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49화 (49/94)

49화. 돌아온 경호관.2016.06.21.

“이미 이곳에 와보셨다고요?”

늦은 저녁, 두 사람은 중국집 북경의 창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민준은 그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강설과 아버지가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되물었다.

“네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너 어렸을 때 너하고도 같이 왔었다.”

“제가 아버지랑 같이 여길 왔었다고요?”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재권이도 함께였지만.”

“…….”

“기억 안 날 거야, 어렸을 때니까.”

민준은 처음 설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친아버지와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곳이 이곳인 줄은 몰랐다.

그가 설과 이곳에 왔을 때 왠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인호 박사님께도 내가 알려드렸다.”

“……그러셨어요?”

민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며 까만 면발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친아버지와 이인호 박사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그 뒤 상황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인호 박사가 민준에게 어떤 부채 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게 그 집을 주려고 했던 것일 테니 말이다.

민준이 설에게 그 집을 다시 돌려준 건 그녀에게 그 집이 소중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저 민준은 설이 그 집을 찾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국 양이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을요?”

“……아니다, 아무것도.”

그는 조국 양이 평창동 집 이야기를 꺼냈을 줄 알았는데, 민준의 표정을 보니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집 이야기를 하려면 이 박사님과 민준의 친아버지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해야 할 테니, 아무래도 그녀가 선뜻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제 많이 놀랐을 텐데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김 국장이 슬쩍 민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그의 무성의한 대답에 김 국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민준의 표정이 밝아 보여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는데 녀석이 영 속을 내보이지 않았다.

“요즘 영애한테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온다던데. 아무래도 영애의 혼기가 꽉 찼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김 국장의 기습적인 도발에 민준의 젓가락질이 허공에 잠시 멈추었다.

“……그래요?”

하지만 민준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젓가락질을 이어갔고, 김 국장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잘 웃지도 않고, 잘 울지도 않고 키우는 내내 어리광 한 번을 부리질 않았다.

재권이는 그래도 다정하고 살가운 성격이었는데…….

원래 그렇게 자랐어야 할 녀석을 그가 이렇게 키운 건 아닌 건지 싶어, 갑자기 김 국장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할머니가 안 계셔서 그런가, 옛날 맛이 아니네.”

이번에도 할머니를 못 뵈었다. 기력이 쇠하셔서 가게엔 가끔만 나오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그날은 아니었다.

주인 할머니가 지금 식당에 없다고 해서 맛이 특별하게 달라질 일은 없으련만, 김 국장은 허한 마음에 괜히 죄 없는 음식을 타박했다.

“맛있는데요, 왜요.”

“그래? 넌 괜찮아?”

“전 괜찮은데, 아버진 별로세요?”

“……아니.”

김 국장은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까만 면발을 잔뜩 들어 올려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다시 먹어보니 맛있는 것 같네.”

“다음엔 어머니하고 서연이도 같이 와요, 아버지.”

“그래. 그러자.”

김 국장은 민준을 보면 꼭 재권을 보는 것 같아 가끔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었다.

재권이 살아 있었더라면 괜찮다고, 이제 그만 잊으라고 말을 해 주었을 텐데.

민준에게 늘 괜찮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건 김 국장 자신이었다.

“그런데 저는 언제 내려가면 됩니까?”

민준이 김 국장을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누가 너 거기로 보내준대?”

“제가 가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

별말 없다가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내던지는 민준의 이런 성격은 친부인 재권보다 오히려 김 국장에게 더 가까웠다.

그는 왠지 흐뭇한 마음이 들어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 못 들었냐? 청와대에서 여자 요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니까?”

흐뭇한 건 흐뭇한 거고, 그래도 일은 일이었다.

대통령께서 여자 요원으로 보내 달라고 콕 집어 언급을 하셨는데도 민준을 보낸다면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도대체 뭐가 있겠는가.

“제가 제일 낫습니다. 이번 같은 일에 휘말리게 하지도 않을 거고요.”

“이유가 그게 다야?”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당연히 필요하지.”

대통령에게 보고가 들어가면 분명히 언짢아할 것이었다.

게다가 그냥 남자 요원도 아니고 민준을 보낸다면 김 국장에게 혹시 다른 욕심이 있는 건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었다.

“그럼 나머지 이유는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세요.”

“…….”

역시, 성격도 그냥 재권일 닮은 게 더 나았다.

**

다음 날 아침.

찰랑-

서연이 유리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시간이라 계산대 앞은 직장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서연은 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줄을 섰고 마침내 제 차례가 되자 씩씩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카페모카 한 잔이요! 생크림 아주아주 많이 주세요.”

“점심은 먹었어요?”

응?

서연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어깨가 보였고 시선을 좀 더 위로 올리자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우가 서연과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

“잘 지냈어요?”

“오늘도 또 일 보러 여기 오신 거예요?”

“요즘 들어 여기 들어올 일이 많네요.”

