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바쁜 황녀님
?제1화. 프롤로그. 나는 오늘 죽는다 (1)
나는 오늘 죽는다.
나의 잘못된 선택과 어리석은 고집으로 인해.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결과는 나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인제 와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제국의 황녀였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고,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지금 내 눈앞에 나의 오라버니이자 제국의 황제 루이스, 그가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다.
“…아, 안 돼…….”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늦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황궁에 도착해 루이스를 찾았을 때는 이미 헤레이스의 검이 루이스를 관통한 후였다.
헤레이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이스의 것이 분명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잡은 채.
“마,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 발을 바닥에서 겨우 떼어내 다가갔다. 한 발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내 몸은 진창에 뒹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계속 발걸음을 내디뎠다. 헤레이스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 루이스의 앞까지.
내가 다가갔을 때는 이미 루이스의 눈이 감겨 있었다.
“폐하!! 폐, 폐하. 눈을 뜨세요. 제발…눈 좀 떠 봐요!”
그를 부르짖는 내 몰골은 처참했다. 멀쩡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몇 명의 기사들을 넘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곳에 오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로지 여기까지 와야 한다는 일념 하에 앞만 보고 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내 머리는 이미 산발이었고 옷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오라버니, 하나뿐인 나의 편, 루이스가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가고 있는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그때였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루이스의 눈꺼풀이 떨렸다. 몇 번이고 흔들리던 눈꺼풀이 결국 힘을 내어 움직였다. 루이스의 눈동자는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다.
“폐, 폐하…!”
나는 곧바로 루이스에게로 달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루이스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나를 볼 수 있도록.
루이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힘겹게 뜬 눈이 조금 커지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또렷해졌다. 루이스는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힘겨운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루이스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너…여긴 어떻게…?
하지만 루이스는 말을 끝까지 이어 가지 못했다. 루이스가 입을 여는 순간, 입안에서 피가 솟구치며 쏟아졌으니까.
“피…피가…!”
그 피는 루이스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던 내 얼굴에 쏟아졌다. 내 손은 루이스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려 할수록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닦으면 닦을수록 피를 뒤집어쓸 뿐이었다.
“폐하…피가…피가 멈추지 않아요……. 피가…멈출 생각이 없나 봐요…….”
“그만…컥! …크윽…해라…….”
루이스가 내 팔을 잡으며 말렸다.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을 만큼 힘이 빠진 게 보이는데도 내 손을 잡았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도저히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점점 피로 범벅이 되는 것은 내 손뿐만이 아니었다. 루이스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티세요……. 제가 어떻게든…!”
“그건 안 됩니다.”
내가 절박하게 루이스에게 말했을 때였다. 내 말을 끊고 헤레이스가 끼어들었다.
루이스의 눈동자가 나에게서 헤레이스로 이동했다. 루이스의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은 나와는 달리, 헤레이스는 여전히 우리들 앞에 서 있었다. 높이 솟아 있는 헤레이스를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는지 루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루이스의 모습을 지켜볼 뿐, 헤레이스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폭정을 일삼은 황제가 죽을 자리는 이곳 황궁입니다. 이곳을 나서는 순간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 더 비참하지 않겠습니까.”
헤레이스는 시리도록 냉정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모두 맞았다. 사실 루이스는 좋은 황제는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루이스가 헤레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피를 쏟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거만하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루이스가 눈썹을 위로 꿈틀했다.
“나는 네놈이 맘에 안 들어.”
“…….”
루이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순수하게 싫다는 듯이.
“그러게, 내가 뭐랬어. 저딴 놈하고 결혼하면 분명 후회할 거라고 했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인제 그만….”
나는 루이스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피가 조금이라도 멎기를 바라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더 많은 양의 피를 뿜어냈다. 하지만 루이스는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루이스가 힘겹게 나를 불렀다.
“에일린…….”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때 내가 잡고 있지 않은 루이스의 반대편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오라버니….”
“그래도 후회하지 마라. 이건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니.”
루이스는 마지막만큼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혼자 남아 루이스의 죽음을 자책할 나를 달래기 위해. 그리곤 그 말을 끝으로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설마…….’
피를 흘리면서도 이어 가던 말이 멈췄다. 루이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루이스의 손을 겨우 부여잡았다. 그래도 진정되지는 않았다. 루이스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갖다 댔다.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루이스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고요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하필 오늘 날씨는 왜 이리도 맑아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내게 얄팍한 희망을 가질 기회 따위 주지 않기 위해서 살랑바람조차도 불지 않는구나.
“폐하! 제발…제발 눈 좀 떠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오라버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평소대로라면 내 말에 한껏 으스대며 그것 보라며 잘난 체를 할 텐데. 하지만 루이스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없었다. 헤레이스의 반역이 성공한 것이다.
“부인.”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하지만 물에 잠긴 것처럼 내 귀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지금 내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는 것은 오로지 루이스의 존재뿐이었다.
“폐하. 아니, 오라버니. 이제 말 잘 들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세요. 이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대로 루이스를 놓을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그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부인을 공작가로 모셔라.”
“놔! 놓으라고! 당장 놓으란 말이다!!”
헤레이스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내 양쪽 팔을 붙잡았다. 루이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격렬하게 거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대로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반역은 보란 듯이 성공했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나의 오라버니이자 황제였던 루이스는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나는 더 이상 황제의 동생인 황녀가 아니었다. 그러니 더 이상 내 말과 행동에는 어떤 힘도 없었다.
“물러가 계세요.”
헤레이스의 냉정한 시선과 말이 내게 닿았다.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그저 성공한 반역의 제물에 불과했다.
* * *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에 반역이 일어났고, 영원할 것 같던 황제 루이스를 죽이고 귀족들이 승리했으니까.
그들에게 나는 공작 부인이 아닌 황제의 여동생인 황녀였다. 그러니 내가 죽는 것 역시 당연한 순서였다. 다만, 반역 공신이 되어 나를 죽일 사람이 나의 부군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헤레이스와 같은 저택에 살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가 반역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공작가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황가에서 직접 선정하는 독점 수입, 독점 채굴, 독점 유통 등 각종 혜택을 쥐여 주면서.
그는 내 도움으로 얻은 부로 수많은 무기를 사들였고, 존재 자체도 희미했던 이복형제 에드문드 황자를 황위에 올렸다.
에드문드 황자는 멀리 있는 영지에 유배되어 목숨만 부지한 채 숨죽이고 살던 존재였다. 그는 욕심은 있지만 무능했다. 또한, 루이스를 두려워했다. 절대로 스스로 황제가 될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헤레이스와 귀족들이 나섰을 테지. 에드문드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은 것에 불과하고. 보지 않아도 눈에 빤히 보이는 일이었다.
그 대가로 헤레이스는 반역 공신이 되어 황제 아래 가장 큰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내가 준 것으로는 부족했던 건가.
‘하지만 언제부터…?’
그가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내 눈을 피해 갑자기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루이스를 구하지도 못했다.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반역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귀족 연합군의 병사들이 제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역의 중심에는 헤레이스가 있었다.
그는 내게 모든 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고,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된 것 역시 그가 반역에 성공하고 난 후였다.
환호하는 귀족 연합군에 둘러싸인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방심하게 만들고 철저하게 속인 것이었다.
내 사랑을 기만하고 비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