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62화 (62/124)

?제62화. 8장. 소문 (8)

“네, 받았습니다.”

룩센의 태연한 대답에 루이스가 코웃음을 쳤다. 서신을 받았는데도 방금 전까지 괜찮다는 말을 잘도 한다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서신에 뭐라고 적혀 있는데 그러나요?”

내가 테이블에 있는 서신을 집어서 펼쳐 보았다.

룩센과 루이스에게 온 서신의 정체는 항의와 경고였다. 나와의 스캔들로 더 이상 룩센 황태자와 관련된 안 좋은 이야기가 퍼질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당장 룩센을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서신을 읽다 보니 생각났다. 룩센의 어머니이자 황제를 꽉 잡고 있다는 엘리자베스 황후는 아들 사랑이 유별나기로 유명했었지. 심지어 처음에 단순한 스캔들을 넘어 점점 이야기가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게 하필 룩센 황태자가 제국에 머무는 동안 생기다니. 엘리자베스 황후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서신에 적힌 대로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배려보다는 축객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룩센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으십니까?”

룩센의 물음에 루이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그 때문에 에일린이 이상한 추문에 휘말렸는데.”

아니다. 룩센 황태자가 없었다면 다른 사람과 소문이 났을 것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문제에 룩센 황태자가 휘말린 것이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돌아가겠습니다. 그 전에는 싫습니다.”

“엘리자베스 황후가 걱정할 텐데.”

“하하, 황후 마마께서 저를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서요.”

“쯧. 아직까지도 황후에게 잡혀 살다니.”

룩센 황태자는 고집을 부리며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는 엘리자베스의 아들이었다. 루이스는 그것만으로도 징글징글한 듯 룩센 황태자를 향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하하, 정확히는 황제 폐하께서 황후 마마께 붙잡혀 사시는 겁니다.”

“저희 폐하께서도 그런 분을 만나면 좋을 텐데요.”

“에일린! 말조심해라. 엘리자베스 같은 황후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루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루이스와 엘리자베스 황후는 상극이다.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 엘리자베스에게 당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엘리자베스 황후가 참석하는 회담이나 연회는 열심히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황제는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엘리자베스 황후와 동석했고, 그런 날이면 루이스가 어김없이 도망치니 결국 제국에 관한 모든 외교적인 업무는 룩센 황태자가 일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룩센 황태자 전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루이스와 룩센이 지금 이 상황을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공작가에 시집을 간 황녀와 바다 건너 또 다른 나라의 황태자 간의 스캔들이었다. 제국 내부에서 그치는 단순한 가십이 아니었다. 문제가 잘못 불거질 경우, 국제적인 외교 문제가 될 것이었다.

“저와 벌어진 스캔들이니 제 일이기도 합니다. 저를 위해서 해결하는 것뿐입니다.”

룩센 황태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더 이상 마음이 변할 일이 없다는 강한 의사가 보였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고 하는 것까지.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호의를 받아들이고 함께 해결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일단 시녀들의 입에서 나온 외궁 시녀라는 것을 잡아야지.”

“잡은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루이스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답했다.

“시녀 뒤에 있는 진범을 잡아서 족쳐야지.”

표현은 과격하지만, 루이스의 말이 맞았다. 진범을 잡으면 가짜 소문을 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었다. 룩센 황태자가 말했다.

“그동안 소문은 점점 더 퍼질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소문이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어 있지 않습니까.”

나 역시도 걱정한 부분이었다. 이미 소문은 처음의 소문보다 더 변질되어 있었다. 이 소문을 그대로 둔다면 진범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쉽게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었다. 고민에 빠지는데 루이스가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앞으로 소문에 대해 입이라도 벙긋거리는 놈들은 모두 잡아들이지. 무서워서라도 말 한마디 못하게.”

“그런다고 소문이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잡아들인 놈 중에 몇 놈을 골라서 입을 잘못 놀리는 놈들의 최후가 어떤지 본보기를 보여 주는 거지. 그래, 좀 전의 시녀들로 해도 괜찮겠군.”