건우가 싱긋 웃더니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카페모카 두 잔 주세요. 하나는 생크림 아주아주 많이, 그리고 하나는 생크림 빼고.”

건우가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자 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건우를 쳐다보았다.

“저한테 오늘도 커피 사주시게요? 왜요?”

“아는 사람끼리 커피 한 잔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전 아저씨를 잘 모르는데요?”

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서른두 살밖에 안 된 사람한테 아저씨라니, 차라리 그냥 로미오라고 부르던가요.”

건우가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오늘 Boni에 들렀던 건우는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추어 1층 카페로 내려왔다.

오늘 오전 비서실장에게서 아버지가 건우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여전히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건우에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에 내려왔다.

그녀는 정말 인간 비타민이 맞는 건지 서연을 보자마자 그의 기분이 편안해졌다.

“흠…… 서른두 살 로미오 님. 혹시…….”

“혹시?”

“저 보러 일부러 여기에 오시는 거예요?”

서연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하하하하하.

건우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보러 온 거 아니냐는 말을 저렇게 대놓고 묻다니, 누가 김민준 여동생 아니랄까 봐 어쩜 저렇게 둘이 비슷한지 모르겠다.

“일부러 온 건 아닌데, 서연 씨를 만나니 정말 반갑긴 하네요.”

때마침 건우가 손에 쥐고 있던 차임벨이 울렸고, 건우와 서연은 자연스럽게 픽업대로 향했다.

“아저씨도 혹시 혈액형이 O형이에요?”

서연이 건우가 건네주는 컵을 받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봐도 저랑 같은 과 같아서요. 왜 남의 일에 참견하고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별로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요?”

“칭찬이 아니니까요.”

건우가 생각하기에 역시, 김민준 남매는 이상한 종족이었다.

“서연 씨 혈액형이 O형이에요?”

“네. 우리 엄마, 아빠, 저 이렇게 O형이에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난 B형이에요.”

“아저씨도 B형이에요? 와, 우리 오빠도 B형인데.”

“아, 그래…….”

피식 웃으며 컵을 입에 가져가던 건우가 행동을 멈추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아들이고 있었다.

“왜 저를 그렇게 쳐다봐요?”

“……아니요. 그냥.”

건우는 그녀가 김민준과 친남매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런데 서연이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충격이었다.

건우가 주변을 살피며 잠깐 화제를 돌렸다.

“날씨도 좋은데, 우리 밖에 나가서 마실까요?”

“좋아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회사 건물에서 그렇게 멀리 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맑은 공기를 쐬니 좋았다.

눈앞에 뿌옇게 껴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었다.

건우가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남매라는데 둘이 너무 안 닮았다 했어요. 그나저나 뜻하지 않게, 내가 서연 씨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네요.”

건우는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서연과 이복 남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김민준도 참 파란만장하게 사는구나 싶었다.

“이게 무슨 비밀이에요? 이건 그냥 사실이에요. 뭘 감추고 싶을 때나 그게 비밀이죠.”

서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민준이 친오빠가 아니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건 그녀가 중학생이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질 건 없었다. 잘생기고 멋진 오빠가 그녀의 오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사실은 민준이 아니라 그녀가 입양아가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그녀가 엄마를 너무 꼭 빼닮았다.

“카페에 내려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서연 씨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지네.”

“아저씬 오늘 기분이 안 좋았어요?”

“네, 안 좋았어요.”

“왜요?”

“음…… 아버지께서 날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난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아서?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사실이니까 나도 그냥 얘기해 주는 거예요.”

“아저씨는 왜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아요?”

“우리 아버지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고, 난 아직도 그걸 용서할 수가 없으니까요.”

“아저씨 그럼 설마, 지금 가출한 거예요?”

서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건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출하고 싶은데, 지금은 내가 집을 지켜야 하니까 가출은 당분간 보류.”

“그럼 혹시 아버지께서 가출하신 거예요??”

“그거랑 비슷한 건데 좀 달라요.”

“어떻게 달라요?”

“아버진 지금 교도소에 계시거든요.”

“…….”

“왜, 교도소라니까 무서워요?”

눈을 둥그렇게 뜬 서연을 바라보며 건우가 빙긋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남한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다니, 건우가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어쩐지 아저씨 머리 위에 까만 먹구름이 보이더라고요.”

“내가 그렇게 보였어요?”

“네. 그런데 아저씬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그래도 참 잘 자랐네요. 기특해요.”

서연이 손을 높이 올려 건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건우의 갈색 머리카락이 서연의 손 안에서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건우가 눈을 크게 뜨고 서연을 내려다보았다.

서연은 건우를 위로하고 있었고, 당황스럽게도 그는 순간 서연의 손길이 좀 더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자신을 깨달았다.

“아저씬 생일이 언제에요?”

“내 생일은 왜 물어요?”

“아저씨 생일 기억해 주려고요. 내가 케이크도 사줄게요, 생크림 되게 많은 걸로요.”

“…….”

