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여긴 어디, 나는 누구?2016.09.15.
청와대의 고즈넉한 곳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상춘재는 대통령이 중요한 외빈을 만날 때 종종 이용하는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준이 영부인을 마주 보고 앉아 있기에 적당한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민준은 지금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나요?”
“아닙니다.”
영부인은 국화 한 송이가 곱게 핀 차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보는 눈이 많았기에, 그녀는 민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도 물을 수가 없었다.
영부인은 조국이 손가락에 못 보던 반지를 끼고 있는 걸 보며 두 사람이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민준은 번듯하게 생긴 게,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우리 조국하고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요?”
“아, 그게.”
민준은 테이블 밑으로 땀이 흥건해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적은 없었다.
사건의 원흉인 설은 민준 옆에서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지푸라기 인형의 목을 짤짤 흔들고 싶어졌다.
“2년 전에 일하다가 만났어요. 31살이고, 공무원이에요.”
“너한테 묻지 않았는데?”
“들으셨으면 됐잖아요.”
영부인은 민준 대신 대답을 한 딸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아까 그녀가 초대한 손님에게 조국이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딸의 마음은 이미 눈앞의 남자에게 가 있는 거였다.
그녀는 조국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라니 후한 점수를 주며 넘어가고 싶었지만, 만난 때가 하필 2년 전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2년 전이라면…… 대선이 끝난 후였나요?”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 조국이 영애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나요?”
“네, 알고 있었습니다.”
“흐음…….”
영부인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난 게 아니라 민준이 조국에게 일부러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은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려고 했지만, 영부인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실례지만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부모님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난 딸 하나로도 힘이 들던데, 두 분이 남매를 낳고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친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지금 부모님께서 저를 입양해 키워주셨습니다. 두 분께서 절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영부인의 얼굴에 언뜻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조국이 데려온 남자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입양되어 자랐다고 하니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조국이 영애인 걸 알고 만났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공무원이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오늘 여기에 온 걸 보니 출근을 하지 않았나 보네요.”
“국정원 소속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직무 정지 중이라 오늘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직무 정지…… 요?”
“네, 그렇습니다.”
영부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국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보여주는 남자라서 기대하는 마음이 컸던 것만큼, 실망하는 마음도 컸다.
영부인은 그가 성실성까지 결여되어 있는 남자라는 생각에 더 이상 민준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갑자기 불러내 곤란한 질문을 해서 미안해요. 딸아이 친구를 불러놓고 제가 실례를 했네요. 내가 지금 밖에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딸아이하고 차 마시고 천천히 있다 가요.”
영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나가는 걸 배웅한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담담한 표정으로 찻잔을 응시했다.
영부인은 민준과 대화를 나눌수록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민준은 그 표정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일 터였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 도망가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요, 알았죠?”
“이건 당신이 계획했던 일이야,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일이야?”
“계획했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얌전히 앉아 있어요.”
“강조국 용감하네.”
“차 마시고 있어요.”
설은 빙긋 웃으며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니 영부인은 설이 따라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정원 마당에 멈춰 서 있었다.
“어렵게 초대한 사람인데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게 어딨어요, 엄마.”
“강조국, 솔직히 엄마는 지금 좀 당황스럽구나.”
영부인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후 착잡한 얼굴로 설을 응시했다.
설이 오늘 민준을 이곳에 초대한 걸 보면 그녀에게 그를 보여줄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갑자기 저 사람을 초대해서 당황스러우신 건 아닐 것 아니에요.”
“그래. 엄만 솔직히 네가 저 사람을 가벼운 마음으로 내게 보여준 게 아닌 것 같아서 더 걱정돼.”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텐 과분한 사람이고요.”
“아빠도 알고 계시니?”
“알고 계세요.”
“손님이 가고 나면 넌 나랑 따로 얘기 좀 해야 될 것 같구나.”
영부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상춘재 마당을 빠져나갔고 수행원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설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민준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설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 당황했어요?”
“나보다는 영부인께서 더 당황하신 것 같던데.”
“엄마는 괜찮으세요. 갑자기 당신을 보여드려서 좀 놀라신 것뿐이에요.”
설이 민준의 잔에 차를 따르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고 나면 그녀는 영부인과 긴 얘기를 나누게 될 터였지만 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엄마라면 민준의 반짝임을 알아봐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 거야?”
“우리 엄마가 조만간 당신을 다시 보자고 하실 것 같아서요.”
“글쎄, 영부인께선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던데.”
“진짜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포기할 거예요?”
“아니, 그땐 청와대 경호를 뚫을 방법을 연구해 봐야지.”
“진담이죠?”
“응, 진담이야.”
