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66화 (66/94)

66화. 틀린 게 아니야2016.08.18.

‘우리 영애 님은 좀 곱게 살면 안 되나.’

설은 어젯밤 민준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분명 그녀의 밤 외출과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의 귓가에 나직하게 뱉어내던 그의 한숨은 매우 무거웠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설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 불빛이 반짝이는 걸 보고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일어나면 이쪽으로 건너왔으면 좋겠는데. 할 얘기가 있어.

“…….”

그녀는 핸드폰에서 민준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민준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알 수 있었다.

어젯밤 인정과 나누었던 불편한 대화와 그의 혼잣말을 종합해보니 민준이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강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녀가 702호로 건너갔을 때 민준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여유 있는 그의 태도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건 그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커피 마실래?”

그는 머신기에서 커피를 내리며 그녀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민준은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고, 커피를 마시는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침묵이 불편했던 설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잠을 못 잤어요?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어요.”

“잘 못 잤어. 그래서 피곤해.”

“왜요?”

“강조국한테 묻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거 생각하느라고.”

“…….”

설은 대답 대신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그녀가 얼버무리고 숨길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난 듯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문제는 민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였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물어보면 되잖아요.”

“묻기 전에 당신한테 미리 해둘 말이 있어.”

“무슨 말을요?”

설이 시선을 들어 민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차가워 보였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애틋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잊지 말라고.”

“그 무슨 일이라는 게 혹시 당신이 내게 묻고 싶은 말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맞아. 그러니 내가 묻는 말에 당신이 좋아하는 솔직함을 얹어서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알고 싶은 건 2년 전에 없앤 파일을 당신이 다시 복구했냐는 거야.”

그의 물음에 설은 시선을 내리고 잠시 침묵했다.

민준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그녀에게 묻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에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민준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난 지금 이 박사님의 파일 얘기를 하고 있어. 그 파일을 없애야 했던 이유를 충분히 들었을 텐데 당신은 왜 그걸 다시 복구한 거지?”

민준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설의 표정만 봐도 그의 말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반쯤 체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나를 조사하고 있었던 거네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당신은 그래서 파일을 어디까지 복구한 거지?”

“할아버지의 초소형 원자로는 우리나라 원자력 에너지 절감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이었어요. 그리고 난 그걸 그대로 사장시키기 아까웠을 뿐이고요.”

“그게 전부라고?”

“네, 전부예요.”

“아니잖아.”

“…….”

물론 그게 사실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단순히 파일을 복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할아버지의 연구보다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으며, 연구원들과 함께 비밀 실험을 거듭하며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설은 파일을 그녀에게 남겨놓으셨던 할아버지의 뜻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민감하고 위험한 문제였지만 그녀에겐 할아버지께서 끝내지 못한 연구의 매듭을 지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 파일은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선 안 돼, 당신도 그 이유를 모르진 않을 텐데.”

“그래요, 나도 그 얘긴 들었어요. 그 파일을 찾기 위해 여러 명이 죽고 다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면 안 되는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말이죠. 한때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 파일을 정부에서 어떻게 처리하든 그건 당신이 전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그는 단호한 어조로 그녀를 나무라고 있었다.

“왜 우리에게 상관할 권리가 없다는 거죠? 당신들은 목적에 따라 그 필요성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니에요. 우리에게 그건 그저 오랜 연구의 결과물일 뿐이라고요.”

“그래 좋아, 그래서 당신이 그 파일을 다시 복구했다고 해. 그럼 그다음, 당신이 지금 백건우와 벌이고 있는 일은 도대체 뭐지?”

당황한 설은 입을 다물었다. 민준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지금 당신이 우라늄 광산에서 채굴한 광석을 가지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묻고 있는 거야.”

“난 도대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Pakin 물류창고 연구동.”

“…….”

“더 얘기해야 돼?”

“……난 그저, 할아버지의 연구를 완성하고 싶을 뿐이에요.”

마침내 설은 얕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무작정 부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건 우리나라를 정치,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트릴 수 있는 상당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야.”

“그럼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해야 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만약 내 입장이었다면 아,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니 당연히 없애야지, 하고 순순히 수긍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민준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는 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정색을 하니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 일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생각해 봤어? 단순히 관련자 몇 명이 징계만 먹고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설마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필요한 조건이 이렇게 다 갖추어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난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뿐이에요.”

