 늘 해왔던 훈련이었다.
그러니 가까운 거리의, 게다가 뒤돌아 서 있던 민준의 가슴을 그녀가 맞추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기영은 처음에는 민준의 팔을, 그다음에는 그의 어깨를 맞추었다.
민준은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고 살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죽지 않았다.
“그러게 좀 잘 쏘지 그랬어, 그때 날 죽였으면 이렇게 널 만나러 올 일도 없었을 텐데.”
“아쉽게도 팔이 흔들리는 바람에 말이야.”
기영은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건지 여유 있게 웃으며 민준의 말에 뻐득뻐득 말대꾸를 했다.
그러나 그때 기영의 팔이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
고작 몇 개월도 안 되는 회사 생활 동안 동료애라도 든 건지, 우습게도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총구는 민준의 심장을 비껴갔다.
민준이 설을 감싸며 끈적한 피가 묻은 총구를 기영에게 겨누었을 때, 그 짧은 순간 들었던 복잡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넌 왜 그때 날 안 죽였어? 같이 일하는 사이에 그새 나한테 정이라도 들었던 거야?”
“너 때문일 리가 없잖아? 정 고마워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강 주임한테 고마워하든가.”
민준은 기영이 죽는 모습을 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영이나 민준 자신은 그렇게 사는 인생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그런 걸 볼 필요도, 봐서도 안 되는 거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들도 기억하는 그녀에게 그건 너무 큰 고통이 될 터였기 때문이었다.
민준이 설의 이야기를 꺼내자 줄곧 여유 있던 기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기영은 곧 흔들리는 눈빛을 서늘한 눈동자 뒤로 감추었다.
“결국, 행복한 건 또 공주님뿐이네.”
기영이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곳으로 달려온 건우의 모습이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이었다.
그때 세상이 끝났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만약에 내가 설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를 사랑했을까, 만약에 내가 먼저 그에게 고백을 했으면 그는 나를 봐주지 않았을까?
남는 건 시간뿐인 이곳에서 그녀는 이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기영이 건우의 면회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그 한 번이 평생 마지막의 만남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공주님이란 말에 민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팔짱을 꼈다.
“안 주임은 열등감이 안 좋은 쪽으로 발현된 케이스인가. 이런 건 정신분석학적으로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
“뭐라고? 열등감?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여? 나도 너나 강설처럼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기영은 열등감이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녀는 보육 시설 출신이었다.
시설의 아이들은 만 18세가 넘으면 그곳을 나와야 하고 그 뒤로는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자생력을 갖춘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곳을 나오자마자 정해진 수순처럼 사회의 빈곤층으로 다시 내몰렸다.
반면 기영은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그녀는 어느 복지가의 후원을 받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기영은 밖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시설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름을 바꿨고 그쪽 방향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민준이 픽, 실소를 짓자 기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웃는 거야?”
“그런 것까지 말해주고 싶진 않고.”
민준이 두 팔을 뻗어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기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행복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설이 행복하게만 살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딸이 행복하지 않다고 얘기한다면 다른 사람들 귀엔 분명 이상하게 들릴 터였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이건 말해주고 가야겠네. 너한테 대학 등록금과 후원금을 대줬던 그 복지 사업가 말이야,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어?”
이건 민준도 사건 직후 안기영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이었고, 때문에 기영도 알고 있지 않을 이야기였다.
“찾아보니까 그 복지가 이름이 강현석이던데, 너도 그 이름 들어는 봤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분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너도 아는 이름 있잖아. 이 나라의 대통령, 강설의 아버지.”
“허, 허튼소리 하지 마! 보육원 원장님께서 분명히 후원자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다고 하셨…….”
발끈했던 기영의 말문이 턱 막혔다.
‘설아! 그분 딸이 우리 설이하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대. 그분이 우리 설이도 그분 딸처럼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우…… 웃기지 마!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금 믿을 것 같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번쯤 그분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기영이 막연히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흘러와 버린 인생이 한없이 초라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러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기영은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리며 의자를 붙들고 섰다.