민준이 피식 웃으며 설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민준은 설의 어머니가 그를 환대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영부인의 얼굴에 얼핏 스친 실망감을 본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새삼 그녀가 그냥 강조국이 아니라 영애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나도 당신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고 싶은데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설의 의미심장한 말에 민준이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똑똑하네. 그건 어떻게 안 거야?”
“파일을 숨길 곳은 그곳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설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민준이 그곳에 파일을 숨겨두었다는 걸 확인하자 속으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곳이라면 안심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파일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신한테 그 파일이 꼭 필요하진 않을 텐데, 그건 그럼 다른 연구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건가?”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이에요?”
“당신 머릿속에 그 내용이 저장되어 있을 텐데도 굳이 그 파일을 만들어둔 건, 당신이 아닌 다른 연구원들을 위한 거였겠지.”
“똑똑하네요, 거기까지 생각했어요?”
“강조국이 끊임없이 뇌를 쓰게 해서, 덕분에 치매는 안 걸리겠어.”
민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설을 쳐다보며 테이블 아래 두었던 인형을 들어, 보란 듯이 두 손으로 인형의 배를 꾹 눌렀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잘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거야. 그러니까 이유 없이 몸이 아플 땐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라고.”
“내가 아까 그거 팔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 더 두고 보려다 그냥 당신한테 간 거야.”
‘응? 일찍 도착해 있었던 거였어?’
설은 눈을 크게 떴다.
“도착하자마자 나한테 바로 온 게 아니었어요?”
“그전에 잠깐 할 일이 있었어.”
청와대에서 열린 바자회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모두 신원 조회를 거친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리 경호실이 대단해도 그들의 머릿속까지 조회할 순 없었다.
그래서 민준은 일찌감치 이곳에 도착해 설의 주변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녀와 어떤 남자와의 대화가 길어지자 그제야 설에게 다가갔던 거였다.
“당신 직무 정지 중이라면서요.”
설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인형의 배를 다시 한 번 꾹 눌렀다.
설이 약이 올라 인형을 빼앗으려 손을 뻗자 민준이 인형을 높게 들어올렸다.
인형을 누르는 재미는 나름대로 꽤 쏠쏠했다. 거기에 발끈하는 설도 귀여웠고 말이다.
“내 거야, 손대지 마.”
“재미로 누르라고 준 거 아니에요!”
“말은 정확히 하자고. 당신이 준 게 아니라 내가 산 거지.”
“알았어요, 당신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언제까지 쉬는 거예요?”
설이 체념하듯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는데.”
“그럼 이건요? 건우 씨나 황 원장님께 나 모르게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니죠?”
“다른 사람 말고 당신 걱정이나 해. 보온도 안 되는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질 않나, 인형을 산다고 거리를 돌아다니질 않나, 당신이 지금 그렇게 함부로 돌아다닐 때야?”
“…….”
설이 말없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민준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지푸라기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설의 강렬한 눈빛을 못 본 척하며 인형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겨울옷 좀 사줘야겠네, 애가 아주 추워 보여.”
“어떻게 알았어요?”
“……뭘?”
“내가 그 인형 사러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거요.”
“느낌……?”
민준은 여전히 인형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김민준 씨, 당신이 나한테 또 뭔가를 붙여놓은 거예요? 내가 싫다고 전에 분명히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당신이 싫다면 안 그러겠다고 나도 분명히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럼…… 설마 인정 씨한테?”
“……야옹아, 오빠랑 집에 가자.”
민준이 말머리를 돌리며 인형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설은 그가 일부러 답을 회피한다는 걸 알고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캐묻는다고 대답해 줄 민준이 아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황 원장님도 건우 씨도 잘 있겠죠, 뭐. 그리고 내가 어디를 다녔는지는 당신이 인정 씨한테 물어봐서 알았을 거고요.”
설이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자 그는 인형을 만지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건우는 지금 경황이 없을 거야.”
“왜 경황이 없어요?”
“백 회장이 많이 위독한가 봐.”
“아…….”
설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그녀가 백 회장을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를 아버지로 둔 건우를 생각하니 설은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사실 설은 건우가 숨겨놓은 실험 장비에 대해 그와 상의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청와대를 나가면 제일 먼저 건우와 그 일을 의논하려 했는데, 민준의 얘길 듣고 보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았다.
“건우 씨가 힘들겠네요.”
“그런 부모라도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백 회장이 떠나면 백건우도 고아가 되는 거니까.”
“…….”
그는 별생각 없이 무심히 뱉은 말이었지만 설은 그 말에서 민준의 오랜 외로움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다는 건 분명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을 터였다.
