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8장. 소문 (3)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루이스가 말했다.
“오늘은 공작가에서 하루 머무르지.”
“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내가 루이스와 시종장을 번갈아 봤다. 그런데 시종장이 시선을 피한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처음부터 루이스는 공작가로 오던 길에 갑자기 증발했던 것이다. 당황한 시종장은 원래 목적지였던 나에게로 달려온 것이었고.
어쩔 수 없지. 최대한 헤레이스와 부딪히지 않게 무사히 넘기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루이스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공작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마차였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당연하게도 헤레이스가 내렸다.
“여긴 어떻게….”
내가 놀란 눈을 하고 묻자, 헤레이스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미소 지었다.
“부인이 외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그것보다 굳이 마중이라니.
“피곤한데 잘됐군.”
“폐하…!”
그때였다. 나 혼자 지금 이 상황이 어리둥절한 건지 루이스는 태평한 소리를 하며 자연스럽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루이스를 따라 마차에 탔다.
“폐하를 모실 만반의 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과연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지.”
루이스가 공작가에서 하루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헤레이스의 말에 루이스와 대답은 명백한 시비조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서 두 사람이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했던 건데. 그런데 내 걱정과는 달리 헤레이스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이거 긴장해야겠군요.”
오히려 얼굴에는 여유까지 엿보였다. 심지어 헤레이스의 반응에 루이스 역시 피식, 웃었다. 비록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비웃음에 가깝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루이스와 헤레이스. 두 사람의 관계는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스는 언제나 헤레이스를 무시하고 조롱했다. 헤레이스는 그런 루이스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발톱을 드러낼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뭔가 미묘했다. 사이가 나쁜 듯 사이가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 건가?
‘둘 사이가 원래 저랬나?’
헤레이스와 루이스의 관계가 어쩐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달라 보였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모호했다.
‘어느 틈에…?’
그러고 보니 내가 황궁에서 지낼 때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계속 찾아갔다고 했었는데. 그때 뭔가 있었던 걸까.
지금 이 자리 나만 어색한 건가. 어색한 나는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처음부터 헤레이스가 가져온 마차에 다 함께 탑승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루이스와 헤레이스가 함께 있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저택으로 가는 내내 괜히 소파가 딱딱한 것처럼 불편했다.
불편한 적막을 깨는 소리가 루이스에게서 나왔다. 턱을 살짝 추켜올린 채 헤레이스를 보며 말했다.
“표정이 별로군. 내가 못 갈 곳이라도 가는 건가.”
“공작가가 폐하께서 오시기에 누추하실 것 같아 걱정되어 그렇습니다.”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누추하긴 하지.”
순간 마음의 소리가 꿈틀거렸다. 그러면서 누추한 곳에 왜 간다는 건데요?
“뭐냐. 에일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도 닫혀 있어서 내가 시선을 둘 곳이라고는 마차의 벽면밖에 없었다.
하아……. 왜 갑자기 내 신세가 처량한 거 같지?
다행스럽게도(?) 나에 대한 루이스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헤레이스에게로 향했다.
“최근에 머리를 좀 굴렸더군.”
칭찬인 듯 무시인 듯 애매한 말이었지만 루이스가 무심히 말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있었다. 헤레이스가 최근 세공업자들을 대거 고용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루이스의 말은 칭찬에 가까웠다. 헤레이스 역시 덤덤하지만 자신 있게 답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역시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래 봤자 겨우 푼돈인데 그런 거로 되겠어.”
자꾸만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제국의 황제와 공작인데, 대화의 내용이 점점 유치해져서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은 뉴튼 백작가가 협조해 주고 있지만, 나중에 다른 귀족이 사업권을 가지게 되면 그때도 협조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협조가 필요한 건 사업을 시작하는 뉴튼 백작가 뿐입니다.”
그럼 그렇지.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
루이스와 헤레이스의 신경전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루이스는 헤레이스를 시험하듯이 도발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루이스의 얼굴이 급격하게 험악해졌다.
“건방지군. 단 일 년으로 대단한 부를 손에 쥘 거라고 기대하는 건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군.”
“폐하…!”
결국, 나와서는 안 되는 말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나는 깜짝 놀라 루이스를 부르며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분위기는 급격하게 냉각되었다.
헤레이스의 아버지. 즉, 선대 공작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것은 공작가의 아픈 부위였다. 아무리 흥분해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이스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왜. 내 말이 틀린가, 헤레이스 공작.”
내 걱정과는 달리 헤레이스는 루이스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선대 공작에 관한 말은 흘려 넘기며 답했다.
“뉴튼 백작가에게만 협조가 필요하다는 건, 그 일 년 동안 보석 세공에 관한 시장은 저희 가문이 독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후에 협조가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사업권을 가진 상대방이 될 테니까요.”
“흐음. 생각대로 될 거 같은가 보지.”
루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헤레이스에게 점수를 매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나랑 내기나 할까. 지금 그 일이 날 실망시킬지 아닐지…….”
루이스가 상체를 앞으로 빼며 관심을 보였다. 악의적인 흥미였다. 결국, 내가 끼어들었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대화가 점점 유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차분하게 두 사람을 달래려고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아직 공작가에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이지?”
내가 창문을 열어 묻자, 시종장이 급하게 다가왔다. 시종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루이스가 바로 창문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헤레이스를 살폈다. 그 시선은 어쩌다 본 것이 아니었다. 뭔가를 의식하고 나와 헤레이스를 번갈아 본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폐하. 잠시…꼭 보고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 열어.”
시종장의 다급한 얼굴을 본 루이스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마차 안에서 지켜보았다. 시종장이 루이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좀 더 길게 이어졌다.
‘무슨 일이지?’
왠지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그게 나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그때, 시종장과 헤레이스가 대화 도중에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옆으로 옮겨갔다. 헤레이스를 흘깃 보더니 다시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아마…헤레이스와도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나와 헤레이스가 관련된 일이라니, 어떤 문제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마침, 루이스가 마차 안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만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국정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니까.
루이스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루이스가 덤덤하게 툭 내뱉었다.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군.”
루이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 헤레이스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하는 듯 미간이 좁아졌다.
“소문이요…?”
루이스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툭하고 내뱉었다.
“스캔들이라는데.”
“스캔들이라뇨…?”
스캔들이라니, 무슨 소리지? 나와 헤레이스는 동시에 루이스를 봤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면서.
하지만 루이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한 듯한 얼굴이었다.
‘스캔들이라니…그렇다면…?’
내 시선이 저절로 헤레이스를 향했다. 이상한 소문, 스캔들이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은 헤레이스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헤레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역시 확신할 수는 없는지 불안해 보였다. 그때였다.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에일린, 너라는군.”
“네…?!”
“그게 무슨…….”
루이스가 갑자기 나를 가리켰다.
뭐가 나라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깜박이는데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다.
“저요?!?!!”
스캔들이 난 사람이 헤레이스가 아니라 나라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하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욱 루이스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에일린. 너에 대한 스캔들이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