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4장. 황궁 생활 (6)
에이 설마, 싶으면서도 왜 의심이 사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루이스를 불렀다.
“폐하.”
사람이 없을 때는 ‘오라버니’라고 부르지만, 보는 눈이 많을 때는 언제나 ‘폐하’라고 불렀다. 루이스는 그걸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내가 정해 놓은 규칙이라는 것을 알고 별말은 하지 않았다.
“왜.”
내가 부르자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봤다. 지금 저거, 질문을 차단하는 거다.
“…아, 아닙니다.”
괜히 위축되어서 꼬리를 내렸는데,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다.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일하러 가나 했더니, 역시나 루이스가 향한 곳은 기사단원들이 모여서 대련을 하고 있는 연무장이었다.
“몸이나 좀 풀어 볼까.”
‘좀 전까지 사냥터에서 한 건 그럼 뭐지?’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여기서 함부로 까불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걸 몸소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루이스가 나를 이 훈련장에 끌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러더니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억지로 훈련을 시켰다.
엄청난 몸치인 내가 스트레칭부터 기본기를 배우는 데까지는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몰아붙이던 그 스파르타식 교육법이란.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다. 그때 대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짜 토할 것 같았다’로 설명할 수 있다.
“에일린.”
“예, 폐하.”
“내 공격을 한 번만이라도 막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해 주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건데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에 바로 포기했다.
대신 과연 내가 루이스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열심히 고민해 봤다. 도저히 무리일 것 같은데.
“싫어? 싫음 말고.”
루이스가 당장이라도 다시 나갈 기세로 돌아섰다. 안 되지.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하면 안 되지!
“해, 해요! 합니다!”
“그래.”
루이스가 씨익, 미소를 짓는데…뭔가 낚인 기분이다. 내가 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원의 검집을 내게 던졌다.
“으헥!”
“검 똑바로 잡고.”
이상한 괴성과 함께 검을 받는 사이에, 어느새 루이스가 검을 들고 있었다.
악몽이 떠오른다. 루이스와 하는 대련은 말만 대련일 뿐. 루이스를 위한 심심풀이 장난에 가까웠다. 실상은 심심한 루이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 나가떨어진 내가 항복을 선언하게 되는.
‘그래도 딱 한 번만 버티자.’
검을 꽉 잡고 이를 악물었다.
루이스는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바닥에 뒹굴고, 넘어졌다. 어느새 나는 만신창이가 돼서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 뱉었다.
“하아…하아….”
“벌써 포기냐.”
루이스가 나를 떠보고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 검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누가 포기라고 했나요.”
“눈빛은 좋군.”
루이스가 내 눈빛을 보더니 칭찬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어쩐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딱 한 번, 하고 맙니다.”
나는 의지를 불태우며 루이스를 향해 달려갔다.
휘청-, 또 다시 휘청-, 하지만 제대로 한 번 검을 맞대지도 못한 채 설렁설렁 움직이는 루이스를 쫓다 나 혼자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루이스가 다시 한번 나를 도발했다.
“아직 할 수 있는 거냐.”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내 몰골만 만신창이였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몸은 내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내 각오는 오래갈 수 없었다. 다리라도 움직여야 뭐라도 할 텐데, 이제 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졌어요. 항복, 항복입니다.”
결국, 한 번을 막기는커녕 도망치기 바쁘다 지친 내가 바닥에 드러누워서 항복을 외치고서야 끝났다. 옆에서 에밀이 머리카락에 흙이 묻는다고 난리가 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도저히 꼼짝도 못 하겠다.
루이스가 물었다.
“벌써?”
벌써라니, 그 벌써 만에 나는 탈진할 것 같은데. 왠지 억울했다.
“하아…. 하…. 마음대로 하세요.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숨부터 제대로 쉬고 싶었다. 그 모습을 루이스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아…하아…. 하아아….”
“체력이 그렇게 약해서야.”
“…….”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체력이 약한 게 아니라 루이스가 괴물 같은 체력이라고. 하지만 그런 입씨름을 할 기운도 없었다.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자, 루이스가 돌아섰다.
“탈수 증세가 있을 수 있으니 물 잘 챙겨 먹이거라.”
“네, 폐하.”
에밀이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루이스가 만족스러운 듯이 팔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몸도 좀 풀었겠다…….”
“…!”
난 루이스가 몸을 풀었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녹초가 되었는데 오전부터 사냥하고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른 게 겨우 몸풀기였다니.
