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4)
어느새 버려야 할 초대장과 편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돌려보내야 할 선물은 그 이상이었다.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루이스에게 호감이 있는 영애가 나타나기만 해도 일단 감지덕지였다. 황후가 되기에 최소한의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무조건 찬성이었다. 루이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많은 편지와 초대장 속의 영애들을 확인해 보나마나였다.
올리비아가 있는데. 그녀보다 황후에 더 잘 어울리고, 루이스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올리비아의 짝사랑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무조건 그녀를 응원했다.
그런데 올리비아의 마음을 눈치챈 후에 사실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혹시, 회귀 전에도 올리비아가 루이스를 좋아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거지?’
올리비아가 루이스를 좋아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혹시 회귀 전에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회귀하면서 생긴 변화 중에 하나인 걸까.
어느 쪽이든 나는 무조건 찬성이지만, 두 사람을 이어 주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내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자 에밀이 나를 불렀다.
“아기씨.”
에밀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드물게 보이는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서로 이어지게 하는 건 언제나 신중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두 사람 모두.”
루이스와 올리비아. 둘 다 내 하나뿐인 가족이고 친구였다. 두 사람을 이어 주는데 결코 가볍게 할 리 없었다. 에밀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네. 그러니까 더더욱요. 자칫 두 사람 전부를 잃을 수도 있어요.”
나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는 달리 냉정한 목소리였다.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고, 그 말이 가진 의미도 조금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에밀은 내가 혹시라도 섣부르게 행동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한 것이다. 마치 버려질 일밖에 없는 초대장과 편지를 보낸 영애들처럼.
잠깐의 들뜸에 속아서 실수할 뻔했다. 에밀의 말이 옳았다. 나 역시 사랑이라는 것 하나만 믿고 매달렸다가 모든 것을 잃어 본 적 있으니까.
“조심할게.”
에밀의 말에는 언제나 뼈가 있고 옳았다. 두 사람을 이어 주고 싶다는 내 욕심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방관하지도 않을 생각이지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에밀이 조금 전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먼저 두 분의 마음을 확인하세요.”
“마음…?”
“네. 올리비아 님과 폐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마음이라. 확실히 올리비아가 루이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나의 추측이었다. 확신에 가깝지만. 그래도 올리비아의 마음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루이스. 에밀의 말에 순간 깨달았다. 루이스가 올리비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교류를 해 왔고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루이스의 짝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에밀은 내가 놓칠 뻔한 것들을 날카롭게 지적해 주었다.
“좋아하는 것에도 여러 감정이 있습니다. 그게 서로 같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그 말은 두 사람의 얘기가 아닌 내 얘기이기도 했다. 나는 헤레이스를 열렬하게 사랑했고, 헤레이스는 아니었다. 우리의 어긋난 마음은 결국 끝까지 이어졌다. 내가 회귀를 한 후에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같지 않았다.
내가 밟은 과정을 두 사람이 밟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헤레이스에게 강요했다. 어쩌면 그 빚은 대가가 아니라 협박에 가까운 뇌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작가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으면 빚을 탕감받고 결혼하라는 강요였을지도 모른다.
에밀의 말대로 올리비아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루이스의 마음을 확인해야 할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에밀과 얘기가 끝나갈 무렵 찾아왔다. 그녀는 내가 이혼한 후로 황궁에 자주 출입했었다. 올리비아가 돌아가기 전에 마음을 슬쩍 떠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물어보려고 하니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올리비아를 빤히 봤나 보다. 올리비아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대충 얼버무렸다.
“최근에 황궁에 자주 오네?”
순간 할 말이 없어서 꺼낸 말에 올리비아가 섭섭하다는 눈망울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귀찮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푸핫. 하하핫.”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내가 당황하자 올리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나를 놀린 건가 보다.
“사실 이번에 가문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 하나를 내가 진행하게 됐거든. 알잖아. 우리 오빠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능한지. 후계자라고 어떻게든 밀어 주려던 아버님께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그래도 사람은 좋잖아.”
