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녀에게 가는 길2016.10.13.
“그래서 당신이 직접 김민준한테 요리를 해주고 왔다는 거야?”
“사람이 볼수록 마음에 들어요. 우리도 그런 아들 하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영부인은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던 대통령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오랜만에 직접 요리를 하고 손님을 맞았더니 피곤이 밀려왔다.
그녀는 모로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셋이서 좋았겠네.”
그는 종이를 옆으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 친구가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지만, 조국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잖아요. 부도덕하거나 특별히 행실이 나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우리와 인연이 아주 깊은 친구이기도 하고요.”
“그 녀석도 조국이랑 결혼하겠대?”
“그럼요, 그러니까 우리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쯧. 그놈도 고생을 사서 하는 놈이구만.”
“네? 고생을 사서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가 아무 말 없이 종이 한 장을 더 넘겼다.
민준은 생긴 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겨 가지고 하는 짓은 영 미련퉁이였다.
조국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대통령 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집 딸이었어도 두 손 들고 포기했어야 옳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그는 조국 하나만으로도 모자라 사위의 생사까지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그렇잖아도 이번 피랍 인질 구출 작전에서 민준이 다칠까 봐 내심 마음 졸이며 김 국장과 조국의 얼굴을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랏일을 위해 목숨을 거는 민준과 조국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다.
대통령인 그의 입장이 그러했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
그녀는 그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대통령을 불렀다. 그는 그제야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지만, 대통령은 영부인에게 조국이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장인어른의 죽음에 트라우마가 있는 부인인데, 딸이 장인어른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기절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신은 젊은 사람의 감정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조국을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친구를 말하는 거예요?”
“둘 다. 지금이야 좋아서 물불 가리지 않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나는 왜 남들처럼 평범한 사람을 만나 살지 못했나, 하고 말이야.”
“그래서, 당신도 지금 후회를 한다는 얘기예요?”
“내가? 내가 왜.”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는 늘 당신의 앞길을 막지 않을까 걱정하셨어요. 자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셨죠. 그런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잖아요. 당신 때문에 아버지의 명성에 흠이라도 갈까 봐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아니에요?”
“맞아. 그랬는데, 난 그게 힘들거나 괴롭지는 않았어. 난 장인어른을 존경했고 어쨌든 장인어른 덕에 내가 당신과 결혼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고 생각했지. 돈도 없고, 가진 건 머리밖에 없는 놈이 감히 이 박사님의 고명딸을 욕심냈잖아.”
“흐흠…….”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두 아이도 그럴 거예요.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났을까 하고 후회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인연에 서로 감사하며 살지 않을까요? 당신이 그랬듯이 말이에요.”
“나랑 그 녀석이랑 경우가 같아?”
대통령이 발끈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난요, 그 친구한테 많이 고맙고 미안해요. 그 친구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덕분에 나는 우리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잖아요.”
“…….”
“사위가 아니라면 아들이라도 삼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사람도 참.”
대통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을 다시 펼쳤다.
인생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아름답게만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두 아이들의 미래가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당신을 꼭 닮은 딸이잖아요. 믿어 봐요.”
“그 녀석이 그렇게 맘에 들어?”
“잘생겼잖아요.”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딸과 함께 평창동 집에 간 날, 그녀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남긴 수첩을 보았다.
그 수첩에는 민준이 행복하길 바란다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고,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처럼 민준이 행복하길 바랐다.
“난 잘생긴 남자한테 정말 약한 것 같아요.”
그녀의 너스레에 대통령이 피식 웃었다.
그는 그 녀석이 정말 그렇게 잘생겼는지 다시 확인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 분위기에 들뜬 Pakin 직원들은 밤만 되면 술집에 모여들었고, 연말이라는 핑계 아래 매일같이 송년회를 가졌다.
그 사람들 중 서연의 술자리 출석률은 백 퍼센트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급기야는 어젯밤, 서연에게 이렇게 회식이 많은 회사는 당장 때려치우라는 다소 험악한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은 어디서 마시는 거야? 오늘 연극했던 직원들 송년회 한다며?”
서연은 쓰린 배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면서 빈우에게 물었다.
“놀라지 마. 송년회 장소가 무려 케이크 카페야.”
“왜 송년회를 케이크 카페에서 해?”
“위에서 그렇게 지시가 내려온 모양이야. 술 먹은 다음 날 케이크 더미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참, 그런데 오늘은 조신하게 앉아 있어야 할 거야.”
“왜? 본부장님이라도 참석하신대?”
“아니, 부사장님이 참석하신대.”
빈우의 말에 배를 문지르던 서연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다.