“오랫동안 후원을 해줬던 아이가 자기 딸을 납치하고 죽이려 했다는데 당연히 말이 안 돼야지. 다행히 대통령께서도 그건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하셨다던데.”
“…….”
“그건 너무 슬프시다고.”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민준에게는 아버지 김 국장이 기회였고, 기영에게는 대통령의 경제적인 지원이 기회였을 것이다.
비참하게 굴러갈지도 모를 인생이 방향을 틀어 좀 더 따듯한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 말이다.
그러나 그 행운을 걷어찬 건 그녀 자신이기 때문에 이제 와 다른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거짓말이야.”
기영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얼굴을 보네.”
민준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인생 길어. 그러니까 잘 지내.”
그리고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충고를 한 뒤, 접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영이 언제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혹은 15년을 살고 나온다고 해도 그녀 앞에 남아 있는 인생이 결코 짧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강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제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그게 그녀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안기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일 것이다.
“……공주님 보고 싶네.”
건물 밖으로 나온 민준은 한숨을 내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민준의 자동차가 NIS 본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박 단장에게 오늘 사무실로 들어갈 거라는 말을 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아버지 김 국장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닥타닥, 계단을 올라가는 민준의 발걸음이 평소와 다르게 느릿했다.
설을 두고 와서 그랬고, 안기영을 보고 와서 더욱 그러했다.
설을 다시 만나 답답했던 가슴에 숨구멍이 트인 대신 머릿속에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많아졌다.
하얀 복도를 따라 걷던 민준이 국장실 방문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민준이 문을 열고 국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서 박인정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김 국장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와서 앉아.”
“네.”
민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인정 옆에 한 칸을 비워 두고 떨어져 앉았다.
“그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
“영애께서 무사하셨으니 다행이죠.”
민준의 대답에 인정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녀는 이대철이 만난 사람이 영애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와인의 성분 분석 결과 그 안에서 소량의 마약이 검출되었다.
일은 해결되었지만, 하마터면 영애가 눈앞에서 마약을 마시는데 넋 놓고 보고만 있을 뻔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청와대 경호실이 발칵 뒤집혔고 영애의 경호관들은 그 즉시 보직이 변경되었다.
경호관이 놓친 부분을 NIS 요원이 찾아내 영애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김 국장이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청와대에서 영애의 경호를 담당할 수 있도록 우리 NIS에서 요원을 한 명…….”
“제가 가겠습니다, 국장님.”
갑자기 민준이 김 국장의 말을 끊어내며 불쑥 끼어들었다. 김 국장이 말을 하다 말고 황당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에 당황한 건 인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오래 본 건 아니었지만 그라면 그런 시시한 일은 절대 하기 싫다고 거절할 것 같았는데, 순순히 가겠다고 대답하는 민준이 너무 의외였다.
“……요원을 한 명 보내달라고 했는데 조건이 있다.”
민준을 노려본 김 국장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뭡니까, 국장님.”
“여자 요원. 그것도 그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박인정을 지목했다. 박인정이 안 된다면 다른 여자 요원이라도 보내달라는 요청이다.”
그의 말에 민준이 잔뜩 인상을 구겼고, 김 국장은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만 해도 한국으로 다시 불러들였다고 그를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던 놈이 갑자기 이러는 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민준이는 남고 인정인 그만 나가 봐.”
미련이 남은 듯 잠시 머뭇거리던 인정이 김 국장에게 목례를 한 뒤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민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뭐야?”
“제가 왜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밖으로 다시 내보내 달라던 놈이 갑자기 웬 변덕이야?”
“……나갔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제가 또 나갑니까? 그리고, 국장님께서 이미 그건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민준은 김 국장의 시선을 피해 자연스럽게 왼손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괜히 손목시계를 위아래로 빙글빙글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영애 때문이냐?”
갑자기 민준이 행동을 멈추었다. 민준이 눈을 들어 김 국장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갈 수 있습니까?”
