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92화 (에필로그 2) (92/94)

[에필로그 2]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2016.11.17.

“서연이한테 남자가 있는 게 분명한데 말이야, 그놈이 도무지 내 눈에 띄지를 않아.”

“아버지 눈에 띄기 싫은가 보죠, 내버려 두면 언젠가 제 발로 나타나지 않겠어요?”

마트에서 카트를 밀고 가던 민준은 과일 코너 앞에 멈춰 딸기와 오렌지를 카트 안에 담았다.

그의 곁을 따라 걷던 김 국장도 카트가 멈출 때마다 자연스럽게 멈췄다 걷기를 반복했다.

“과일은 좀 괜찮은 게냐?”

“괜찮아서 먹는 게 아니라 살려고 먹습니다.”

“하여간 유난도, 쯧.”

김 국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며느리는 임신 3개월이었고, 설은 오히려 괜찮은데 민준이 쿠바드 증후군으로 심한 입덧에 시달리고 있었다.

민준이 통 식사를 하지 못한다는 얘길 들은 그의 부인이 아들이 평소에 잘 먹는 음식을 만들었고, 김 국장은 오늘 그 음식을 들고 민준의 집을 방문한 것이었다.

“아버지 손주 태어나면 다 일러줄 겁니다.”

“저기 이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주변에 물어보니까 3개월이면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하던데 말이야. 의사한테 딸인지 아들인지 아직 안 물어봤어?”

“한번 물어봤는데 안 가르쳐 주더라고요. 장인어른께서 직접 물어보시겠다는 걸 그 사람이 간신히 말렸습니다. 도대체 주치의는 무슨 죕니까?”

설의 산부인과 주치의는 그녀의 임신을 확인한 이후 평소보다 과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아들인지 딸인지까지 물어봤다면 그 여의사는 심장이 멎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그녀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긴장을 늦출 수 없을 거였다.

“나는 네 장인처럼 그렇게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 진찰일이 한 달 뒤라고 했지? 다음 달 26일 맞아?”

“네.”

“그날 나도 같이 가도 돼? 나는 그냥 의사하고 몇 마디 얘기만 하고 오면 되는데.”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범죄 심리 분석 요원은 그날 왜 휴가를 내라고 하셨습니까?”

민준은 카트 안에 이온 음료를 담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 요원은 그에게, 다음 달 26일에 차장님께서 개인 휴가를 내라고 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혹시 알려줄 수 있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준의 아버지가 국장일 때였어도 무서웠을 텐데 이제는 차장이니, 두려움은 그만큼 더 커졌을 거였다.

“권력 남용이 심하십니다.”

“그 녀석은 내가 잠깐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새 그걸 너한테 이르냐!”

“그게 부탁입니까? 협박이지.”

카트를 밀며 걷던 민준이 코너를 돌아 유아용품 매장 앞에 멈춰 섰다.

인형 옷처럼 작고 예쁜 옷과 신발, 모자가 곳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두 남자는 앙증맞은 물건들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봐라, 저렇게 옷이 많은데 어떤 색깔 옷을 사야 하는지 알 수 없잖냐.”

“……파란색이요.”

“응?”

“남자아입니다.”

“뭐?”

김 국장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 민준을 쳐다보았다.

“너 아까 모른다고 했잖아! 안 가르쳐 준다며?”

“안 가르쳐 준다고 했지 모른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안 가르쳐 줬는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냥 어떻게 알았습니다.”

민준은 설레는 얼굴로 진열대 위에 놓인 하얀 아기 신발을 들어보았다. 그는 이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이렇게 작은 발로 걸을 수 있을까요?”

“글쎄다, 내가 보기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아버진 경험자시잖아요, 모르세요?”

“기억이 안 나는데…… 네 엄마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아기 신발을 사고 유아용품 매장을 나온 두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장난감 매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기차를 좋아할까요? 보통 남자애들은 기차 좋아하잖아요.”

민준은 투명 유리 케이스 안에 놓인 장난감 기차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차는 내가 사줄 테니 어떻게 아들인 걸 알았는지나 말해.”

김 국장 역시 장난감 기차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재킷 안쪽에서 서둘러 지갑을 꺼내며 대꾸했다.

“저는 단지 대화 녹음 파일을 음성 분석 요원에게 넘겼을 뿐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공부만 오래 해서 그런지 거짓말이 서툴고 감정 표현이 아주 정직하시더라고요.”

“나보고는 아까 협박이고 권력 남용이라며!”

“차장님 말은 협박으로 들리고 동료의 말은 부탁으로 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차는 분홍색으로 사주세요, 아버지.”

“남자아이라며 왜 분홍색이야?”

“그래도 아직 모르잖아요, 혹시 여자아이일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태어날 아이가 남자아이건 여자아이건, 건강하게만 태어나 준다면 그는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이왕이면 설을 닮은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아주 잠깐 아쉽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생각은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설을 닮은 남자아이도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참, 백건우 그놈은 왜 그렇게 우리 집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동네로 이사 왔나? 내가 밤늦은 시각에도 동네에서 몇 번이나 만났다니까.”