그녀는 동료 여직원들에게서 부사장이 조용히 귀국해 그동안 자택에서 쉬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건우가 오늘 송년회에 참석한다는 걸 보니 오늘은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먼저 연락을 해보라고 했지만 서연은 건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귀국을 하고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은 건우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걸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서연은 이런 상황에서 건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남은 방법은 삼십육계 줄행랑뿐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프다. 빈우 씨, 나 오늘 송년회에 참석 못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고작 그 정도 연기에 팀장님이 넘어갈 것 같아? 연기가 너무 어색하니 좀 더 분발하도록 해.”
“…….”
“참석하기 싫어도 얼굴은 비추고 가. 부사장님은 이미 우리 얼굴 다 알고 있는데 주인공이 빠지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부사장님이 사랑의 밤 행사에 참석하지 못해 정말 유감이라고 했나 봐. 그렇게 유감이면 특별 상여나 줄 일이지 케이크 카페에서 송년회라니, 쯧.”
빈우의 말대로 그녀가 건우를 피하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서연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굳이 건우를 피할 이유도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피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 나야 좋지 뭐, 케이크 카페 송년회라니 누가 생각해 냈는지는 몰라도 장소는 무척 맘에 들어.”
“넌 어제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오늘 케이크가 먹고 싶냐?”
“그럼! 케이크인데.”
서연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용기를 냈다는 건우와는 다른 의미로 서연은 오늘 그를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했다.
어차피 그녀가 이 회사를 다니는 한 시기만 다를 뿐 언젠가는 그를 만나게 될 터였다.
“부사장님이 귀국하고 나서 지방에 며칠 있었다는데, 그곳에 혹시 여자가 있나?”
“집이 아니라 지방에 있었대? 그럼 사업 관계로 출장 갔었나 보네.”
“비서실에서 그러는데 출장은 아니래. 개인 스케줄이라며 수행비서도 없이 혼자 내려갔다는데, 크리스마스에 혼자 지방에 내려간 걸 보면 뻔한 것 아니겠어? 여자지, 여자.”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서연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건우가 지방에 여자를 만나러 갔다는 건 별로 믿기지 않았다.
그에게 만약 여자가 있었다면 건우가 그녀를 그의 아버지께 데리고 갔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긴, 여직원들이 우리 부사장님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하긴 하더라. 아니, 부사장한테 지금 여자가 없다고 그 차례가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다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부인을 하는 거야?”
“무슨 뜻인진 잘 알겠는데, 걸그룹 팬클럽 총무가 입에 담을 소리 같지는 않다.”
“야, 나는 그냥 순수하게 우리 천사 소녀들의 노래를 사랑하는 거야!”
“그럼 그 천사 소녀 열애설에 반박 댓글은 왜 그렇게 열심히 다는 건데?”
서연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빈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에게 시디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시끄럽고 이거나 팀장님 가져다 드려.”
“이게 뭔데?”
“우리 연극 동영상이야. 부사장님이 한 장 복사해 달라고 했대.”
“…….”
서연은 빈우에게서 말없이 시디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직접 건우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시디를 받아드는 손길이 떨렸다.
**
민준은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아니라 설의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더 긴장이 되었다.
구김 없이 딱 떨어지는 정장을 입은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반듯하게 조여 맸다.
매일 입는 옷이었지만, 민준이 오늘 거울 앞에 머문 시간은 평소보다 길었다.
설은 오늘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매우 바쁠 예정이었다.
그녀는 연구실 동료들이 평창동 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배웅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설은 민준에게 씩씩하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전했고, 봄이 오기 전에 그의 신부가 되고 싶다는 말로 민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긴장돼요?
스피커폰을 통해 설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민준이 혼자 청와대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게 신경 쓰였는지, 잠깐은 통화할 수 있다며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응. 긴장돼.”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그냥 나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청와대를 적진이라고 표현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래도 아빠를 적장이라고 표현하진 않았잖아요.
설의 너스레에 민준이 낮게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가 대통령의 얼굴을 보는 건 2년 만이었다.
오늘 그는 영애와 깊은 관계가 될까 봐 우려했던 대통령에게 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설과 미래를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에 그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잔뜩 긴장해 경직되어 있던 몸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손목시계를 차는 걸 마지막으로 민준의 외출 준비가 끝났다.
그는 다시 한 번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민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녀올게.”
핸드폰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인 민준은 마침내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
“장소가 정말 너무 좋아요, 부사장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테이블 맨 구석에 앉아 있는 서연의 귀에 김 팀장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건우가 케이크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고개를 들지 않고 접시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은 포크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손에 힘 좀 풀지?”
옆자리에 앉은 빈우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내 포크야, 신경 꺼.”
