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4장. 황궁 생활 (7)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이사벨 부인에게 다녀온 에밀이 그녀의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이런 어쩌지. 나는 저녁에야 시간이 날 것 같은데.”
나는 그 전에 이사벨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다리겠대?”
“네. 얼마든지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이사벨은 응접실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을 버텨야 할 것이다. 저녁이 되려면 반나절 정도 남았다. 한참 남은 것이다.
“그럼 그동안 뭐할까.”
“그러게요.”
내가 씨익, 웃었다. 에밀이 따라 웃었다.
오늘따라 한가로웠다. 루이스는 돌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처리해야 할 서류 역시 많지 않았다. 책을 읽을까, 차를 마실까 고민하다가 문 앞에서 한결같이 서 있는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 마실래?”
에밀이 기꺼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내가 에밀 외에 다른 시녀들에게까지 권하자 그녀들이 얼떨떨해하며 답했다.
“저, 저희도요…?”
“응. 차라도 한잔하면서 쉬어.”
이래도 될까,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권하자 시녀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물이 식으면 새로 가져오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차를 마시며 시녀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곧 황궁에서 열릴 예정인 연회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이번 연회 준비 때문에 시녀들을 차출하고 있습니다.”
“근데 왜 여기에서는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황후궁과 후궁이 비어 있으니, 그곳에 있는 시녀들로 충당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만나볼까.”
“네.”
내 말과 동시에 시녀들이 일어났다. 시녀 하나가 지금까지 마신 찻잔을 정리하고, 다른 시녀는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에밀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사벨을 데리러 갔다.
과연,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자신을 기다리게 한 괘씸한 며느리에게 화를 내며 들어올까. 아니면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타날까.
이사벨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나절이 흐른 후에야 나는 이사벨을 만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목소리도 나긋했다. 이사벨의 얼굴 어디에도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지루함이나 불쾌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사벨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 안부를 물었다.
“황궁 생활은 편안한가요?”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모든 것이 완벽하답니다.”
황궁은 당연하게도 모든 것이 좋았다.
이사벨이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집으로 언제 돌아올 건가요?”
황궁에서 잠시 쉬고 있고 곧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물었지만, ‘돌아갈 집’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다. 나에게 돌아갈 집은 심정적으로 시간적으로나 공작가보다는 황궁에 더 가까웠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거죠. 저는 이미 황궁으로 돌아왔는데요.”
내 대답에 이사벨의 손끝이 멈칫,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이사벨이 다시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누가 저를 기다리죠?”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이사벨의 손을 뿌리쳤다. 붙잡고 있는 손이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야 당연히 나와 헤레이스 공작이…….”
나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도 들었다.
“왜요.”
“…네?”
“왜 저를 기다리죠?”
대체 이사벨, 당신과 헤레이스가 나를 기다리는 거냐고 물었다. 이사벨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인 듯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이사벨이 힘겹게 쥐어짜낸 답을 말했다.
“그, 그야 이제 공작가의 안주인은 에일린, 그대이니 당연하죠.”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안주인이라….’
안주인이라고 하려면 그만한 권한과 책임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그동안은 왜 아무도 제게 공작가의 권한을 주지 않았던 거죠? 그 어떤 열쇠나 문서도 저는 받은 적이 없답니다.”
“모든 것이 아직 익숙지 않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주려고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거로 섭섭했다면 그대를 걱정한 내 마음이……. 흑.”
이사벨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곡해받은 것이 속상한 듯 눈물을 훔쳤다. 지겹도록 뻔한 연기였다.
“황궁에서 황후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던 저입니다. 그런 저를 걱정해 주신 것입니까?”
“그, 그게…….”
“아니면…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뼈가 담긴 말이었다. 이사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사벨이 속상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에일린.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건가요.”
자신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결백한 얼굴을 하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의심받고 싶지 않으면 권한을 넘기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사벨의 눈이 커졌다. 나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저를 걱정했다고 하셨으니, 이제 그 걱정거리가 없어지지 않았나요?”
“그건 좀…공작가는 워낙 빠듯한 살림이라서…에일린, 그대가 맡아서 하기에는 너무….”
이사벨이 자꾸만 말을 길게 늘였다.
내가 한 말은 그녀가 나를 정말로 공작가의 안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까지 그녀가 손에서 쥐고 내놓지 않던 것을 모두 내게 넘기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사벨의 눈치를 가장 많이 봤었다.
이사벨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쉽게 줄 수 없다 이거지.’
사실, 공작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결국 고용인들의 숨통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이사벨이 바로 내놓을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요즘 공작가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 위태롭답니다.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귀족들과의 경쟁에서도 점점 밀려나고 있고…….”
“그래서요?”
역시, 이사벨의 본론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것이고, 반나절이나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도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비위를 맞춘 것이었다. 내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에.
“그대가 황제 폐하께 말을 잘 좀 해서 지원을 받게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했는지 이사벨이 열심히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가가 안정을 좀 찾게 되면, 그때는…….”
방금 전에는 대답하기 곤란해서 말끝을 흐렸다면, 이번에는 고의였다. 공작가가 안정을 찾으면 자신이 쥐고 있는 권한을 내게 넘겨주겠다는 분위기만 흘리고, 정작 그런 상황이 오면 모른 척할 생각인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서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고 그런 뉘앙스만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고작 그런 말에 내가 낚여서 이사벨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면서.
나는 일단은 맞장구를 치는 척했다.
“이런, 최대한 안정이 됐으면 좋겠네요.”
이사벨이 내가 뒤에 뭔가를 더 이어 나가기를 바라는 기대감을 품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 그와 관련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차가 식었네요.”
다만, 마시던 찻잔을 내려놨다.
차는 따뜻할 땐 입안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하지만 식고 나면 온몸을 기분 좋게 감돌던 차향은 사라지고 어느새 쓰고 텁텁한 맛만 남게 된다. 더 이상 이사벨과 마주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에밀.”
내가 부르자마자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에밀이 바로 들어와 이사벨 앞에 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거다.
“부인께서 돌아가셔야 하니 안내해 드려.”
“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내 말에 에밀이 이사벨을 밖으로 안내했다. 정확히는 질질 끌고 갔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사벨을 반강제적으로 돌려보냈다.
“조심히 가세요.”
내 마지막 인사와 함께 이사벨의 모습은 내 앞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사벨이 왔다 간 후,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내일까지는 또다시 평화롭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황궁에 소란이 일어났다.
“황녀 전하! 어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녀 한 명이 달려와 내게 다급하게 말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대부분 하나였다. 루이스가 뭔가를 저지르는 경우!
“앞장서거라.”
나는 시녀를 뒤따라 루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녀는 최대한 빨리 나를 인도하기 위해 달렸다.
언제나처럼 루이스가 신하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달려갔는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내가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루이스와 헤레이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손에 검을 쥔 채로.
상황을 보아하니 방금 전까지 서로 검을 맞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서로…?’
설마, 내가 황궁으로 오기 전에 했던 서로 대련이라도 해 보자고 한 말 때문인가. 그것을 이 늦은 밤에 한 건가.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두 사람만 멀뚱하게 보고 있는데, 정작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곁에 시립하고 있는 시녀들을 힐긋 보며 혼잣말을 했다.
“역시나 데려왔군.”
시녀들에게 나를 데려온 것을 은근하게 눈치 주는 것이었다. 헤레이스는 태연하게 나를 향해 인사했다.
“부인.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갑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 그런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