“그 동네에 자주 올 일이 있나 보죠.”

“그 녀석도 참, 얼른 결혼이나 할 것이지 다 늦은 밤에 남의 동네는 왜 돌아다녀?”

“아버지는 백건우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건우 정도면 괜찮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

“사위 삼아도 괜찮을 정도로요?”

민준이 슬쩍 김 국장을 떠봤다. 아버지가 건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생각보다 서연의 사랑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 국장은 곧장 정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넌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

“제가 뭘요?”

“백 회장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며늘아기한테는 또 어떻게 했고. 물론 그게 건우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놈은 백 회장 아들이야. 내 말은 건우가 남이라 괜찮다는 거지 우리 집하고 어떤 형태로든 인연이 이어지는 건 반대다.”

민준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럴 리가 없는데 얘기가 너무 쉽게 풀어진다 싶었다.

“그래도 연좌제 폐지된 게 언제인데요. 백건우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아버지.”

“내가 건우를 왜 미워해? 안 미워한다니까? 그런데 넌 또 왜 이렇게 건우한테 호의적이야? 너 백건우 싫어했잖아.”

“저 그 사람 안 싫어합니다, 결혼을 하니 확실히 마음이 너그러워지네요.”

그때 딩동 하고,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김 국장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읽더니 큭 웃으며 그에게 문자 내용을 보여줬다.

-오늘 저녁에 남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했어요. 엄마한텐 이미 말했으니까 일찍 들어오세요.

“서연이가 남자 데리고 온다는데? 너도 나랑 같이 가자.”

“아니요, 전 안 갑니다.”

“문자 내용 안 보여? 오늘 집에 서연이 남자친구가 온다잖아,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 않아?”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전 지금 컨디션이 아주 안 좋고요, 서연이 남자친구야 다음에 따로 보면 되고요.”

민준은 오늘 밤 찬바람이 쌩쌩 불 그곳에 제 발로 걸어갈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어디서 찾아보니 임신부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임신부는 아니었지만, 임신부의 남편으로서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설마 둘이 벌써 결혼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서연이하고 비슷한 또래라면 아직 결혼하긴 좀 이르잖아.”

“글쎄요.”

“정말 같이 안 갈래?”

“네, 정말 같이 안 갑니다.”

민준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자 김 국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훑어보았다.

“조국이 아이스크림 사오라고 했는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어디에 있더라?”

그는 김 국장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카트를 밀며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

“그래서 정말 안 가려고요?”

“응. 아.”

“나도 손 있어요.”

“알아, 그래도.”

민준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설에게 내밀었다. 그는 비록 자신은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녀는 입덧을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님이 건우 씨를 많이 반대하실까요?”

“반대를 하실 건 분명한데 서연이한테 그 이유를 설명할 순 없으니 난감하시겠지.”

“당신 설마, 지금 이 심각한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거예요?”

“난 액션 영화를 좋아하거든.”

민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

건우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손에서 자꾸 땀이 나, 그는 꽃바구니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며칠 전 서연은 조카가 생겼다며 그에게 심통 난 얼굴을 했다. 건우보다 나이가 두 살 적은 오빠도 이제 애 아빠가 되는데 마음이 급하지도 않냐고 물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는 그를 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결론을 내린 서연은 건우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요.’

‘서연 씨!’

‘아니면 결혼하든가요. 건우 씨가 만약 나랑 결혼할 마음이 있다면 이번 주 주말에 우리 집으로 인사 와요.’

‘인사요?’

‘우리 부모님한테 말이에요.’

‘…….’

그는 절대 서연과 헤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꽃바구니를 들고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거였다.

‘국장님이 나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건우는 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는 서연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근처에서 김 국장과 몇 번 마주쳤는데도, 김 국장은 건우와 서연을 조금도 연관 짓지 않았다.

그는 혹시 이 동네로 이사 왔느냐고 물었고, 건우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럼 친한 지인이 이 동네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김 국장은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건우는 그게 꼭 그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한 건우가 이윽고 결심한 듯 초인종을 꾹 눌렀다.

-누구세요?

“백건우라고 합니다.”

-잠깐만요, 지금 문 열어드릴게요.

“…….”

대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건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발을 내디뎠다.

**

“누구라고?”

“백건우라고 한 것 같아요, 오늘 인사 온다던 그 사람인가 봐요.”

“백건우라고? 걘 내가 아는 녀석인데…… 우리 집엔 웬일이지? 당신은 있어, 내가 나가 볼게.”

그 시간, 서연은 샤워를 하고 예쁜 옷을 꺼내 입은 후 화장대에 앉아 치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건우가 그녀의 집에 인사를 하러 오는 중요한 날인데 평소처럼 입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연은 그가 1층에 이미 와 있는 줄도 몰랐다.

김 국장이 1층 현관문을 열자 그 앞에 건우가 서 있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건우를 쳐다보았다.

