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3장. 안 해! (9)
‘갑자기 왜 울지?’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헤레이스를 보는데, 그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한쪽은 서럽게 울고 한쪽은 냉정한 얼굴인 거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미 닫힌 문 사이로 내가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을 때였다. 내 앞으로 깊은 그림자가 생겼다. 헤레이스가 위에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회귀 전에 헤레이스는 단 한 번도 내게 내연녀에 관한 해명이나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사과하지 않는 사람을 나 혼자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용서했다. 넘치는 소문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카일라 영애와는 일면식이 있을 뿐 어떤 사이도 아닙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헤레이스는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과에 이어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난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고, 물어본 적도 없는데.
내가 시큰둥해 보였는지 헤레이스는 내 안색을 살피면서 계속해서 한마디씩 덧붙이고 있었다.
“잘 정리했으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한 변명을 계속 이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헤레이스가 변명을 멈췄다.
방금 전, 문 사이로 봤던 카일라가 우는 모습이 떠올랐다. 회귀 전에도 그녀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 동시에 패악질을 부렸었다. 그때도 헤레이스와 헤어진 후였지.
하지만 그 일이 있었던 날은 지금 기준으로는 좀 더 후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 * *
나와 헤레이스가 탄 마차가 출발하고 약간의 덜컹거림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벌써 공작가에 도착했을 리는 없는데,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앨버트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벌써 도착했다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공작가가 아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코끝을 스치는 맛있는 냄새.
마차가 멈춘 곳은 2층 건물의 식당이었다. 손님 대부분은 평범한 백성들이었지만, 종종 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일반 백성들이 주 고객층인 식당에는 보통 귀족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귀족들이 찾아올 때는 굉장한 맛집이라는 뜻이었다.
“왜 식당 앞이지?”
문제는, 왜 이곳으로 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물음에 앨버트가 대답했다.
“최근에 개업한 식당입니다. 황궁 주방장 출신이 개업한 곳으로 입소문이 나서 인기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네?”
“공작가가 아니라 왜 여기로 온 건지를 물은 거야.”
내가 재차 묻자 앨버트가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이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도 되는 건가.
앨버트가 아니라 뒤늦게 마차에서 내린 헤레이스가 내 옆에 나란히 서 내게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첫 외출이니, 함께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아 미리 지시했습니다.”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첫 외출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 딱히 의미도 없는 외식이라니. 그것도 헤레이스와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을 본 헤레이스가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불편하십니까.”
내 얼굴이 안 좋은 것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럼 편할 리가. 당연한 것을 물었다. 나는 바로 거절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식당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음식 냄새가 강하게 퍼졌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식당에서부터 나오는 냄새가 너무 달콤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저녁이긴 했다.
앨버트가 고민하고 있는 내게 말했다.
“식사를 하고 갈 것이라 말해 두어서, 지금 공작가로 출발해서 식사 준비를 하면 밤이 깊을 것 같습니다.”
망했다. 사실, 나는 음식 앞에서 약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맛있는 식사에 모든 것을 잊고 힘을 얻는다. 그럴수록 배고픈 것을 참는 것은 내게 고문에 가까웠다.
할 수 없지. 공작가에서 하는 식사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식당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나와 헤레이스는 2층에 있는 자리로 안내받았다. 음식은 추천 메뉴로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는데, 종업원들이 치우고 있는 그릇이 모두 비워져 있었다. 기대감이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구경하는 것도 잠시였다. 나와 헤레이스 사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럴수록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왔으면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어색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였다. 종업원들이 음식을 가지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종업원들이 음식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음식이 늘어날수록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종업원이 내가 가리킨 음식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 주방장님의 특제 소스로 만든 훈제 연어말이 입니다.”
그가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이 음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황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 요리를 개발한 황궁 요리사가 그만두어 더 이상 맛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설마…?”
내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갑자기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그때였다.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
“주방장!”
역시나였다. 주방장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내게 달려왔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전하를 여기서 뵙다니…정말이지…크흡…영광입니다!”
주방장은 감격에 찬 나머지 목소리가 떨렸다.
“나야말로. 여기서 주방장을 볼 줄은 생각도 못했어.”