원자력연구원의 의지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건우가 위험을 감수하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돕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조건이 갖춰진 지금,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실험을 완성하고 끝내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민준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장 중지해. 감성적인 이유 말고 이성적인 이유로 난 당신한테 동의할 수 없어. 만약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알게 된다면 두 번째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나도 만일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각오도 하고 있고요.”

설이 민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초에 그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와 그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이 일에 관여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가 그녀 때문에 위험에 빠졌던 아찔한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 책임이라는 게 설마 단순히 연구원 파직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이번 일에 책임을 담당한 사람들은 누구지? 황 원장, 당신, 그리고 백건우. 여기에 다른 누가 또 있어?”

“다른 사람 일은 몰라요.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얘기만 해요.”

“당신은 영애라는 보호막이 어디까지 작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당신은 입장이 달라.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휘둘리게 될 거야. 당장 대통령 각하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시겠지.”

“……알아요.”

머그잔에 남아 있는 커피가 서서히 식어갔다. 설은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는 까만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완성이 코앞이었다. 실험을 완성하고 나면 바로 실험 장비를 해체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잠시 멈추었다가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멈춰 버리면 두 번 다시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잠시만 모른 척해달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민준에게 책임이 가게 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하던 일을 중지하고 정리하는 데 당신한테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내가 지금 그만두면 당신은 없었던 일로 덮고 가겠다는 건가요?”

설이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상 민준은 그녀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이렇게 또 그에게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다.

“아니, 지금 중지시켜 사태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거야. 원자력연구원과 백건우가 무슨 일을 얼마나 어떻게 했는지는 추후에 있을 조사 과정에서 밝혀지겠지,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은 각자 지게 될 테고 말이야.”

“그렇군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민준이 굳은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차분히 응시했다.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난 끝났어요.”

“강조국.”

“난 일과 당신을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도, 나와 당신의 일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하거나 그것 때문에 곤란해하진 말아요. 진심이에요.”

설은 조용히 그의 곁을 지나 밖으로 나갔고 민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렇기에 파장이 어디까지 미치게 될지 예측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나도 선택 같은 건 안 해, 야옹이.”

민준이 쯧, 혀를 찬 뒤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

딩동-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건우가 핸드폰을 들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놀랍게도 민준이었다.

-김민준입니다. 만나고 싶으니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약속 잡아 주십시오. 오늘이면 더 좋습니다.

건우의 눈이 둥그레졌다. 두 사람이 서로 문자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

건우는 혹시 서연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녀가 이제 와서 민준에게 그의 이야기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백 회장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그는 서연에게 일절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민준이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그녀의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오늘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저녁 6시경 회사로 가겠습니다.

건우가 민준에게 문자를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후, 시간을 확인한 건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를 본 비서실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건우는 앉으라는 듯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었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녀는 점심을 먹고 1층 카페로 올 터였다.

건우는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당분간 연락하지 못하더라도 오해는 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1층 카페에 내려온 그는 커피 한 잔을 시키고 테이블 앞에 앉아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새 그의 얼굴이 직원들에게 알려졌는지 건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고요히 떠 있는 섬처럼 홀로 앉아 있었다.

그때, 찰랑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렸고 서연이 활짝 웃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익은 직원과 함께였다.

“카페모카 생크림 아주 많이 주세요, 빈우 씨는?”

“같은 걸로, 전 더 많이 주세요.”

“그래도 소용없어, 우리 직원 언니는 아주 공정하고 정확하거든. 빈우 씨라고 해서 더 많이 줄 리가 없어.”

“내가 먹을 게 아니라 너 주려고 그런다. 나눔과 배려가 워낙에 몸에 배어 있어서 말이야.”

“진짜 나한테 주려고?”

“어. 그러니까 내 것까지 많이 먹고 쑥쑥 자라라, 줄리엣.”

빈우가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었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건우는 순간 가슴에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손에 잡고 있던 커피 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서연과 눈이 마주치길 바라며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건 서연이 아니라 남자 직원이었다.

“아, 부사장님.”

픽업대에서 음료를 받아들고 고개를 돌리던 빈우의 시선이 건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다른 직원들은 건우를 보고도 못 본 척 멀리 돌아 나갔는데 빈우는 그럴 수 없었다.

부사장이 그와 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우는 어쩔 수 없이 건우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서연도 건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건우는 서연을 쳐다보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커피…… 마시러 왔나 봐요?”

“네, 부사장님.”