건우를 보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연의 고개는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향했다.
“사랑의 밤 행사에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회사 일도 바빴을 텐데 시간을 내 연극에 참여해 준 직원들께 감사합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억양 없이 단조로웠다. 두 사람의 조우에 긴장하고 있었던 건 그녀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서연은 어쩐지 힘이 빠졌다.
기분이 한층 더 나빠진 그녀는 케이크를 입안에 가득 밀어 넣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신 두 주연 분들.”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서연은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야.”
빈우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서연을 툭 쳤다.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연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은 숨을 멈추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얼굴이 야윈 것 같아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
건우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연은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참, 부사장님. 제가 드린 연극 시디는 보셨어요?”
분위기가 일순 어색해졌다. 김 팀장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봤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쉽더군요.”
건우의 시선은 여전히 서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연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포크로 케이크를 쿡쿡 찔렀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할 수 없었던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부사장님이야 워낙 바쁘신 분인데요, 뭘. 그리고 또 이렇게 저희 직원들 생각해서 송년회 자리도 마련해 주셨잖아요. 지방에서 일 보시고 어제 늦게 올라오셔서 많이 피곤하실 텐데도 말이에요.”
“제 개인적인 일정을 김 팀장이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 저는 그냥…….”
생글생글 웃던 김 팀장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부사장이 무슨 일 때문에 충청도에 며칠 머물렀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의 대략적인 동선을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닌데 부사장이 너무 정색을 하는 바람에 당황한 그녀의 얼굴이 벌게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직원들이 부사장님께 이런저런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
김 팀장이 황급히 사과를 했다. 부사장이 여자를 만나러 간 게 아니라고 얘기를 하려다가 괜히 그의 미움만 사고 말았다.
“직원들이 저에 대해 무슨 오해를 한다는 거죠?”
“부사장님께서 그곳에 중요한 분을 만나러 가셨을 거라고…….”
‘그녀도 다른 직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건우가 눈을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얼핏 시선이 마주쳤던 그녀가 그를 외면하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요.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부사장님.”
건우는 김 팀장이 뭐라고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자신은 그녀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는데, 서연이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날 뿐이었다.
“김서연 주임.”
건우가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와 시작하기 위해 어렵게 돌아왔는데 시작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날 수는 없었다.
“케이크는 다 먹었습니까?”
“……!”
놀란 서연이 포크를 툭 떨어트렸다.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건우를 바라보았다.
“다 먹었으면 나랑 얘기 좀 합시다.”
건우가 테이블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직원들의 시선이 서연에게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들은 부사장이 그녀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서 그네들끼리 귓속말로 작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결론은 김 주임이 부사장님께 뭔가 단단히 잘못했다는 거였다.
“……너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
주변의 눈치를 살핀 빈우가 서연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였다.
하지만 멍한 상태인 그녀에게 그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른 직원분들은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다 가시길 바랍니다.”
직원들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서연을 향했다.
“김서연 씨.”
건우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지체하고 있다가는 그가 무슨 말을 더 할지 몰랐기에 서연은 서둘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건우는 그녀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걸 본 후 뒤돌아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서연이 카페 문을 열고 나와 건우 옆에 나란히 섰다.
은색 엘리베이터 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왜요?”
서연은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상단의 숫자를 바라보며 불퉁하게 말했다.
정신없이 건우를 따라 나오긴 했지만 그녀가 그를 기다렸다는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건우를 냉담하게 대하겠다고 마음먹은 것과 달리,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서연 씨도 혹시 내가 보고 싶었어요?”
“아니요?”
“난 많이 보고 싶었어요.”
“…….”
“늦게 와서 미안해요.”
건우가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오기 위해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잊고 있던 힘든 과거와 마주해야 했다.
건우는 청주 교도소에서 몇 번이고 그의 면회를 거절하던 기영을 어렵게 만나 백 회장의 사망 소식을 전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도 말했다.
‘Pakin에서 아동복지시설을 몇 군데 후원하고 있는데, 난 네가 형을 마치고 나오면 그 일을 맡아 줬으면 좋겠어. 그러니 그때까지 건강해라, 기영아.’
그는 그녀에게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건우의 옆은 기영의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기도 했다.
그가 서연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겠지만 건우는 이제 아무것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기영을 만나는 일이 그 시작이었다.
“이젠 안 늦을게요.”
띵-
소리가 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건우는 서연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연은 붉어진 얼굴로 깍지 낀 손을 바라보다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손잡아도 되냐고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서연 씨 손, 잡아도 돼요?”
건우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서연의 눈을 응시했다.
“……돼요.”
서연이 고개를 돌리며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밤은 깨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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