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루이스는 화나 있었다. 그는 이 소문을 낸 사람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이러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형체 없는 소문은 전염병과 같아서 순간을 놓치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없어지진 않아도 더는 날뛰지 못하겠지.”

그렇기에 무리한 방법을 써서라도 소문을 완전히 죽이려는 것이다. 루이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루이스가 말한 것은 강경책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성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야 루이스에 대한 이미지가 겨우 좋아지고 있었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안 돼요.”

“뭐…?”

“절대 안 돼요.”

내가 결사반대를 하자 루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이건 오히려 내 소문에도, 루이스의 평판에도 좋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맞습니다. 범인을 잡는 것과 소문을 진정시키는 것을 병행해야 합니다.”

룩센이 내 말에 거들며 나섰다.

“진범을 찾을 때까지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외궁 시녀를 붙잡아 진범을 찾는 것과 현재 돌고 있는 소문을 진정시키는 것을 별개로 해야 합니다.”

루이스를 다시 한번 설득할 때였다. 불쑥, 루이스가 물었다.

“그래서 소문은 어떻게 잠재울 건데?”

나와 룩센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또 같은 문제에서 막힌 것이다.

“결국, 방법은 하나군.”

방금 전까지 망설이는 것 같던 루이스의 눈이 돌변하며 번뜩였다. 루이스가 시종장을 불렀다.

“시종장.”

“예, 폐하.”

왠지 불안했다.

“지하 감옥에 있는 시녀들을 불러와라.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폐하!!”

“방법이 없다니 내 식대로 한다는 거다. 걱정 마라. 내가 설마 너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하겠어?”

내가 아니라 루이스에게 해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문제인 거다. 하지만 더 이상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려야 해!’

루이스를 쫓아 일어나 그를 붙잡으려고 할 때였다. 루이스가 아직 열지도 않은 문이 벌컥 열렸다.

“아기씨!!”

문 사이로 들어온 사람은 에밀이었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나에게 뛰어왔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에밀?”

“크, 큰일 났습니다!”

인제 보니 에밀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게다가 에밀을 시작으로 시녀로부터 뭔가를 보고 받은 시종장의 얼굴도 붉어졌다.

“폐하.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에밀의 반응을 살피던 루이스가 시종장의 보고에 관심을 가졌다. 아마 두 사람이 가져온 소식은 같은 내용일 것이다.

“무슨 일이지.”

“황궁 밖에 소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소란…?”

황궁 밖에서 소란이라니.

“헤레이스 공작께서 황궁 앞에서 황녀 전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시녀장의 보고에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황궁 밖에서 소란.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헤레이스. 어째서 헤레이스가 나를 마중 나왔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째서 소란이 되는 거지? 게다가 에밀과 시종장이 당황하기까지 하고.

루이스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때 에밀이 끼어들어 보고를 완성했다.

“헤레이스 공작께서 황궁부터 공작가까지 이어지는 거리에 레드 카펫을 깔고 부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뭐…?”

두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에밀이 그 뒤를 덧붙였다.

“……아기씨에게 프러포즈를 한다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설명만 듣고는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밀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직접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은 뭐야?!’

* * *

황궁 밖에 나와 보니 정말로 입구 앞부터 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레드 카펫이 이어져 있었다. 그 앞에는 꽃을 한 다발 들고 기다리고 있는 헤레이스가 서 있었다.

제국민들을 비롯한 귀족들까지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군거림에 환호성, 휘파람 소리까지,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이게 대체 무슨 짓…!”

지금 스캔들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이런 황당한 짓을 하다니. 그것도 내가 얽힌 스캔들인데. 눈치가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헤레이스의 태평한 짓에 화가 났다.

“공작님의 결심을 보여 주는 것을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제발 적당히 하세요.”

한동안 이상한 선물의 행렬이 잠잠하다 싶더니, 이런 순간에 이런 선물이라니.

내가 어떻게 헤레이스에게 반했을까. 그것마저도 화가 나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덤덤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소문을 잠재우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

“하지만 소문을 또 다른 소문으로 덮는 건 가능하죠.”

헤레이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목소리가 날이 잘 선 검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소문의 진실 따위 상관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헤레이스가 내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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