빈우는 부사장의 질문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선 채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임원들은 보통 1층 카페가 아니라 자신의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기 때문에, 빈우는 이곳에서 부사장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부사장의 얼굴을 몰랐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지난번 회식 이후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날은 집에 잘 들어갔습니까?”

“네, 덕분에 잘 들어갔습니다.”

“숙취는 없었어요? 많이 마신 것 같던데요.”

“없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잘 마신다고 자만하지도 말고요.”

“네…… 알겠습니다.”

빈우는 어째 부사장의 질문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상대니만큼 그는 부사장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연극 준비는 잘되고 있어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그날 연극을 보러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부사장님.”

그를 앞에 세워두고 갑자기 연극 얘기라니, 정말 뜬금이 없었지만 빈우는 속마음을 내색하진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한다고 들었는데 연극의 엔딩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내게 미리 알려줄 수 있나요?”

“네? 연극의 엔딩…… 말씀입니까?”

“네.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

빈우는 문득 부사장이 그동안 회사에 두문불출했던 이유가 혹시 정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예전에 사랑을 잃고 힘들어했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부사장은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이상해 보였다.

“그게…… 아무래도 애들이 보는 거라 원작의 엔딩은 좀 잔인하다고 해서…… 일단 둘 다 죽지는 않습니다.”

“그럼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떻게 됩니까? 두 사람은 해피엔딩입니까?”

“…….”

“아니면 헤어지나요?”

빈우는 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로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그 자신이 뭔가 단단히 잘못한 게 있어 부사장이 트집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사장에게 특별히 실수한 일이 없었다.

빈우가 잠깐 넋을 놓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사장의 시선이 그가 아닌 서연을 향해 있었다.

서연은 떨리지도 않은지 손에 커피를 든 채 건우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대충 대답하고 얼른 올라가자.’

빈우가 눈빛으로 서연에게 빨리 대답할 것을 종용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보여줄 수는 없으니 섣불리 해피엔딩이라고 말을 할 순 없지만, 연극은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걸로 끝날 것 같아요.”

“주인공들이 죽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니 다행이네요.”

건우는 서연과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Pakin의 아들이 아닌 척 연극을 하는 동안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건우가 서연에게 보여준 연극에는 아버지인 백 회장도, 백 회장 때문에 죽을 뻔한 민준도, 그가 예전에 사랑했던 강설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행복할 수 있었던 거였다.

“……그만 올라가 봐요.”

건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건우는 서연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범한 줄리엣 같으니라고! 부사장님이 코앞에 있는데 너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냐? 그나저나 부사장님은 저기서 약속이 있으신가? 아직도 혼자 계시네.”

빈우가 뒤를 흘끔 돌아보다 부사장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하지만 서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의 상승 버튼을 눌렀다.

“아마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넌 좀,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 주면 안 될까?”

“저기서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나를.’

건우는 아마 그녀를 기다렸을 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우연을 핑계로 그녀를 만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 항상 그 선 너머에서만 그녀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연에게 다가오길 망설였던 이유가 고작 그가 Boni 부사장이기 때문이었다니 너무 시시했다.

그는 서연과 놀고는 싶고, 진지한 관계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그나마 그가 그녀를 호텔로 데려가지 않고 레스토랑이나 카페만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람이 사랑의 상처가 너무 크면 저렇게 되는 걸까? 네 생각은 어때, 줄리엣?”

“그 소문 너무 믿지 마. 직접 본 것도 믿을 수 없는 게 태반인데 보지 못한 것까지 다 믿을 수는 없잖아.”

서연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빈우에게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우리 부사장님은 사내 연애를 참 좋아해. 이번엔 김 팀장님인 거지? 그래도 이번엔 옛날과 달리 강제 이별 코스를 밞진 않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김 팀장님이 대표이사 딸이잖아. 게다가 김 팀장님 외가 배경도 꽤 좋다던데, 그 정도면 Pakin에서 갈라놓을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그 정도는 돼야 사람들 앞에서 만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커트라인을 몰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기분이 지금 아주 별로라는 뜻이야.”

서연은 빨대를 입에 물고,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건우는 서연을 사랑하진 않았고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아니었으니 그가 그녀를 배신한 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우가 누구를 만나 연애를 하든 서연이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로잘린도, 줄리엣도 아닌 나는 그에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서연은 문득 건우가 많이 사랑했다는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건우의 커트라인에 미치지 못했는데도 그가 사람들 앞에서 사랑했던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선을 긋지 않고 사랑하는 모습은 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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