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소용돌이 (3)2016.08.16.
난 몇 번째 물고기인가.
건우는 며칠째 연락이 없었고, 서연은 며칠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연은 건우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전화번호 말고는 연락 수단이 없는 사람도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진짜 연애를 해야겠어.”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오늘도 여전히 연락이 없는 건우를 보며 서연은 굳게 다짐했다.
“그 연애를 오늘 시작하는 건 아니겠지? 오늘 본부 회식인 거 잊지 마.”
서연이 고개를 들어 옆에 다가온 빈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은 그동안 무탈하게 회사를 다녀 한 계단 위로 올라간 자들을 축하하기 위한 승진자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알고 있어.”
“그런 뜻에서 이거나 마셔.”
빈우가 서연에게 손에 들고 있던 숙취해소 음료를 건넸지만,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난 이런 거 필요 없는 사람이야. 주량으로 승진했으면 내가 지금 대표이사야.”
팀장들이 심심했는지 그들끼리 오늘 마지막까지 생존자가 남아 있는 팀은 회식비가 면제라는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아직도 친절함이 유효한 김 팀장은 그녀에게 마케팅팀의 법인카드는 무척 소중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서연은 오늘만큼은 마케팅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인재였다.
“오늘 회식 장소에 부사장님도 오신다는데 괜히 취해서 윗사람한테 못 볼 꼴 보이지 말지?”
“부사장님이 오신다고?”
“백건우 부사장님 말이야.”
“아!”
어쩐지 건우의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부사장의 이름과 같았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서연에게 빈우가 고갯짓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기 김 팀장님, 지금 잔뜩 힘 준 거 안 보여?”
“팀장님이 왜 힘을 줘?”
“어제 부사장님하고 단둘이 저녁을 먹었대. 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어, 물론 소문의 근원지는 김 팀장님 본인이지만 말이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둘이 연애하나 보지.”
서연이 책상 위를 정리하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김 팀장이 그녀에게 부사장을 아느냐고 물었던 게 생각났다.
김 팀장님은 그때 나한테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그런 거였다면 내 리액션이 너무 부족했다.
어머,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팀장님께서 부사장님하고 잘 아시는 사이인 것 같은데요? 까르르르르, 정도는 말해 줬어야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연기 연습을 더 해야겠어.”
서연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빈우가 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회식 장소는 회사 가까운 한우집이었다.
삼겹살집도 아니고 한우집이라니, 그녀가 마케팅팀의 법인카드를 지켜야 할 목적의식이 더욱 뚜렷해졌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길게 연결되어 있는 테이블이 보였고, 그 위에 찬과 수저가 세팅되어 있었다.
팀장급 이상 테이블은 따로 떨어져 준비되어 있었으며 서연은 막내답게 길쭉한 테이블 가장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 팀장은 본부장과 부사장을 모시고 나중에 합류할 예정이라고 했다.
잠시 후 초록색 병이 테이블 위에 군데군데 놓이자 사람들은 오른손으로는 고기를 집어 먹으며 왼손으로는 빠르게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으로 들어가는 게 고기인지 소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패잔병들이 하나둘씩 속출하기 시작했지만, 서연은 여전히 고기와 소주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어? 부사장님, 본부장님 오셨다.”
고기를 먹을까 소주를 마실까 고민하고 있던 서연의 귀에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직원들이 일제히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과 소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연도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다들 앉으세요.”
“…….”
그녀는 직원들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네는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눈에 건우가 보였다. 건우가 본부장과 김 팀장을 그의 좌우로 두고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서연은 건우를 바라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진짜 건우인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는 장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포지션의 그를 만나니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서연 씨, 그만 앉아도 돼요.”
김 팀장이 건우 옆에 앉으며 저만치 멀뚱히 혼자 서 있는 서연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건우가 흘끔 서연을 쳐다보더니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무심하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서연이 로봇처럼 뻣뻣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나는 물고기도 아니었나.
“자, 다들 잔을 높이 들고!”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각자의 앞에 놓인 잔을 일제히 높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부사장 건우의 건배사가 있었다.
