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73화 (73/94)

73화. 영부인을 만나다2016.09.13.

대통령은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서류를 바라보며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하나는 그가 민준에 대해 알아보라 지시한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창동 집에 관한 거였다.

공교롭게도 두 개의 서류 모두 민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으며, 민준에 관한 보고서 안에는 김 국장과 민준의 친부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 언급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은 대통령은 김 국장이 민준의 친부에게 느꼈을 ‘죄책감’에 대해 생각했다.

장인어른 또한 평창동 집을 민준에게 증여할 정도로 마음의 빚을 가지고 계셨다는 건 그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대통령은 김 국장을 직접 불러 물어보기 뭣해 일부러 다른 루트로 알아보았지만 이쯤 되니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심전심인지, 김 국장은 마침 그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 청와대로 들어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대통령은 시선을 들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 국장을 쳐다보았다.

“청와대 출입이 잦습니다. 내가 자리를 하나 마련할 테니 아예 이곳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통령은 농담을 던지며 김 국장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한 뒤 테이블에 앉았다.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고 전화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 나를 찾아온 겁니까, 김 국장.”

“영애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각하.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무래도 전화로 보고를 드리는 것보다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대통령은 찌푸린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제 김 국장한테서 영애의 영자만 들어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그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골치가 아팠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정황상 Pakin 연구동에서 우라늄 농축 실험을 한 게 확실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각국 정보 요원들이 있기 때문에 꼬리를 밟히는 건 시간문제인데, 자칫하다간 황 원장뿐 아니라 영애까지 그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큽니다. 관련자들이 드러나게 될 경우 그들은 저번 사건과 공통분모인 영애를 허투루 여기진 않을 겁니다.”

안하무인인 북한은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핵실험을 계속하고 있었고, 핵무장을 시도하려는 이란에서는 핵물리학자들이 연달아 피살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국이 핵과 관련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면 그보다 더 난감한 일은 없을 터였다.

“문제의 여지가 될 만한 건 모두 없앴습니까?”

“결과적으론 그렇습니다, 각하. 저희가 조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이 모두 사라졌으니까요.”

“그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일과 관련해서, 현재 김민준 요원이 징계를 받고 직무 정지 중입니다.”

대통령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민준은 아마 영애를 지키기 위해 항명을 한 것이었을 터였다.

대통령이 민준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조국이 위험한 순간에는 늘 그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항상 조국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저번의 레스토랑 관련 사건에서도 그녀를 구한 건 민준이었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민준이 훌륭한 요원인 건 사실이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가 조국의 안전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도 민준뿐이었다.

“복직시켜 영애의 경호를 맡기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각하.”

김 국장의 단호한 음성에 놀란 대통령이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김 국장?”

“김민준 요원이 영애의 경호를 맡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경호 대상에게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원은 임무에 부적합합니다. 믿을 만한 다른 요원으로 배치하겠습니다.”

김 국장의 반응에 대통령은 속으로 당황했다.

민준이 조국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김 국장이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며 반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김 국장이 조국 옆에 일부러 민준을 붙여놓았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내색하지 않고 김 국장에게 물었다.

“그 결정에 김 국장의 사심이 들어 있습니까?”

“있습니다, 각하. 전 제 아들이 매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게 부모로서 걱정이 됩니다. 영애에겐 민준이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

이건 대통령이 우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김 국장의 말은 위험한 상황인 영애 옆에 더 이상 민준을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고, 그가 영애와 엮일까 봐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내 장인어른을 경호하다 사망한 김민준 요원의 친부 때문에 그런 겁니까?”

“아니라고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저도 각하처럼 제 아들의 인생을 걱정하는 아버지니까요.”

“……당황스럽군요.”

“죄송합니다, 각하.”

김 국장은 대통령이 언짢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애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민준이 안타까웠다.

김 국장은 그런 민준이 영애의 곁에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대통령에게 그 역시 영애를 민준의 짝으로 맺어주고 싶진 않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싶었다.

영애가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안 이상, 그런 영애를 지켜야 하는 무거운 짐을 민준이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장인어른께서 평창동 집을 김민준 요원에게 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왜 지금 조국의 소유가 되어 있습니까?”