그때, 루이스가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이제 일하러 가 볼까.”
“네…? 근데 저 한 번도 못 막았는데…….”
이건 또 무슨 변덕이지, 다른 속셈이 있는 건가. 루이스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이건 이거대로 의심스러웠다.
내가 루이스를 봤을 때였다. 오히려 루이스가 나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설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무슨 말 같지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거냐는 말이 루이스의 시선만으로도 완벽하게 전달이 됐다. 그 조건을 먼저 내민 사람이 누군데!
“고생했어. 푹 쉬도록.”
마지막 말은 에밀에게 말한 루이스가 훈련장 밖에서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율레스 재상과 함께 돌아갔다.
“…하아.”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는 나는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천장 삼아서 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내 혼을 빼먹는 오라비 루이스의 점점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마. 이제 일어나세요. 저희도 돌아가야 합니다.”
분명 에밀의 입 밖으로 소리 나는 말은 이건데 입 모양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채신머리없이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당장 일어나세요!’
에밀이 왜 이렇게 화를 내지. 생각할 때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원래 기사단이 훈련하는 곳이고, 지금도 그 기사단원들이 주위에 바글거렸다. 그 기사단원들의 시선이 안 보는 척 다 나에게 향해 있는 것이 뒤늦게 느껴졌다.
“아……. 응.”
‘이게 웬 창피야, 체통 없이. 그것도 황녀라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잠시. 사실 예전에 연무장에서 검술을 배울 때-사실 지금 기사단원들은 그때는 없었던 신참이 대부분이지만-는 이것보다 더 추한 꼴을 이미 많이 보였었다. 나는 열심히 스스로 이 상황을 합리화시키며 연무장을 벗어나는 내내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죽을 듯이 노력했다.
연무장을 벗어나자마자 좀 전의 대련으로 온몸이 녹초가 된 내가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며 다시 바닥에 주저앉은 것은 에밀과 나, 단둘만의 비밀이었다.
“몰라. 죽어도 못 움직여.”
이대로는 루이스 쫓아가려다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나 설마 황궁에 있는 내내 이러는 건 아니겠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런다면 정말이지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괴로웠다.
“아, 지친다.”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침대로 돌진해서 그대로 쓰러졌다.
루이스에게 일을 시킨다니. 역시 무리였다. 온몸이 쑤셔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어디 한 곳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반나절 만에 이렇게 뻗다니.
내가 침대에 뻗은 채 움직이지 않자, 바닥에 던져 놓은 옷들을 주섬주섬 주우며 에밀이 다가왔다.
“아, 맞다. 그거 들으셨어요?”
“어떤 거?”
“헤레이스 공작님이 요즘 매일 같이 황제 폐하를 찾아온답니다.”
“폐하를…?”
뜬금없는 얘기였다. 루이스와 헤레이스의 조합이라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늦은 오후쯤에 찾아와서 폐하와 단둘이 술을 드시는데, 황궁을 나갈 때는 두 발로 걷지도 못할 만큼 취해서 나간답니다.”
“흐음……. 그래?”
“에게, 그게 다예요?”
“응?”
“궁금하거나 걱정되거나, 뭐 그런 거 없으세요? 전 엄청난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이야기보따리를 이따만큼 준비하고 있던 에밀이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도 조금 전에 공작님께서 도착했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으실 거예요?”
“나한테 찾아온 것도 아닌데 뭐.”
* * *
헤레이스의 얘기를 듣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문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니 당혹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에밀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게……. 이사벨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뭐…?”
“이사벨 부인께서 찾아왔습니다.”
에밀이 곤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사벨이 왜 찾아왔을까. 짧은 순간 동안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1번. 처량한 모습으로 눈물을 보이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며느리를 돌려서 욕하기 위해서.
2번. 대놓고 온갖 잘난 척을 하면서 비꼬기 위해서.
3번. 내가 부재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재정난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내게 손을 빌리려고.
어느 쪽이든 내가 그녀를 꼭 만나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잠시 문을 바라보며 생각한 끝에 답을 내렸다.
“지금은 바빠서 만날 수가 없으니, 중요한 일이면 기다리시라고 해.”
“…예!”
내 말을 이해한 에밀이 명랑하게, 그것도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로 아주 힘차게 대답했다.
과연 그 자존심에 내가 만나 줄 때까지 기다릴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세 번째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당장 여기까지 달려오거나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