“그러니까. 사람만 좋아서 문제야. 자꾸 이상한 거에 속기나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나보고 맡아서 하라고 하시네.”
회귀 전에도 올리비아는 뉴튼 백작가의 사업을 여러 차례 진행해서 성공했었다. 그의 오라버니이자 뉴튼 백작가의 후계자와 비교해서 엄청난 성과였다.
올리비아의 능력을 친척들까지 인정해서 차라리 올리비아에게 후계를 잇게 하고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에 대한 얘기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끝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혼하지 않으면 후계 자리를 넘겨줄 수 없다는 가문의 통보를 받았었다.
데릴사위를 들인 후에도 독신처럼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고 주위에서 올리비아를 수차례 설득했었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결혼을 거부했다. 언제나 이유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 혼자 살 생각이다. 그런 말이 전부였다.
어쩌면… 올리비아는 그때부터 루이스를 좋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이스가 황후를 맞이하기를 기다리거나, 그녀보다 먼저 비혼을 선언한 루이스 때문에 그녀도 비혼을 택한 건지도 모른다.
“올리비아. 지금 한다는 그거, 무슨 사업이야?”
“지금 내가 하는 사업?”
“응.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들어보고 황녀로서, 아니면 개인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리비아가 사업에 관해 현재까지 구상된 것들을 막힘없이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에 두 가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 루이스가 황제로서 면모를 보여 주면서 올리비아와 함께 있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사적으로 두 사람이 만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나와 있을 때 다 함께 만나는 것과 연회에 참석해서 만나는 것. 하지만 두 가지 방법 모두 만남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에도 올리비아가 루이스를 좋아했다면,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과거와 똑같은 흐름으로 흐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우선 두 사람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사업이 핑계로 쓰이기에 적격이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올리비아는 오늘 뉴튼 백작을 대신해서 황궁에 처리할 문제가 있어서 방문한 것이었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갔다.
그래도 두 사람을 서로 연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함께하다 보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반응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올리비아에게 물어보는 것은 결국,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 하지 못했다.
나는 올리비아가 돌아가자마자 바로 루이스를 만나러 갔다.
어느새 집무실 앞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른 순간 거침없던 발걸음이 멈추고 시종장의 보고와 루이스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는 말까지 들은 후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 준비되고 루이스를 본 순간,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귀신같은 눈치를 가진 루이스였다. 내가 눈치를 챘는데 과연 루이스가 몰랐을까.
연애 감정은 다른 문제였다. 모든 것에 눈치가 빠르고 냉정하다고 해도 그게 연애 감정에까지 마찬가지일 거라는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루이스는 지금까지 연애다운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루이스의 반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설마 아는데 이렇게 티가 안 날 리가 없지.’
가끔씩 괴물같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루이스였다. 그래서 괜한 망상을 펼친 거라 정리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라.”
하지만 그의 귀신같은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루이스를 빤히 보고 있었는지, 어느새 루이스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얼굴이 뚫어지도록 보고 있었냐고 캐묻는 얼굴이었다.
“폐하.”
“그래.”
어디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보자. 루이스는 정확히 그런 얼굴을 하며 팔짱을 끼었다. 괜히 긴장됐다.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하지?’
루이스는 과거부터 결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였었다. 말을 잘못 꺼내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일단 루이스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올리비아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 아닌 우회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번에 뉴튼 백작가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루이스가 거침없이 말했다.
“그래서.”
뉴튼 백작가에서 사업을 하는 것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관심했다.
“그 사업을 통해서 황가에서도 백성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진행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지원 사업?”
사업이라는 얘기에 루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별로 탐탁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이때 괜히 물러나면 거기서 이 대화는 끝난다. 루이스가 싫다거나 됐다는 말을 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냥 돈지랄이지. 그런 거에 퍼 줄 재물 따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