“아, 혹시 여자 친구가 있어요?”

“아니요. 여자 친구는 없는데…….”

건우가 굳은 얼굴로 서연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럼 괜찮죠?”

“아니요.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서연 씨.”

건우가 입가에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 가방을 고쳐 들었다.

그는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신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서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난 또 아저씨가 나한테 관심이 있나 했죠. 그런데 다른 데 가서 똑같이 행동하면 안 돼요. 난 정말 아저씨가 나한테 작업 거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렇게 보였어요? 그랬다면 미안해요.”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열더니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건우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제 커피값이에요.”

“괜찮아요, 서연 씨.”

“우리 오빠가 모르는 사람한테 뭐 얻어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건우의 재킷 주머니 속으로 한사코 오천 원짜리 지폐를 밀어 넣었다.

건우가 당황한 얼굴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서연이 미련 없이 등을 돌리더니 로봇처럼 씩씩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며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린 라이트인 줄 알았는데, 주황색도 아니고 무려 레드였던 것이다.

에잇.

서연은 고개를 붕붕 흔들며 머릿속에 남은 건우의 잔상을 털어냈다.

그녀가 회전문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건우가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머리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은 침울했다.

**

NIS 국장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둘 다 대전으로 내려갈 거니까 준비하라고 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국장님.”

민준은 바로 옆에 인정을 세워두고도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 국장이 슬쩍 인정을 쳐다보았다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민준을 더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배려 없는 자식이었다.

“경호실에서 요청한 건 여자 요원이고, 박인정 혼자 보내기엔 불안하니 둘이 가라는 거 아냐.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너 대신 다른 놈 보낼 테니까.”

“…….”

“폐 끼치지 않을게요, 선배님.”

민준의 반응이 서운했던 인정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무리 미숙하다지만 바로 눈앞에서 잔뜩 인상을 구기고 서 있는 민준을 보니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나머지 진행 사항은 박 단장한테 듣고 인정인 그만 나가 봐.”

김 국장이 그녀에게 눈짓을 하자 인정은 그에게 목례를 한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왜 둘이나 내려갑니까?”

문이 닫히자마자 민준이 대뜸 물었다. 김 국장이 괜히 두 사람을 대전으로 내려 보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운치가 않아. 대전에 무슨 일이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원자력연구원에서 비밀리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김 국장이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황 원장이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청와대에서 알게 되었을 때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하겠다는 건 추후에 꽤나 골치 아픈 일로 번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과학자에겐 과학자로서의 입장이 있고 청와대는 대내외적인 정치적, 경제적 입장이라는 게 있다.

이렇게 애매한 입장 차로 인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 힘들 때 김 국장은 한 가지만 생각한다.

이 일이 나라의 안녕과 이익에 반하는 일인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민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에게 중요한 건 대전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잠은 잘 자고 있어?”

“그럼요.”

그러고 보니 강설한테 아직 어제 잘 잤다고 보고를 하지 못했다.

그는 얼른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민준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오후 1시 30분이었다.

“재권이한테는 다녀왔어?”

“오후에 잠깐 들르려고요.”

민준이 귀국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안 그래도 그는 오늘 오후쯤 친부모님이 계신 곳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박 단장한테 들렀다 가봐.”

“알겠습니다.”

민준이 김 국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최근 통화 목록의 가장 위에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수신자는 당연히 민들레였다.

-여보세요?

그녀의 밝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자 민준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야. 지금 바빠?”

-아니요. 이제 막 점심 먹고 연구실로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아마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 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죄다 바리톤이었다.

언짢네, 이거.

민준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젯밤엔 잘 잤어?”

-그럼요, 잘 잤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나도 잘 잤거든. 그것도 아주 잘.”

-그랬어요? 잘했어요.

후훗.

민준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복도를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나 이제 다 나은 것 같은데.”

-그럼 병원에서 증명서 떼어 와요.

쩝.

역시 강설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이봐, 강…….”

말을 이어가려던 민준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복도 끝에는 인정이 신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서 있었다.

“이따 전화할게.”

-그래요.

전화를 끊은 민준이 그녀 앞을 그대로 지나가자 인정이 얼른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선배님.”

“말해.”

“박 단장님께서 그러시는데 대전에 이미 경호관 숙소가 있대요. 근데 둘이 내려가니까 근처에 선배님께서 쓰실 숙소를 하나 더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 숙소.

“박인정.”

“네.”

웬일로 인정을 부르는 민준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친절했다.

인정은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민준을 바라보았다.

“대전에 지금 있는 숙소는 내가 사용할 거니까, 네가 새로 구해진 숙소에 묵도록 해.”

“네? 하지만 단장님께서 그건 제가 묵을 숙소라고 하셨는데요?”

“꼭 좋은 데로 구해달라고 해라.”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인정을 흘끔 쳐다본 민준이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설이 그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니 그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민준은 그녀가 처음엔 놀랐다가, 바로 그에게 달려와 안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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