내가 주방장의 요리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갑자기 그만두었다고 해서 내심 서운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주방장도, 주방장의 요리도!
“제가 그때 인사도 못 드리고 쫓겨나서…이렇게라도 뵐 수 있어서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주방장이 구슬픈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거대한 몸에 험악한 인상을 가진 주방장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주방장은 예상외로 감성적인 면이 있으니까.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주방장이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내가 위로하자 그는 언제 울적했냐는 듯이 고개를 활짝 들었다. 이미 그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고 입술은 양 끝으로 올라가 있었다.
“아닙니다! 황녀 전하께서 제 요리를 좋아해 주셔서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주방장은 황궁에서의 일들을 떠올리는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편식한다고 주방장을 자르다니. 너무한 처사였어.”
“모두 제 능력이 부족한 죄입니다.”
“아냐, 주방장의 음식은 정말 맛있어.”
사실, 주방장이 황궁에서 나가게 된 이유는 내 편식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내가 주방장의 요리만 먹으면서 싫어하는 음식은 손도 대지 않자, 그 모습을 본 루이스가 주방장을 내쫓았다.
오랜만에 만난 주방장과 한창 얘기 중인데, 헤레이스가 끼어들었다.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인가요.”
“이런, 공작님이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기본적으로 채소를 잘 안 드시죠.”
“주방장!”
“특히 당근을 싫어하시고요.”
내가 급하게 불렀지만, 주방장은 이미 넙죽 대답한 후였다. 내가 주방장을 노려보자 그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이마에 흘린 땀을 닦아 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물러났다.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다니! 하지만, 주방장은 육중한 몸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주방장이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음식이 테이블에 세팅됐다. 내 취향이 반영된 듯 음식의 대부분이 고기 위주였다. 내가 흡족한 얼굴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음식이 하나 더 들어왔다.
“아직 안 나온 게 있었나.”
과연 무슨 음식일까. 두근두근, 기대를 잔뜩 하며 지켜보았지만, 음식의 정체가 드러나자마자 인상이 구겨졌다.
‘이거 지금 나에 대한 도전인 거지?’
마지막 요리는 방금 전에 내가 싫어하는 음식으로 밝혀진 당근이 잔뜩 들어간 스테이크였다.
아니 스테이크에는 고기만 들어가야지, 왜 당근이 쓸데없이 주위에 가득한 거야? 심지어 소스도 딱 보니 당근 퓨레였다.
헤레이스가 보란 듯이 당근을 한입 먹으면서 말했다.
“맛있네요.”
이거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 맞지? 아닐 수가 없어.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주문에도 없는 요리를 일부러 내보낸 주방장도. 내가 당근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보란 듯이 콕 집어서 먹는 헤레이스도. 나를 약 올리는 게 분명했다.
그냥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괜한 오기가 생겨서 억지로라도 당근을 먹으려 포크로 푹 집으려고 하는데, 헤레이스의 나이프가 저지했다. ‘지금 일부러 내가 싫어하는 거 시켜서 시위하면서 막기는 왜 막아!’라는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눈빛까지는 숨기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면서 항의하는데, 헤레이스가 당근 스테이크 바로 옆에 있는 그릇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가 내민 그릇은 최고급 송이버섯을 이용한 볶음 요리였다. 당근 스테이크와 비교하면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이긴 한데. 이걸 왜 내미는 거지?
내 눈빛을 읽었는지 헤레이스가 당근을 다시 하나 집어먹으면서 말했다.
“저는 버섯을 싫어합니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나를 흘깃 보더니, 당근 스테이크 요리를 앞으로 슬쩍 밀었다.
“싫으면 이걸…….”
“아뇨! 저 이거 좋아합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헤레이스가 마음을 바꿔서 당근 스테이크를 다시 내밀까 봐 냉큼 송이버섯 고기볶음 요리를 가져왔다.
“그러니 제가 버섯을 공작님이 싫어하는 만큼 대신 먹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눈에 빤히 보이는 핑계였다. 헤레이스의 입가에 웃음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와 민망함이 감돌았지만 고기를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모든 것이 잊혀졌다.
‘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