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내 사람을 소개합니다2016.09.20.
건우는 백 회장의 침상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밤이 고비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아까부터 백 회장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백 회장은 간간히 가는 숨을 힘겹게 내쉬며 건우를 향해 눈을 깜빡이곤 했다. 그는 건우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회사는…….”
“아버지가 안 계셨어도 그동안 잘 굴러가던 회사입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백 회장은 이승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회사 걱정을 하고 있었다.
건우는 지금까지 그런 그를 답답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아버지와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답답함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이제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 왜…….”
백 회장은 시선을 돌려 건우 옆에 서 있는 서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아, 저는 부사장님이.”
서연이 입을 여는 순간 건우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서연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건우가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달라며 찾아온 것은 그녀가 퇴근한 뒤의 일이었다.
집까지 찾아온 그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보였기에, 서연은 건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전 서연 씨와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많이 낳고 아주 잘 살 겁니다. 그러니까…….”
건우의 갑작스런 말에 당황한 서연이 무어라 항의를 하려 했지만, 그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건우를 보며, 그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건우는 멀리 떠나는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싶은 거였다.
“……부사장님이 건강하게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그러니까 부사장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서연은 연극 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되었는지 어색하지 않게 건우의 애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순간 서연의 마음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백 회장이 힘겹게 손을 들어 서연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 병상 가까이 다가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백 회장은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 오빠한테…… 내가 미안해한다고 전해주게.”
서연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왜 그녀의 오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백 회장을 바라보는 서연에게, 그는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다시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사실 백 회장은 서연이 병실에 왔다 간 후 그녀에 대해 더 자세하게 뒷조사를 했다.
그는 그녀의 당돌함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비서에게 서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라 지시를 내렸다.
그러다 서연이 그와 악연이 있는 집 여식이라는 걸 알고 깨끗이 접자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녀를 데리고 온 건우를 보니 그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난…… 이제 좀 자고 싶구나.”
백 회장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건우는 그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서연은 맞잡은 손에 말없이 힘을 주었다.
잠시 후 각종 방송 매체를 통해 Pakin 그룹 백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
[어젯밤 Pakin 그룹 백인회 회장이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현재 한국병원에서 그의 장례가 치뤄지고 있으며 백 회장의 독자인 백건우 부사장이 빈소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백인회 회장은 향년 74세로……]
아침 뉴스를 보던 설은 착잡한 마음에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껐다.
설은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기보다는 혼자 외롭게 이 상황을 견디고 있을 건우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가 아버지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발 벗고 그녀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건우가 지금 얼마나 허망한 기분일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침묵하는 것만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건우를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강조국, 엄마랑 얘기 좀 할까?”
그때 영부인이 설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설은 민준을 보내고 난 뒤 바로 그녀를 부를 것이라 생각했으니, 생각보다는 늦은 셈이었다.
“아빠한테 얘기 들으셨어요?”
“들었어. 하지만 네 아버지는 그 사람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싶어 하진 않으시더구나.”
“그럼 엄마는요, 엄마도 아빠와 같은 생각이세요?”
“너한테 내 생각이 중요하니?”
영부인은 애틋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민준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나자 설을 사랑하는 그에게 고마웠고 또 그만큼 미안했다.
민준의 외적인 조건만 보고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고, 지금 살아 계셨다면 두 사람을 보고 많이 좋아하셨겠다 싶어 마음이 아팠다.
“엄마한텐 죄송하지만 사실 별로 안 중요해요.”
설의 솔직한 대답에 영부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설 위로 겹쳐 보였다.
“오늘 별일 없으면 엄마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디를요?”
“……할아버지 집.”
“어떻게 아셨어요……?”
“넌 내가 언제까지 모를 줄 알았니?”
피식 웃으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영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한테, 바쁘지 않으면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해. 내가 오늘 점심 식사를 위해 미리 잡혀 있던 일정을 취소했다는 걸 그 사람이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한테 점심 전까지 사택으로 오라고 할까요?”
설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영부인은 그녀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오늘은 그냥 밖에서 같이 점심만 먹자는 거야.”
“알았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그리고 엄마, 저 엄마한테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
“아빠한테 말씀드렸는데 아직 대답이 없으셔서요. 저 여기 말고 평창동 집에서 지내고 싶어요, 엄마. 그러니까 엄마가 아빠한테 말씀 좀 드려주세요.”
영부인은 하루 사이에 대통령과 조국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부탁을 받았다.
한 명은 청와대를 나가게 해달라고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걸 말려달라고 하고 있었다.
“엄마도 그러고 싶지만, 더 이상 너 혼자 지내는 건 반대야.”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집에서 저 혼자 지내게 놔두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영부인이 이마를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설이 청와대를 나가도 혼자 지내게 두진 않을 거였다.