“백건우입니다. 오늘 커피사업부 승진자 회식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이 불편할 줄 알면서도 잠깐 들렀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멍하게 앉아 있는 서연을 팔꿈치로 툭 건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김 주임.”
“아.”
그녀만이 잔을 들지 않고 있었다.
서연은 얼른 술잔을 들고 안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액체에 서연의 얼굴이 비춰 보였다. 물고기도 아닌데, 서연은 물속에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잠겨 있었다.
“위하여!”
직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제창을 하며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서연은 술잔을 비워낸 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술잔을 들고 상급자를 찾아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고, 서연의 옆에는 야망이 없어 보이는 빈우가 다가와 앉았다.
“서연아.”
“응.”
“적당히 마시다가 윗분들 가시면 너도 빠져.”
“안 돼, 난 오늘 소중한 존재야.”
서연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녀는 잠시 후 있을 술잔 파도타기를 위해 속을 열심히 채워야 했다. 그러나 계속 고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어도 허전한 속은 채워지지 않았다.
서연은 왜 위가 자꾸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야, 그만 먹어! 너 배탈 나.”
고기를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는 서연을 보다 못한 빈우가, 젓가락의 진로를 방해하며 인상을 썼다.
“난 배탈 안 나.”
그녀가 기억하는 한 살아오면서 배탈이 난 적은, 어렸을 때 아빠가 밤늦게 들고 온 생일 케이크를 꾸역꾸역 먹고 탈이 났던 딱 한 번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프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열이 잘 오르는 허약한 체질이 아니었다.
서연은 자신이 아프면 아빠가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게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뜨거운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달려가서 이마를 만져보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라도 서연은 아빠가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매번 확인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서연이 방바닥에 이마를 대지 않아도 언제나 같은 온도의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대망의 술잔 파도타기가 시작되었지만 건우는 집에 가지 않았다.
건우가 가지 않았기에 본부장도 자리를 지켰고 팀장들도 자리를 지켰다.
일찍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사람들은 술잔을 손에 들고 하나둘씩 고개를 밑으로 떨구었다.
더러는 찬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고, 더러는 벽에 기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먹으며 술잔을 비워내는 사람은 서연밖에 없었다.
“이모, 여기 고기 더 주세요!”
테이블에 고기를 추가하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
술잔 비우기 토너먼트가 급물살을 탔다. 살아남은 자들은 몇 되지 않았고, 그중엔 당연히 서연이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테이블 한쪽에 모여 앉았다. 서연이 고개를 돌리면 건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과 가까운 곳이었다.
“술 잘 마시네요?”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건우의 목소리는 맞았다. 며칠 만에 듣는 건우의 목소리였다.
서연이 고개를 돌려 건우와 시선을 마주치자 그에게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건우는 시선을 내려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었다. 서연의 무심함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테이블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술병이 비워지자, 서연이 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오늘은 그만 마십시다. 다들 많이 취했는데, 내일 출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건우가 서연의 말을 자르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비서실장에게 건넸다.
카드가 건네지는 걸 본 서연이 김 팀장을 바라보았다. 김 팀장은 건우를 향해 몸을 반쯤 틀고 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부부처럼 보일 법도 했다.
“팀장님, 그럼 우리가 이긴 거예요?”
“어머, 김 주임.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직원들끼리 무슨 내기를 했습니까?”
“그냥 재미있으라고 농담한 건데, 진짜로 믿었나 봐요.”
“…….”
서연은 까르르 웃는 김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술잔을 거꾸로 뒤집었다.
방금 전까지 허전했던 속이 이제는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민준이 보고 싶었다. 만약 오빠가 이 모습을 봤다면 김 팀장을 혼내 줬을 게 분명했다.
부사장이 눈치 없이 앉아 있던 술자리가 마침내 끝났다.
건우가 먼저 사라져야 나머지 직원들도 집에 갈 수 있기에,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비서실장의 차에 올랐다.
부사장이 사라지고 나자 사람들은 직급 순서대로 차례차례 사라졌다.
