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3장. 안 해! (10)
입안에서 풍미가 퍼지는 것이 역시 주방장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입안에서 음식이 맴돌수록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그래, 누구와 먹는 것 따위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저 음식이 맛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다.
한 점 삼키자마자 다시 한 점을 집으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른 척 무시하려는데, 어느새 헤레이스가 식사도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
이러다가 체할 것 같다. 결국, 식사를 멈추고 헤레이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러죠.”
“제가 그동안 부인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앞으로도 헤레이스가 나에 대해 잘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헤레이스의 뜬금없는 말이 이어졌다.
“부부는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인데 말입니다.”
헤레이스의 말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순간 놀랄 타이밍을 놓치기까지 했다.
부부 사이에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문제는, 나와 헤레이스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너무 놀라서 먹은 것도 없이 사레가 들렸다.
“켁-. 케엑…콜록. 콜록.”
“부인, 괜찮으십니까. 음식에 문제라도.”
“그, 그게 아니라…케엑…….”
‘첫째, 나는 분명 식사를 멈춘 상태였다. 두 번째,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헤레이스, 당신이다!’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식당 안에는 우리를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헤레이스가 내 등을 토닥이며 진정을 시키자 겨우 진정할 뻔한 속이 다시 지진을 일으켰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적응이 됐는지 좀 괜찮아졌다.
“이제 괜찮은 겁니까.”
“…네, 괜찮습니다.”
흘깃. 헤레이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나부터 열까지 당황스러웠다.
부부라니.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이라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보완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믿고 의지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정략적으로 가문에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아, 그렇구나. 나와 헤레이스는 후자인 건가.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나는 그의 가문이 무너지지 않게 재정적인 지원을 조건으로 결혼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힘을 내게서 얻은 것으로 반역을 일으켰으니까. 서로 보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주었고,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도움으로 반역을 막을 테니까. 과거에 당신이 했던 행동들을 기반으로.
헤레이스가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분명 헤레이스와 나는 서로 보완하는 역할이 되었다. 그 결과, 서로에게 비수를 찌르는 일이 되더라도.
나는 그를 향해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서로 보완할 수 있겠군요.”
“식사는 즐거우셨습니까.”
“굉장히요.”
내 대답에 헤레이스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나 역시 화답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헤레이스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 그건 나에 대한 태도였다. 갑자기 내게 관심을 가진다. 과거에 다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행동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나는 저절로 헤레이스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헤레이스가 달라졌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헤레이스의 행동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내가 물었다.
“왜 제게 잘해 주죠?”
내 말에 헤레이스는 대답은 하지 않고 잠시 나를 빤히 보았다. 당황하거나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담담하면서도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헤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부인에게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나도 모르게 헤레이스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희는 부부이지 않습니까.”
허울뿐인 부부. 어쩌면 그보다 이하. 그게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였다.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당장 그의 표정만으로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야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내가 아는 헤레이스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나와의 대화는 꼭 필요한 말만. 의무가 아니라면 함께 있는 것을 피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부라는 말을 하며 관심을 가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부부라는 말을 강조했다. 마치 우리가 다정한 부부라도 정말 될 것처럼.
* * *
마담 세실 의상실에 방문했을 때 카일라와 있었던 일들에 관한 소문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 루이스의 귀에도 곧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스로부터 황궁에 방문하라는 서신이 왔다. 명목상으로는 안부를 확인할 겸 한 번 오면 좋을 것 같다는 권유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당장 오라는 소환장에 가까웠다.
황궁에서 보낸 마차가 공작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와 헤레이스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저택 안에서 한동안 건강을 핑계로 방에서 나오지 못하던 이사벨이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오는 걸까. 이사벨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멀리서 휘청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나와 헤레이스 앞에 멈춰선 이사벨은 가련한 모습으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누가 봐도 동정심이 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사벨이 내 손을 꼭 붙잡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에일린. 폐하께 말 좀 잘 전해 주세요.”
당장이라도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방울이 툭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혹여라도…헤레이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시는 건 아닐지 얼마나 걱정되는지…….”
그녀는 자식을 걱정하는 모정을 어필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다시 훔쳤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애처로운 모정이었다.
“설마. 폐하께서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 해를 입힌다는 뜻인가요?”
하지만 그녀의 모정은 역으로 황제에 대한 모독이기도 했다. 그것도 그의 누이인 내 앞에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설사, 루이스가 헤레이스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으로 불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루이스를 말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내가 냉정하게 받아치자 이사벨의 얼굴이 순간 돌변했다. 가련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실수를 했다가는 큰일이라는 것을.
이사벨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가다듬고 아들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는 모성애를 연기했다.
“에일린, 내 뜻은 그런 게 아니라 헤레이스를 걱정해서…….”
역시나, 이사벨은 헤레이스를 끌어들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를 엮으면 내가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를 넘어서 오히려 내가 더 죄송해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사벨은 특유의 가짜 눈물을 글썽였다. 그 눈물 한 방울로 자신을 가련하고 불쌍한 시어머니로, 나를 못되고 멋대로인 며느리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이미 그런 식으로 내 입지를 좁혀서 나를 이 안에서 고립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눈물 연기에 속아 넘어가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제 오라버니이신 황제 폐하께서 보고 싶다고 해서 가는 길입니다. 위험할 것이 뭐가 있다고 눈물까지 흘리십니까.”
“그, 그것은 모두가 다 알지…!”
이사벨이 자신의 편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돌아봤을 때였다. 괜히 엮이기 싫은지, 하인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고 있었다.
그래, 원래는 이쪽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그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시녀들 역시 내 눈치를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도 이 상황에 나서주지 않을 것 같았는지, 이사벨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리고 분하지만 차마 어쩌지는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헤레이스가 끼어들어 말했다.
“부인, 오해하지 마세요. 제 걱정을 하느라 말이 잘못 나오신 겁니다.”
그는 이래봬도 효자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사벨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그, 그래요.”
자신의 아들이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지만,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이사벨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것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얼굴에 침 뱉는 행동인 줄도 모르고.
나는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몸을 돌려서 마차를 탔다.
4장. 황궁 생활 (1)
황궁에 도착했을 때, 시종장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오라버니가 병사 한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일방적인 공격에 가까웠지만.
과연 우리가 도착한 지금 루이스가 대련을 하고 있는 게 우연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폐하, 공작 부부가 도착했습니다.”
시종장이 고하자, 우리가 온 줄도 모르고 몰두하고 있었던 루이스가 멈췄다. 시녀가 내미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다가왔다.
헤레이스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헤레이스를 흘깃 한 번 보고 바로 내게 다가왔다.
“오는 길은.”
무심한 얼굴과 목소리였지만, 루이스는 내가 오는 동안 불편한 것은 없었는지 물어본 것이다. 오는 길에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폐하의 배려에 불편함 없이 올 수 있었습니다.”
“편하게 왔습니다.”
헤레이스가 최대한 예를 갖추며 답했다. 뒤이어 나 역시 비슷한 대답을 했다. 같이 온 사람이 불편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편했다. 그러니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떤가. 내 상대가 되어 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