“백건우, 주말에 우리 집엔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국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른 날 다시 왔으면 좋겠는데. 오늘 우리 집에 중요한 손님이 올 예정이라서 말이야.”

“중요한 일입니다, 국장님.”

“…….”

김 국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건우가 이렇게 예의 없이 다짜고짜 집을 찾아올 녀석은 아닌데 왜 지금 현관에 서 있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김 국장의 시선이 건우의 손에 들린 꽃바구니에 가 멈췄다.

“……중요한 일이라면서 꽃을 사 왔어?”

“아…… 이건 어머님께 드릴 겁니다.”

“어머님?”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김 국장이 생각하기에, 이 집에서 건우가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네. 오늘 전 서연 씨 부모님을 뵈러 왔습니다, 국장님.”

그는 잠깐 숨을 멈추고 건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 국장이 지금 들은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건우는 지금 서연이 만나는 남자의 자격으로 그의 집에 왔다는 거였다.

김 국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건우야.”

그리고 오랜만에 예전처럼 성을 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말했지만 오늘 우리 집에 중요한 손님이…….”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말 안 들려?”

“국장님!”

서연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건우 씨!”

2층에서 계단을 발랄하게 뛰어 내려오던 그녀가 현관에 건우가 와 있는 걸 보고 반색을 한 거였다.

“지금 왔어요? 왔으면 왔다고 얘길 해야죠.”

서연은 달려가 그의 팔짱을 끼며 생긋 웃었다.

“우리 아빠한테 인사했어요? 아빠, 건우 씨라고 해요.”

“…….”

“…….”

김 국장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건우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 민준이 집에 같이 오자는 말을 거절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 녀석은 이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던 거였다.

민준에 대한 응징은 차후로 미루더라도, 그는 이제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서라도 둘의 만남을 반대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안으로 들어오지.”

김 국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뱉은 후 뒤돌아섰다.

“우리 아빠 괜히 저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우 씨는 하나도 쫄 것 없어요.”

그의 등 뒤에서 서연이 건우에게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김 국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손을 짚었다.

**

“서연이한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이란 얘기는 했나?”

“응? 아빠가 건우 씨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요? 어떻게요?”

건우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지만 건우는 마주 앉은, 그녀의 아버지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건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회사로 들어오기 전에 국장님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나도 국장님이 서연 씨 아버님이라는 걸 알고 놀랐어요, 서연 씨.”

“그게 정말이에요, 아빠?”

“……그래, 맞아. 예전에 아빠랑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물론 백건우가 우리 집에 인사를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진짜 신기해요! 오빠가 이걸 알게 되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

“…….”

서연은 발을 구르며 좋아했지만 김 국장과 건우는 굳은 얼굴로 서로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신이 난 목소리로 건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건우 씨, 이제 얼른 말해요!”

“……무슨 말을요?”

“아빠한테 결혼하겠다고 말하라고요! 그런다고 했잖아요.”

“뭐? 둘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김 국장이 기가 찬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백건우, 설마 서연이와 정말 결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두 분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전 하고 싶습니다, 국장님.”

“난 건우 널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널 좋아하지만 그건 네가 남일 때 얘기야.”

“아빠!”

“여보!”

주방에서 나와 찻잔을 테이블로 내려놓던 그의 부인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손님을 앞에 두고 남편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얘기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감정의 동요 없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건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만 묻자, 민준이도 이걸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습니다.”

“속도 없는 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데, 민준이 그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건우를 모른 척해준 건지…….

김 국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건우 너 정도면 우리보다 훨씬 좋은 집안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거다.”

“아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서연이 넌 가만히 있어.”

“아빠!”

참다못한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빠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도대체 건우 씨를 왜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물러날 줄 알고?’

마음을 굳게 다잡은 서연은 김 국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좋아요! 난 어차피 건우 씨가 아니면 이제 다른 남자랑 결혼 못 하니까 아빠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가 연극을 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보통 재벌 2세나 3세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와서 하는 대사였지만, 서연은 지금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일순 조용해졌다.

건우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얼굴로 서연을 올려다보다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왜?”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정도의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건우가 아닌 다른 남자와는 결혼을 못 한다는 건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었다.

“너, 너, 너 이 자식! 이 미친놈이 기어이!”

갑자기 눈이 뒤집힌 김 국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찾은 골프채를 쥐고 그를 향해 높이 쳐들었다.

“여보! 안 돼요! 일단 이 사람 말을 좀 들어 보…….”

“놔! 내가 오늘 저 자식 죽여 버릴 테니까!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딸을 임…… 임신!”

“…….”

건우는 분을 못 참고 골프채를 치켜든 김 국장과 그를 말리려 애를 쓰는 그녀의 어머니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저걸로 몇 대만 맞으면 서연 씨와 결혼을 할 수 있는 건가?’

건우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과거에 요원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두들겨 맞거나 어디 한구석 부러지는 고통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저, 저 자식이 지금 내 앞에서 웃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지금 웃음이 나와? 놔! 놓으라니까!”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서연 씨 책임지겠습니다, 아버님.”

건우는 눈꼬리를 내리며 기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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