서연은 빈우와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서연은 그제야 버스 정류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빈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서연의 팔을 붙들었다.
“버스 타고 가려고?”
“응.”
“내가 집에 가는 길에 내려 줄게.”
“아니야, 나는 너의 물고기가 아니잖아.”
“이씨,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더니 취한 거야?”
“난 취하지 않았어, 로미오. 그러니 너는 가던 길 가. 이쪽 길이 아니잖아.”
서연은 빈우에게 손을 흔든 후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들의 간판 불이 하나씩 차례차례 꺼지는 게 보였다.
거리를 걷던 서연은 케이크 전문점을 발견하고서는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녀는 유리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케이크를 보자 건우 생각이 났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온다더니 그날이 오늘이었다.
서연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까만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늦은 밤, 민준은 오늘도 Pakin 물류창고를 향해 조용히 차를 몰았다.
그 트럭은 며칠째 한 장소에 머물고 있었고, 민준은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게 있었다.
트럭이 아직 이곳에 있으니 관련이 있는 누군가는 분명 이곳에 나타날 거라 생각했는데, 며칠째 주변은 잠잠했다.
그는 물류창고 앞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고 정면을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기에 그는 완벽한 어둠 속에 잠길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익숙한 자동차가 어둠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정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다 어둡게 짙어졌다.
설이 자동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장 연구동 앞으로 가 리더기에 출입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강조국.”
민준이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가 Pakin과 공동으로 개발한다고 말했던 일이 이 일인 것 같았다. 상황은 그가 가장 나쁘다고 생각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무거운 침묵 속에 정면을 응시하던 민준의 시야에 또 다른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눈에 익숙한 자동차였다.
잠시 후 운전석 문을 열고 인정이 내렸다. 차에서 내린 인정은 주변을 살펴보다 잠겨 있는 연구동 출입문을 가볍게 흔들었다.
인정이 굳은 얼굴로 다시 자동차 안으로 돌아가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인정…….”
민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인정은 민준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설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아마 지금 그녀가 통화를 하는 사람이 아마 그 대상일 터였다.
민준은 그런 인정을 지켜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예전에 설을 감시하던 안기영이 백 회장에게 전화를 걸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녀가 전화를 끊은 걸 확인한 후, 그는 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배님?
전화를 받는 그녀는 무척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늦은 밤에 미안한데 지금 바쁜가?”
-아니요…… 그렇게 바쁘진 않은데, 무슨 일이세요? 혹시 급한 일이세요?
“별일 없으면 좀 내려오지 그래.”
-저기 선배님…… 한 30분 정도만 있다가 내려가면 안 될까요?
“그래, 기다릴게.”
전화를 끊은 인정이 초조한 기색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서둘러 시동을 걸고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민준은 자동차에서 내려 Pakin 연구동 입구에 다가가 굳게 잠긴 문을 흔들어 보았다.
설이 출입카드를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녀가 이곳에 오늘 처음 온 건 아니었다.
도대체 그녀는 이렇게 늦은 밤에 Pakin 연구동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파일을 복구했다면 그다음으로는 무엇을 할까, 진짜로 만들 수 있는지 실험을 하고 싶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거기까지다. 하지만 그러려면 눈에 띄지 않는 실험실이 있어야 하고 실험 장비가 있어야 하며 우라늄이 있어야겠지.’
“…….”
이곳에 Pakin 연구동이 있고 그녀가 꾸준히 이곳을 방문했다면 이 안에 아마 실험 장비도 있을 것이며, Le blanc이 시추탐사라는 명목으로 채취해 낸 우라늄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우라늄 광산엔 대부분 저품위광인 우라늄만 묻혀 있다는 말이 100% 사실은 아니라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민준이 연구동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 후 자동차를 몰고 사라졌다.
**
잠시 후 민준의 오피스텔에 내려온 인정은 그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 가슴이 두근거렸던 인정과는 달리 민준은 그녀가 처음 보는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민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박인정이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은 뭐지?”
“영애 님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것 말고 또 있나?”