“민준이 이탈리아로 가기 전 영애 모르게 그 집을 전해주라고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전 그때 아들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집을 그냥 그렇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야당에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삼을 수 있으니 이제라도 그 집에 대해 적당한 가격을 치르겠습니다.”

“그건 제가 가타부타 말씀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각하께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시선을 내리며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조국이 벌여놓은 일도 큰 문제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조국을 완전히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붙이는 건 김 국장이 반대를 하고 있었고, 이제 와 그에게 무조건 대통령의 뜻에 따르라 말하기엔 면목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영애의 경호에 관한 건 김 국장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원자력연구원에 대한 조사는 이쯤에서 조용히 마무리합시다. 우리가 굳이 시끄럽게 들쑤셔서 남의 이목을 끌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무리하자는 뜻입니까, 아니면 보호를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김 국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에게 물었다.

대통령이 이쯤에서 덮자는 게 영애를 생각해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의 뜻이 국가 간 대외적인 관계 유지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북한은 파키스탄의 전철을 그대로 따를 건가 봅니다. 그리고 미국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나는 나의 결정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게 될지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김 국장한테 해줄 말이 없어요.”

북한이 핵보유국 선언을 했다.

휴전 상태인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보유했다는 건 남한에겐 분명 위협적인 일이었고, 현재 우호적인 한미 관계도 미국의 대선 결과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 안심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난 아버지로서 시키지 않은 일만 골라서 하는 딸이 걱정됩니다. 물론 딸아이는 이런 아비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아마 조국 양이 작고하신 이 박사님을 많이 닮았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조국은 자라는 동안 부모인 우리보다 장인어른을 더 많이 따랐지요. 애가 자라는 동안 내가 너무 바빠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버렸습니다. 딸아이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 아이와 나 사이엔 분명 거리감이 있지요.”

“…….”

김 국장은 대통령의 말을 들으며 서연을 떠올렸다.

바빠서 평소엔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살지만, 가끔 얼굴을 볼 때면 늘 잘 지낸다고 방긋방긋 웃는 서연을 말이다.

며칠 전 언뜻 보았을 때 분명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도 서연은 그에게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김 국장은 서연이 정말 괜찮은 건지 한 번 더 물어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대통령이 굳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빠른 시일 안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일은 잊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각하.”

대통령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김 국장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뜻을 전했다.

주변 상황이 이러한데 조국은 그에게 청와대를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청와대를 나가 조용히 지내겠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조국의 말이, 나가서 조용히 다른 일을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김 국장이 집무실을 빠져나간 이후에도 대통령은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대통령의 모습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

대낮인데도 겨울이 코앞이라 그런지 날씨가 무척 쌀쌀했다.

다행히 영빈관 앞마당의 하얀 천막 사이사이로 열풍기가 세워져 있어 천막 안은 꽤 포근한 편이었다.

청와대 직원들과 같은 모양의 셔츠를 입고 느지막이 이곳에 나온 설은 곁눈질로 주변을 슬쩍슬쩍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영빈관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도 정해줄걸 그랬나.”

설은 불안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진열되어 있는 그녀의 물건을 흘끔 쳐다보았다.

청와대 식구들은 바자회에 많은 물품을 기증했고 그녀와 영부인, 그리고 대통령도 바자회에 여러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설은 그녀가 내놓은 물건들 중 한 가지만은 민준이 오기 전에 팔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놓은 물건이 안 팔릴까 봐 걱정이 되는 거니?”

영부인이 테이블을 보고 있던 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비서관들이 일제히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영부인과 마찬가지로 가슴에 사랑의 바자회라고 써진 긴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영애 님, 걱정 마세요. 어떤 건지 살짝 알려주시면 저희가 사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

설은 그들을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은 후 그녀 앞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러니까요.”

영부인의 혼잣말에 설이 무심코 대답을 하자, 영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니? 혹시 친구를 초대한 거야?”

“네.”

“누구를?”

“이따 오면 소개시켜 드릴게요.”

설은 발꿈치를 들고 시선을 멀리 던지며 또다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도 민준이 보이지 않았기에 시무룩해진 설은 또다시 그녀의 애장품인 지푸라기 인형을 힐끗 쳐다보았다.

바자회 준비를 핑계로 청와대 밖으로 나가 어렵게 이곳저곳을 뒤져 겨우 찾아낸 지푸라기 인형이었다.