“…….”
당연히 정색하며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희망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을 보며 김 국장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키우는 동안 한 번도 무얼 사 달라 조른 적이 없던 민준이었다.
2년 전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던 민준의 모습이 떠올라 김 국장의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 해 봐.”
“…….”
김 국장의 말에 민준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싫으면 말고.”
“……됐습니다!”
기분이 상한 민준이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리 대전에서 출퇴근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얼마 전에 원자력연구원에서 비밀리에 팀을 하나 꾸렸더구나.”
“그렇습니까?”
민준은 관심이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안에서도 비공식적인 팀이고, 앞으로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팀이지.”
그제야 민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김 국장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라인업이 쟁쟁하다더구나. 최고 연구원들을 소집했어.”
“갑자기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영애가 그 안에 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강조국 연구원이 그 팀 안에 있다고 했다.”
“영애가 왜 그 팀에 있습니까?”
“조국 양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야. 영애라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재로서 말이다.”
말은 안 했지만 처음 이 보고를 받았을 때, 김 국장은 사실 영애가 그 팀에 들어간 게 아니라 어쩌면 영애를 중심으로 라인업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영애가 그 경력으로 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 팀을 짜는 데 영애가 꼭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김 국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더 흥미로운 건 NIS 요원의 영애 경호를 황 원장이 완곡하게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영애가 이번에 위험에 처했었고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우리 측에서 요원을 붙일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아주 난색을 표하더구나.”
“아무래도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게 마음 편하지는 않겠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긴. 이제 와서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긴 하지.”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김 국장이 허리를 뒤로 젖히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2년 전 되찾은 완성 파일은 파기되었고 관련 자료는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도 아니고…… 김 국장은 황 원장이 이 연구원들을 데리고 대체 무얼 하려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황 원장이 뭘 하든 김 국장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일이 2년 전처럼 대외적인 문제로 번질 여지가 생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경제적으로 수십 조의 가치가 넘는 초소형 원자로 연구가 핵 문제로 번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황 원장과 김 국장, 그리고 대통령이 나라를 생각하는 방식은 각자 달랐다.
황 원장은 과학자였고, 대통령은 정치가였으며, 김 국장은 대통령의 뜻에 따라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최우선시해야 하는 공무원이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민준이 시선을 들어 김 국장과 눈을 마주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의 확고한 표정에 김 국장이 혀를 찼다.
민준을 생각하면 그를 보내야 했지만, 솔직히 그를 더 이상 영애와 관계된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민준을 영애 옆에서 떨어트려 놓고 싶어 했던 대통령이, 그를 다시 영애 곁으로 보낸 걸 알게 되면 김 국장에게 뭐라 할지 눈앞에 훤했다.
“제가 갑니다, 아버지.”
민준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김 국장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저녁은 먹었냐?”
김 국장이 화제를 돌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대통령에게 한 소리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준이 아무 대답이 없자 김 국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녁 먹었냐고 물었다.”
“……아니요, 아직.”
“그럼 같이 간단히 저녁이나 먹고 들어갈까?”
“제가 아는 데가 있는데, 좀 멀긴 해도 거기로 가실래요?”
“그러지 뭐.”
김 국장은 시답지 않다는 말투로 대답을 하긴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얼른 양복 재킷을 걸쳐 입었다.
민준과 함께 국장실을 나가려던 김 국장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참, 병원은 다녀왔냐?”
“네, 아버지.”
“네가 진짜 병원에 다녀왔다고?”
“네.”
김 국장이 의아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안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잔소리를 하기 위해 물은 말이었다.
민준이 병원에 이미 다녀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민준이 지금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미소가 보기 좋아, 그는 민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늘 만난 아들은 요 근래 본 모습 중 가장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들의 표정 하나로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는 걸 보면 그도 부모인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김 국장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쯧. 자식이 뭔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됐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이 물으면 뭐라고 답을 할지는 일단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만큼은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을 다 잊고 그저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아버지이고만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