“……없습니다, 선배님.”
“없어?”
“네,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물어보시려고 이 시간에 절 보자고 하신 거예요?”
인정이 민준의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돌렸다.
“그럼 혹시 밤에 아르바이트하나?”
“아, 그건…….”
인정의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민준이 말을 이었다.
“박인정, 널 보면 난 가끔 누가 생각이 나. 물론 아련한 첫사랑은 아니야.”
“…….”
“그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지. 난 네가 그 사람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길 바라지 않아. 그리고 난 너를 후배로서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고 잘못된 길을 가지 않게 해야 할 의무가 있어.”
“선배님은 꼭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건 아니야?”
“아니에요!”
인정이 억울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민준의 어조가 한층 누그러졌다.
“네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를 기억해. 너는 영애 님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거고, 그 일만 잘해내도 훌륭한 거니까.”
“선배님이 저한테 할 말은 그게 전부예요?”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냥 널 믿기로 했어.”
“그럼 이제 제가 물어봐도 돼요?”
“아니, 묻지 마.”
“……그럼, 선배님한테 고백해도 돼요?”
“그것도 안 돼.”
인정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민준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고백도 하면 안 되고 묻지도 말아야 한다면 선배님도 절 믿지 마세요.”
인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설과 마주쳤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설은 깜짝 놀라며 울고 있는 인정을 바라보았다.
“인정 씨……? 인정 씨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설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마주치기에는 너무 늦은 밤이었다.
인정은 눈물을 재빨리 닦은 후 날선 눈으로 설을 응시했다.
“영애 님께서는 이렇게 밤늦게 혼자 바깥출입을 하셨나 보네요?”
“그럴 일이 있었어요.”
“그러시겠죠.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책임은 영애 님이 아니라 저희가 지는 거니까 아무 상관 없으시겠고요.”
“인정 씨.”
감정이 격양된 인정이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영애 님께서는 개인적인 시간을 달라고 말씀하셨고 저희는 그 부탁을 최대한 들어 드렸어요. 그러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영애 님 탓이 아니니까 영애 님은 속이 편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영애 님께서도 저희들의 입장을 좀 생각해 주실 순 없으신가요?”
“제가 어떻게 하는 게 두 분의 입장을 생각해드리는 건가요? 만약 인정 씨가 제 옆에 없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할 일도 없겠지요. 그러니 말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두 분을 안 볼 수 있나요?”
“…….”
“제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아빠, 저 두 사람 좀 치워주세요. 라고 애교라도 부릴까요? 아니면 경호실장님께 경호실이 얼마나 무력하면 영애의 경호를 NIS에 뺏긴 거냐고 항의라도 해야 될까요?”
설이 단호한 얼굴로 냉랭하게 말하자, 인정이 불쾌하고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영애 님은, 저나 선배가 영애 님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겪게 되어도 무관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건 영애 님과 상관없는 저희만의 문제가 맞네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라도 선배를 보호해야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기적이라고 믿고 있는 게 기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상처받을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부터는 선배가 아니라 제가 영애 님 곁에 있겠습니다.”
인정이 설에게 목례를 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인정이 남기고 간 말을 되새겼다.
띠디-
전자음 소리가 들렸고 702호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민준이 문을 반쯤 열고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이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설은 그녀 자신이 모든 걸 버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고 자문했다.
버려야 하는 게 부와 명예 같은 거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그녀가 앞으로도 해나가야 할 그녀의 일과 미래라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야옹이.”
“…….”
민준이 조용히 입술을 움직여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자 민준이 검지를 안쪽으로 까딱거렸다.
“이리 와.”
“……당신이 오면 되잖아요.”
“당신이 오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
“그대로 뒤돌아서 가면 나 울지도 몰라.”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설을 바라보며 민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지못한 설이 터벅터벅 걸어 민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려는 순간 민준이 설을 양팔로 안고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우리 영애 님은 좀 곱게 살면 안 되나.”
민준이 농담처럼 중얼거렸지만 설은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안 되나 보네.”
“…….”
‘미안해요.’
설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에게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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