그녀가 외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느껴야 했던 고통스런 감정을, 더 어린 나이에 더 힘들게 겪어야 했던 민준을 생각하니 설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제 곧 12월이잖아요. 산타가 나한테 무슨 선물을 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산타하고는 어디에서 접선할 건데?”
“산타한테는 루돌프 내비게이션이 있잖아요. 알려주지 않아도 아마 알아서 잘 찾아올 거예요. 이번에 산 빨간 원피스는 아무래도 그날 입어야겠어요.”
“그 옷을 진짜 산 거야?”
“그럼요.”
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민준이 한쪽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팔짱을 낀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설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설과 눈이 마주치자, 민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아래로 휘어졌다.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
“…….”
민준이 그녀의 손을 잡자 설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그의 얼굴에 따듯한 온기가 번져갔다.
**
늦은 밤, 대통령은 한참 전부터 사택 안 서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종종 이렇게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영부인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오자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영부인은 차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조국이 바자회에 남자를 초대했어요.”
“바자회에 남자를 초대했다고?”
테이블에 앉아 잔을 들던 대통령이 눈썹을 위로 치켜들며 물었다. 설이 친구를 초대한다더니 김민준을 초대한 모양이었다.
“네. 자연스럽게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내가 손님을 초대해 놓고 하마터면 민망한 상황이 될 뻔했어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던데 왜 나한테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아까 얼핏 듣기로는 공무원이고 어렸을 때 입양이 되었다고 하던데요.”
“국정원 김상현 국장 아들이야. 친부도 국정원 요원이었는데 작전 중 사망했고, 그 뒤 김 국장이 데려와서 키운 모양이야.”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아내가 알게 될 일이었다. 조국이 남자를 초대했으니 그녀가 그냥 넘어가진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지금 무슨 문제를 일으켜서 직무 정지라고 들었는데요.”
“조국이 무슨 사고를 좀 쳤는데 그걸 감추려다 징계를 받았나 보더군.”
“조국이 무슨 사고를 쳤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징계를 받아요?”
영부인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통령은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뒤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감췄다.
‘우리 딸이 장인어른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를 핵무장 국가로 만들려나 보오.’
그는 차마 마음속 말을 겉으로 뱉을 수 없었다.
“별일 아니야.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럼 괜찮은 거죠? 조국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아직도 난 가슴이 뛰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내려앉는단 말이에요.”
영부인은 2년 전 설의 납치 사건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건의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때 조국을 찾아 데려온 요원이 김민준이야. 피는 못 속이는지 친부를 많이 닮았나 보더군.”
“그게 정말이에요? 이를 어째, 난 그것도 모르고…….”
영부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그가 자라온 환경도 평범하지 않은 데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직장에서 문제나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린 거였다.
그녀는 민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 알았으면 뭐가 달라지는 게 있나?”
“걱정할 정도의 사람만 아니면 그 사람을 좀 지켜봐도 될 것 같아서요.”
“당신은 뭐가 그렇게 너그러워?”
“우리 딸이 내가 당신을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얼굴로 그 사람을 보고 있었어요.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고요.”
대통령은 영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민준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갖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장인어른과 민준과의 인연까지 알게 된다면 그녀의 반응이 어떠할지 눈앞에 훤히 보였다.
“조국이 나한테 평창동 집으로 들어가 지내고 싶다고 하더군. 그래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당신이 말려줬음 좋겠어.”
“무슨 집이요? 우리가 평창동에 무슨 집이 있다고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장인어른께서 생전에 거주하셨던 집 말이야, 그 집을 다시 찾았어.”
“아버지 집을 다시 찾았다고요? 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얘기를 왜 안 했어요!”
영부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평창동 집은 그녀가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 집을 사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집 소유주와 연락이 닿지 않아 포기하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되찾았다니…….’
그녀는 이게 꿈인가 싶었다.
“얘기할 겨를이 없었어.”
“어찌 됐든 당신이 그 집을 잊지 않고 찾아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 집을 사는 데 지불한 돈은 내가 낼게요. 아버지께 유산으로 받은 돈이면 아마 그 집을 살 정도는 될 거예요.”
“……돈을 주고 산 게 아니야. 그러니 주고 싶다면 나 말고 그 전 주인한테 줘.”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고요?”
영부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는 누군가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그 집을 찾아줬나 싶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영부인은 얼굴을 근심스럽게 찌푸렸다.
대통령은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일어나서 책상 위에 있던 두툼한 파일을 말없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당신이 궁금해 하는 모든 것. 하지만 읽기 전에 먼저, 이걸 읽고 나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런 약속까지 해야 돼요?”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옆으로 종이를 넘겼다.
보고서의 첫 부분은 민준의 친부와 이인호 박사 사이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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