설은 남자 인형은 그녀의 방에 두고 여자 인형만 이곳에 가지고 나왔다.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설이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인형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저 인형이 영애 님 물건입니까?”

웃음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설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앞에 다가와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쪽을 흘끔 쳐다본 영부인이 남자를 보고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설은 바로 이 남자가 영부인이 그녀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부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짓더니,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 옆 테이블로 이동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설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신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은 남자였다.

“제가 좋은 차를 파는 곳을 알고 있는데, 만약 제게 힌트를 주신다면 영애 님께 답례로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영애님이 내놓은 물건이 어떤 건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그런데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제가 내놓은 물건은…… 아쉽게도 다 팔렸네요.”

잠깐 두리번거리던 설이 입가에 친절한 미소를 띠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누군지는 안 물어보시네요, 궁금해하실 줄 알았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외교관님이잖아요.”

“절 아세요?”

“신문에서 몇 번 봤습니다.”

정확히는 남자보다는 남자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를 봤던 거였다.

차기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될 만큼 영향력 있는 부친을 둔 덕분에, 남자는 종종 그의 아버지와 함께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연구원은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섭섭하셨겠어요.”

“그만둔 게 아니라 지금 휴직 중입니다. 다시 연구원으로 돌아갈 거예요.”

“아……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시선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던 설의 왼손에 가 머물렀다.

정확히는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있었다.

잠시 반지를 응시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설을 바라보았다.

“액세서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반지가 예쁘네요.”

“사실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데 중요한 사람이 준 거라서요.”

“아…….”

설은 손등을 쭉 펴고 반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네 번째 손가락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민준은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설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지푸라기 인형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이 남자와 잠깐 얘기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 인형을 사간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 물건 AS도 됩니까?”

“……!”

그때 누군가 설의 앞에 불쑥 인형을 내밀었다.

그녀 앞에 인형을 흔들다가 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걸 본 민준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웁니까?”

“다른 사람이 사간 줄 알고 놀랐잖아요.”

“이렇게 못생긴 지푸라기 인형을 누가 사간다고요.”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왔는데 대화 중이시길래.”

설은 그때서야 아차 싶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황당한 얼굴로 설과 민준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영부인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얼굴을 한 건 영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남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픽 웃으며 영부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설과 민준에게 집중되었지만 두 사람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잘 지내고 있었어요?”

“물론입니다.”

민준은 인형을 좌우로 흔들며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설의 손가락을 향했다가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게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본 그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더 높이 올라갔다.

“일찍 가야 하는 건 아니죠? 시간 많잖아요.”

“일을 안 하고 있긴 하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습니다.”

‘저 남자 영애 님이랑 무슨 사이인가?’

‘근데 직업이 없나 봐, 일을 안 한다잖아. 설마 영애 님 애인 같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너무 잘생겼다. 저런 남자라면 일 안 해도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는데, 그치?’

설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졸지에 일을 하지 않는 젊은이가 된 민준이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얼른 시선을 돌리며 그의 눈길을 외면했다.

민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설의 웃는 모습을 보며 픽,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나도 좀 알려주면 안 될까요?”

설의 옆으로 다가온 영부인을 발견한 민준이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며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아래로 내려 등 뒤로 슬며시 감추었다.

그는 영부인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차렷 자세로 섰다.

대통령 앞에서도 긴장을 하지 않았던 민준이었는데, 이상하게 영부인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민준은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는 그녀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우리 딸 친구인가요?”

“안녕하십니까, 김민준입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바쁠 텐데 일부러 시간 내서 바자회에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민준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차라리 적진에 포로로 잡혀 고문을 당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민준은 설이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랐지만, 그녀는 그를 도와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영부인이 그를 너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서 잠깐이라도 눈을 옆으로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부인은 그와 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가 설과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 딸과 친한 친구인 것 같은데, 많이 바쁘지 않으면 이따 차 한잔하고 가요.”

“이 사람, 전혀 바쁘지 않아요.”

“멀리까지 와준 손님을 그냥 보내야 하나 했는데 그것 참 다행이구나.”

“…….”

민준은 간신히 눈을 옆으로 돌려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설을 바라보았다.

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민준은 그녀에게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며,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여자 인형을 대신 응징하듯 힘껏 눌렀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