하지만 몰랐으면 모를까, 설이 위험한 순간을 다시 한 번 겪었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된 이상 선뜻 그렇게 하라고 할 순 없었다.
“지금은 일단 오늘 일만 생각하자. 평창동을 들렀다 가려면 서둘러야 할 텐데, 그 사람한테 미리 연락도 해야 할 것 아니니?”
설은 더 이상 대화를 해봤자 영부인이 쉽게 허락을 해주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은 그녀의 말처럼 일단 민준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중요했다.
“오늘은 그 사람한테 곤란한 질문 안 하실 거죠?”
“할 거야.”
영부인은 쯧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곤란한 질문을 했지만 별로 곤란해 하지 않던 민준을 떠올리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설이 영부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행복한 아침이었다.
**
그 시각, 민준은 NIS 박 단장 사무실 안에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박 단장과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백건우한테 안 가보십니까?”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건지, 가는 게 도와주는 건지 생각 중이야. 그보다 내가 가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기도 하고. 왜, 너도 가보게?”
“봐서요.”
사실 민준도 장례식장에 가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건우와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백 회장과 상관없이 그를 생각하면 가는 게 맞았다.
그는 지금쯤 한국병원엔 조문객들이 넘쳐나고 있을 테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 새벽쯤에나 조용히 빈소에 다녀올까 하고 있었다.
“참, 박인정이 요즘 시들시들하다던데 그 원인이 혹시 너냐?”
“시들시들해진 김에 아예 청와대 경호실로 발령을 내주시지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걘 여기보다 거기가 더 어울립니다.”
“인정머리 없는 놈, 네가 사랑을 알아? 저거, 여자가 있다는 것도 순 뻥일 거야!”
“있다고 말씀드려도 믿질 않으시니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민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길게 기지개를 폈다.
따분하고 무료한 날들이었지만, 그는 왠지 이 여유가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민준은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를 홀짝였다.
딩동.
문자 수신음이 들리자 민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수신된 문자를 확인했다.
응?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핸드폰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는 민준에게, 웬만해선 잘 놀라지 않는 녀석이 저런 표정을 하는 걸 보면 뭔가 충격적인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박 단장이 물었다.
“야, 뭔데 그래? 어?”
“……아무래도 신종 피싱인 것 같습니다.”
“피싱? 문자 사기 그런 거? 어떤 놈이 겁도 없이 감히! 야, 잡을까? 아니, 잡을래?”
민준은 그의 통장에 거액이 입금되었다는 SMS 문자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신종 피싱이 아니라면 그도 모르게 민준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박 단장의 말마따나, 어떤 자식이 겁도 없이 감히 이런 짓을 했는지 잡아 놓고 족쳐야 할 터였다.
“……응?”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입금자 이름이 낯익었다.
물론 세상에 동명이인이야 많겠지만 공교롭게도 입금자 명은 그가 알고 있는 영부인의 이름과 같았던 것이다.
민준이 아무래도 은행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문자 한 통이 더 수신되었다.
-별일 없으면 오늘 같이 점심 먹어요. 엄마가 당신 시간 괜찮으면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어요.
“…….”
두 번째 문자는 더 이상했다. 발신인은 조국이 맞는데 내용에 오류가 있었다.
영부인은 분명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뜬금없이 같이 식사를 하자니 그로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받은 두 개의 문자가 잘못 수신된 게 아니라면, 두 개의 문자를 합쳐 ‘이 돈을 받고 내 딸과 헤어져라’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또 너무 큰 액수였다.
“……단장님.”
“어, 왜!”
“여자 친구 어머니가 같이 식사를 하자는 건 보통 무슨 뜻입니까?”
“뭐야, 요즘 신종 피싱 문자는 그렇게 오냐?”
“그냥 일반적인 경우를 여쭙는 겁니다.”
민준이 그제야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박 단장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지금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보통 애인 부모님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할 때는 그 목적이 분명하지.”
박 단장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민준은 그의 의견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는 민준이 약자인 것 같은 이 상황이 꽤나 유쾌했다.
“무슨 목적 말입니까?”
“그건 바로 네놈이 어떤 놈인지 알아야겠다는 것이다.”
“그럼 이미 알고 계시는 경우는요?”
“이미 알고 있는 경우라면 목적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지. 말 그대로 네놈이 맘에 드니 밥을 먹자는 거거나, 또는 네놈이 맘에 들지 않으니 내 딸과 당장 헤어져! 이런 말을 하려고 보자는 거야.”
박 단장은 마치 사위 후보를 면접 보러 나온 아버지처럼 장인의 입장에 빙의해 열연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떠올리면서 딸을 가진 부모의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다.
