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3)
내가 미심쩍어하는 것을 눈치챈 에밀이 덧붙였다.
“그때 구해 준 아이가 귀족들의 집을 오가면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건 알고 있었다. 이전에 헤레이스와 함께 만난 적이 있으니까. ‘근데 갑자기 왜 그 얘기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자마자 에밀이 말을 이어 갔다.
“일을 할 때 그 아이가 귀족들에게 폐하의 얘기를 했나 봅니다. 그게 부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서 부인과 영애들 사이에서 폐하의 인기가 오르고 있습니다.”
이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전개였다. 확실히 소문의 당사자가 직접 한 얘기라면 그것은 뜬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 자체였다.
내가 루이스의 소문을 내도록 했던 것은 폭군이라는 악명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는다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 소문으로 인해서 루이스를 무서워하기만 하던 영애들이 돌변하게 될 줄이야.
‘혹시. 이번에야말로 황후 자리가!’
헛될지 모르는 희망이 문득 꿈틀거렸다.
“폐하. 이렇게 발걸음하신 김에 후원에서 다 같이 산책하시는 건 어떨까요.”
루이스는 갑자기 영업용 미소를 띠며 제안하는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내 말에 영애들이 기대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루이스의 인기는 좋아 보였다.
“폐하. 저희가 괜한 부담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 이만……,”
“부담은 무슨. 가자.”
올리비아의 말에 루이스가 끊으며 먼저 앞장섰다. 그 뒤를 영애들이 따랐다. 왠지 ‘이번에야말로’라는 기분이 들었다.
호기롭게 앞장선 것도 잠시, 루이스는 주위에 몰려드는 영애들에게 금세 질린 얼굴이었다. 영애들은 여전히 루이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이상한 건 루이스가 그런 영애들을 딱히 받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슬쩍 영애들과 떨어져서 올리비아에게 속삭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분명 이것도 올리비아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루아침에 루이스의 행동이 이렇게 달라질 리 없었다. 그런데 정작 올리비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올리비아…?”
“…그냥. 널 생각해서 오늘 하루만 맞춰 달라고 했어.”
“그래서 저러는 거라고?”
“그럼, 폐하가 네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
“…….”
“물론 그 얘기하는 데 조금 과장을 덧붙이긴 했지만.”
어느새 올리비아는 그녀 특유의 여우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능청스러운 미소를 보아하니 어떤 감언이설로 루이스를 설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루이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올리비아.”
“네. 폐하.”
루이스가 눈짓으로 부르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잠시 나를 보더니 루이스에게 갔다. 올리비아가 옆에 서자, 영애들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되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황제를 잘도 부려먹는군.”
“그게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대체 내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고. 나중에 뭐로 갚을지 기대되네.”
얼마 전, 올리비아가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로 그에게 이것저것 요청했다.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에일린을 위한 일이라는 말에 루이스는 협조하는 척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긋지긋했다. 결국,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올리비아를 불러 다른 영애들을 쫓아냈다.
루이스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아는 올리비아는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엇이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흐음.”
루이스가 걸음을 멈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주눅 들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면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기도 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지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영애들 역시 두 사람의 대화가 궁금한 모양이지만, 들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영애들이 소매를 뜯는 게 보였다. 그녀들의 행동은 질투였다. 자신들의 폐하의 옆자리를 빼앗긴 올리비아를 향한 질투. 하지만 언제나 자신들의 중심인 올리비아이기에 드러내지도 못하는 짜증.
‘근데 두 사람…….’
게다가 올리비아와 함께 있는 루이스는 영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자연스러운 웃음. 안정적인 목소리. 편안한 표정.
두 사람을 보던 내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잘 어울리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다시 내 귀를 통해 들어왔다. 말하고 듣고. 두 번의 과정을 거치니 더 잘 보였다. 확실히 두 사람은 어울렸다.
‘말도 안 돼.’
두 사람이 잘되면 좋겠지만, 그건 나의 희망 고문에 불과했다. 두 사람이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 모두, 완고한 비혼주의자였으니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친분 때문이다. 나와 올리비아가 친하기 때문에 두 사람 역시 친분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아는 건 선후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내 놀이 동무를 직접 선발한 사람이 루이스였다. 자신의 놀이 동무가 누구이든 관심도 없었지만, 루이스는 내 놀이 동무만큼은 신중을 기해 골랐다. 루이스는 내 놀이 동무 후보들을 직접 만났고,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올리비아였다. 이미 루이스에게 인정받은 후였으니, 두 사람이 친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올리비아와 나란히 걸은 루이스는 나와 잠시 대화를 나눈 후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났다. 이미 영애들 간의 티파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루이스였다. 다른 영애들도 더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루이스가 떠난 직후, 올리비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리비아의 시선 끝에는…루이스가 있었다. 순간, 번개에 맞은 것처럼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올리비아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올리비아와 루이스를 번갈아 봤다. 올리비아는 멀어져가는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는 이미 뒷모습마저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순간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올리비아가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왜 난 이제야 눈치챘을까. 올리비아가 루이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정이 생기자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떠올린 가능성이 맞을 확률을 떠올렸다.
“에밀.”
“네. 아기씨.”
“어쩌면 이번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무엇을요?”
회귀 전에도 필사적으로 찾고 싶었던 자리였다. 아무리 내가 있어도 루이스가 완전한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결국 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라버니…폐하의 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회귀 전에는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두 사람 모두 비혼을 고집하긴 했지만, 올리비아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루이스는 여자를 싫어했지만 올리비아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루이스를 좋아한다.
그런 두 사람이라면, 서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올리비아라면, 그녀는 분명 제국에 필요한 황후가 되어 줄 것이다.
* * *
티파티는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그것을 계기로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찾게 됐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
티파티를 계기로 영애들의 루이스를 향한 변화가 눈에 띄기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루이스의 상대 후보를 찾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갑자기 후보들이 생겨났다.
티파티가 끝나면 내게 오는 초대장이나 편지, 선물들이 늘어날 것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티파티가 끝나고 예상대로 영애들로부터 수많은 초대장과 편지, 선물들이 왔다.
단, 그것들의 반은 루이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동생인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는 거다.
“폐하와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청탁이네.”
“이런. 전부 체할 텐데.”
대충 눈으로 훑은 편지를 옆에 내려놓자, 에밀이 버리기 위해 모아 놓은 편지와 초대장들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폐하와 함께 연회에 와 달라는 초대장이네.”
“황궁 연회도 참석 안 하려고 하시는 분인데.”
나와 에밀이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초대장 역시 에밀의 손을 통해 버려질 운명이었다.
“평소에는 머리에 더듬이라도 달린 것처럼 눈치가 빠르더니. 왜 이럴 때만 눈치 없는 척 구는 건지.”
영애들 대부분은 루이스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우선은 내게 호감을 얻기 위한 말들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는 언제나 소수의 눈에 뛰는 행동을 하는 영애들이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대놓고 루이스에 대한 호감을 자랑하듯이 펼쳐 보였다.
왠지, 이대로 루이스에게 직접적으로 편지나 초대장을 보내는 영애가 나타날까 걱정되기까지 했다.
그녀들의 눈에는 루이스가 달라진 것 같아 보이겠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단지 눈에 띄는 행동이 줄어들었을 뿐, 만약 그녀들이 루이스에게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동안 잠잠했던 것들이 폭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