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9장. 진실 (5)
순간, 어쩌면…하는 가정이 들었다. 어쩌면 헤레이스가 이번에는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그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루이스와 관계가 좋아진다면. 그래서 그를 귀족파가 아닌 황족파로 영입할 수 있다면. 그런 방법도 가능할까.
“공작님….”
막상 그를 부르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헤레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부인.”
“저 역시도 이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반역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 작은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에 걸기에는 위험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얼마 전에 봤던 공작가의 가계를 관리하는 문서에 있었던 맞지 않는 숫자들.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이미 그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사실 이사벨이 영지로 떠나기 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찾아왔었다.
* * *
소문의 시작이 이사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사벨은 공식적인 처벌 대신 영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녀가 영지로 떠나기 바로 전이었다.
갑자기 소란이 일어나더니 비명 소리가 났다. 방에 있던 나는 직접 밖으로 나가 확인을 하는데, 그곳에는 시녀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이사벨이 있었다.
“에일린…!”
나는 옆에 있는 에밀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에밀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갑자기 아기씨를 만나 뵙게 해 달라고 막무가내입니다.”
이사벨은 나를 향해 외치다가 자신을 가로막는 시녀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에일린! 할 말이 있…! 좀 놔 봐!”
하지만 이제 와서 그녀와 할 얘기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할 말은 뻔했다.
“잘 돌려보내.”
에밀에게 간단하게 지시한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내가 상대해 주지 않자, 이사벨은 다시 흥분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사벨은 안간힘을 쓰며 버틴 채 내게 말했다.
“나도 속은 거예요! 속은 거라고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사벨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시녀들에 의해서 이사벨이 끌려 나가고 있었다.
“잠깐.”
내 신호에 시녀들이 행동을 멈췄다. 시녀들의 아귀힘이 풀리자마자 이사벨이 다시 내게로 달려왔다.
“내 말을 믿어 줄 건가요.”
“…글쎄요.”
이사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함을 주장하는 모습이 걸렸다.
“일단 한번 들어 보죠.”
이사벨의 눈빛이 빛났다. 일단 들어만 본다는 말로도 그녀는 구제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사벨은 호흡을 가다듬을 정신도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레이스가 먼저 내게 제안한 거예요. 이번 스캔들로…!”
이사벨은 숨 쉬는 것을 잊은 것처럼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툭, 말을 끊었다. 실수한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급격하게 눈동자가 방황을 하며 흔들렸다.
“스캔들로 뭐라고 하던가요.”
이사벨이 갑자기 입을 꾹 닫았다. 그 뒤에는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말하다 보니 무심코 거기까지 말한 것이겠지.
나는 이사벨이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릴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사벨은 내가 그럴수록 더 당황하더니,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마지막까지 억울하해하면서.
“나는 이용당했어요.”
누구에게 이용당했다고 말하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레이스 영애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어차피 서로의 이해 조건이 맞아서 손을 잡는 거래였다. 거기에 누가 배신해서 빠져나온다고 해서 이용당했다고 할 순 없었다. 처음부터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서로 충족시키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니까.
“나, 나도 잘한 건 아니지만…내가 가지고 있는 빚을 갚아 주겠다고 얘기하면서 내게 정보를 가져오도록 시켰어요.”
“…….”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전부 빼앗겨서 나는 어쩔 수가…!”
나는 그녀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흥분한 채 말하던 이사벨이 갑자기 멈칫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더니 다시 한번 아차하는 얼굴을 했다. 그녀가 빼앗겼다고 하는 실권을 지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느라, 해서는 안 될 사람 앞에서 말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럴수록 나의 얼굴은 싸늘해져만 갔다.
“잘 들었어요.”
이사벨의 입술 끝이 활짝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인의 상황이 바뀌진 않아요.”
“!!”
“이만 부인을 모셔.”
내 말에 시녀 2명이 들어와 이사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사벨이 가지 않으려고 발끝으로 힘을 주며 버티는 바람에 결국 질질 끌려가는 꼴이 되기는 했지만.
“잠깐만…!!”
“후우….”
한숨이 나왔다. 이사벨이 절박한 얼굴로 뭔가를 말했다.
“일부러 흔적을 남긴 거예요!”
“?!! 그게 무슨 소리죠.”
“그레이스는 일부러 소문의 흔적을 남긴 거라고요.”
일부러 소문의 흔적을 남기다니.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는 거죠?”
“그, 그건…나도 모르지만….”
옆에서 에밀이 “그럼 그렇지.”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이사벨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막 던지는 무리수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있었다.
* * *
처음에는 이사벨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벼랑 끝에 몰린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그것도 역시 마지막 발악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헤레이스에게 루이스의 편이 되어 주지 않겠냐고 말하려고 할 때, 문득 이사벨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번 떠오른 그녀의 말은 이후에도 계속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반역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라는 뜻이었다. 본격적인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가정이 생기자 왠지 불길함이 들었다.
회귀 전과 같은 시기에 반역이 일어날 거라고 안심해도 되는 걸까. 그때와는 달리 반역이 더 일찍 벌어진다면? 그렇게 되면 결과는 그때와 같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흔적을 남겼다….’
일부러 소문을 흘린 것이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일부러 흔적을 남긴 것 역시 뭔가 의도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다면, 이사벨은 그녀의 주장대로 이용당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사벨은 이 정도의 계략을 스스로 만들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 이사벨을 의심할 때도 분명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레이스가 이사벨을 일부러 이용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랜 시간으로 다져진 사교계에서 생존 방식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 한순간이었다. 나와 헤레이스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게 되자 루이스 역시 배후를 알아차리고 현장에 들이닥쳤고,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너무 쉽지 않나.’
이사벨은 허술한 편이었다. 그녀가 허둥거리는 것도 허점을 쉽게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마저 그랬다는 것은 이상했다.
게다가 소문은 그렇게 공들여 치밀하게 퍼트린 것치고는 너무나 쉽게 꼬리를 붙잡혔다. 거기에서 위화감이 들었다.
‘이게 만약 이사벨의 말대로 미끼었다면…….’
아귀가 하나씩 들어맞았다. 이번 스캔들은 반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시를 받지 않기 위한 눈 속이기 용인 것이다.
“에밀. 그때 내가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 했던 그레이스 영애의……,”
“타국과의 거래 현황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에밀이 바로 대답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서를 건넸다. 보고서에는 지난번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무기 거래가 맞았군.”
“네. 그것도 꽤 많은 양을 최근에 한꺼번에 사들였습니다.”
그 ‘최근’이 바로 나와 룩센 황태자의 스캔들로 인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때 그들은 무기를 대량으로 들여왔다.
역시 반역은 어떻게든 일어나는 것일까.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나도 본격적으로 반역을 막아야 했다. 루이스가 변하지 않는다면, 헤레이스가 여전히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 가문에서 확보한 무기를 어디서 관리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무기를 거래하고 있는지. 거래하고 있는 상단을 이용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등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에밀, 공작가에서 몰래 빠져나가고 있는 자금 흐름은 어떻게 됐어?”
그레이스 백작가와 타국과의 의심스런 거래를 확인했을 때 나왔던 또 다른 의심. 공작가에서 이중으로 작성된 장부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는 돈의 향방.
이미 거기까지 알아본 듯, 에밀이 대답했다.
“공작가 소유의 별장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안은 확인했어?”
“아직입니다. 생각보다 보안이 철저해서 직접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일단 에밀에게 들은 조건으로도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별장의 보안이 철저하다는 것은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내용이 파악되지는 않았다. 위험하고 은밀한 일일수록 에밀은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움직이는 편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