“단장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신 것 아닙니까?”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딸 가진 부모는 원래 다 그래. 근데 진짜로 네 여자 친구 어머니가 널 보자는 거야? 피싱이 아니고?”
“아마 그런가 봅니다.”
“야, 그렇게 꽁꽁 숨겨 놓지 말고 나도 좀 보여 줘! 도대체 어떤 여자기에 우리 인정이가 K.O. 당한 거야? 인정이한테 관심이 없는 걸 보면 네놈이 외모를 따지는 건 아닌 것 같고…… 하여간 특이한 놈이야.”
“…….”
민준은 박 단장이 혼잣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의 머릿속은 두 개의 문자로 인해 이미 충분히 복잡한 상태였기에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이따 밤에 회식할 건데 너도 와라.”
“……봐서요.”
“할 일도 없는데 튕기지 말고, 올 때 여자 친구도 같이 와. 내가 오늘 우리 제수씨 술 좀 먹여야겠다. 내가 네 하늘 같은 직장 상사인데 설마 내 술잔을 거절하진 못하겠지? 흐흐흐.”
박 단장의 말에 민준이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먼저 은행에 들러 확인을 해본 후 조국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준은 부디 영부인이 그에게 조국을 포기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데려올 순 있는데,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안 잡아먹을 테니까 내 앞이라고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나 전해.”
박 단장은 팔짱을 끼며 거드름을 피웠고, 민준은 그를 보며 모처럼 아주 즐거운 밤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정오가 지난 시각, 민준은 설이 알려준 장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곳은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조용한 한식당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식당 주변은 고요했고 검은 양복을 입은 수행원들이 식당을 둘러싸듯 서서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미리 얘기를 해 두었는지, 민준이 도착하자 수행원 중 한 명이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잘 차려진 상을 두고 영부인과 설이 마주 앉아 있었다.
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민준은 영부인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고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자기 식사하자고 불러서 미안해요. 찾아오는데 힘들진 않았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민준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설 옆에 앉았다.
영부인의 밝은 표정을 보니 꽉 쥐고 있던 주먹의 힘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적어도 오늘 ‘내 딸과 헤어져.’라는 말을 듣게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제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보내서 내가 마음이 안 좋았어요. 혹시 섭섭하게 생각했다면 잊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여긴 내가 가끔 남편과 같이 오는 곳이에요. 음식이 깔끔해 아마 입맛에 맞을 거예요. 만약 입맛에 안 맞으면 다음번엔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하죠.”
“아닙니다, 맞을 겁니다.”
민준의 경직된 말투에 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여유로울 것 같던 민준이 잔뜩 긴장한 게 신기해, 흘끔흘끔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조국하고 평창동 집에 다녀왔어요. 알고 있죠? 우리 아버지 집.”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집을 찾아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집을 그냥 받을 수는 없어요. 아까 내가 보낸 건 아버지의 뜻을 지켜주고 싶은 딸의 마음이라고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요.”
민준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영부인은 그의 부친과 이인호 박사와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거였다.
하지만 그 집을 설에게 준 건 그녀에 대한 민준의 마음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되돌려 받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민준은 시선을 들어 영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제 마음에 대한 대가를 물질적인 걸로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고마움의 표시가 아니라 집에 대한 정당한 지불이니 언짢게 생각하진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나저나 그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닌데 얘기가 거기로 먼저 흘렀네요.”
영부인의 확고한 눈빛에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진심이었고, 그는 영부인의 마음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민준은 잠깐 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눈을 돌렸다. 설은 차분한 모습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저를 보자고 하신 건…….”
“오늘은 내 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러 왔어요. 조국은 내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까요. 이건 내가 김민준 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과는 별개예요. 난 단지 고맙다는 이유만으로 내 딸의 결정에 동의할 수는 없어요.”
“엄마.”
얌전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설이 인상을 찡그리며 영부인을 쳐다보았다.
민준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 거라고 하더니 그녀는 정말 그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의 걱정과는 달리, 민준은 영부인의 말을 들으며 조국이 그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라 영부인의 말투와 행동이 꼭 조국의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조국은 나이가 들어도 참 예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 씨는 저한테도 많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조국이 영애라는 사실을 빼고 생각해도, 정말 같은 마음일까요?”
“그렇다면 더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강조국이 영애라는 사실을 더해도 제 마음은 같습니다.”
“빼도 같은 게 아니라 더해도 같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설이 영애라서 좋은 건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설이 평범한 부모님을 뒀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녀 자체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별반 차이가 없는 얘기이기도 했다.
결국, 평범하지 않은 그녀를 사랑하는 그가 기쁜 마음으로 감내해야 할 문제였다.
민준의 대답에 영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나한테 좀 알려줄 수 있겠어요?”
영부인은 만약 세상에 운명으로 정해진 인연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두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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