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14)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황궁에서도 공작가도 아닌 나 혼자만 사는 것은. 물론 그 옆에 에밀이 있어서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큰일이네.’
하지만 저택으로 오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지. 계속 긴장한 채로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지니까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헤레이스가 물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예정입니까.”
그것도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어떻게 내 고민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또 왔습니까.”
문제는 이런 상황이 지금 내게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헤레이스는 내가 이곳으로 오고부터는 끈질기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그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자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황궁을 나와 이곳에서까지도 괜히 이목을 집중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인제 그만 찾아오세요.”
하지만 이것도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다. 그와 나의 관계가 끝냈을 때, 나는 다시는 그를 보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앞으로는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할 겁니다.”
나는 그에게 경고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열어 주지 않을 거라고. 이전보다 더 시끄러운 소문이 돌더라도.
“그래도 오겠습니다.”
하지만 헤레이스 역시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느새 나와 헤레이스의 실랑이는 누가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이 되어 있었다. 회귀 전에는 항상 내가 더 오래 버텼는데. 어쩐지 회귀 후에는 항상 헤레이스가 더 오래 끈질기게 버텼다.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저는 공작님을 보며 잊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이 실랑이도 인제 그만 끝내야지.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그를 계속 볼 수 없는 이유를.
나는 여전히 그를 보면 회귀 전의 끔찍한 순간들이, 회귀 후에는 그가 언제 반역을 일으킬지 몰라 의심하며 지내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순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와 헤레이스는 회복될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결국 저택의 고용인들-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이것만큼은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합세해서 우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에 의해 문 앞까지 밀려났다. 헤레이스가 내게 간절하게 말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습니까.”
“처음이요…?”
다시 회귀를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처음으로 돌아가지? 의아해하며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헤레이스가 말했다.
“우리가 한때 부부였던 것도 모두 잊고…지금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남남으로 시작하자고. 그러다 보면 아는 사람이 되고 좀 더 깊은 미래를 꿈꾸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처음부터라…”
나는 헤레이스가 한 말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헤레이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공작님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네?”
“과거를 다 지워 버리면 말이죠.”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건, 그의 외모나 성격에 반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회귀 전, 5년이라는 길고도 외로운 시간을 헤레이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도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고용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저택의 문이 닫히고, 시야에서 헤레이스가 사라졌다.
“…이게 아닌데.”
닫힌 문 사이로 헤레이스가 머쓱해하며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헤레이스와 함께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말은 도움이 되었다. 이 저택에서 모든 것이 처음인 것처럼 앞으로 회귀 전에 일도, 회귀 후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도 모두 잊고 다시 시작하자.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헤레이스는 그의 선전포고(?)처럼 나의 문전박대에도 불구하고 질기게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 * *
어느새 시간이 흘렀다. 반역이 일어난 지도.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결혼을 한 지도. 내가 황궁을 나와 저택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러게요. 시간 참 빠르죠.”
에밀 역시 내 말에 감회에 젖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에밀과 달랐다. 반역 사건이 일어난 지로부터 수년이 흘렀다. 이제 몇 달이 더 지나면, 내가 회귀 전 죽은 그 날이 된다.
‘언제 이렇게 지났지?’
회귀 후, 다시 한번 얻은 기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반역을 막았고, 루이스와 헤레이스도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결혼을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문득문득 그날의 일들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황궁에서 나와 저택에 따로 살기 시작한 지도 수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건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평화로웠기 때문이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특히 아닌 척하지만, 루이스는 올리비아에게 잡혀 살고 있었다. 과거의 루이스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루이스는 나름 성군 흉내를 내게 되었다. 정확히는 올리비아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백성들은 루이스를 더 이상 폭군이라 부르지 않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잘먹고 잘살게 해 주는 것은 모두 황제와 황후 덕분이라는 민심이 강하게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올리비아가 민생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 중 하나였다.
나는 종종 황궁을 방문해 루이스와 올리비아와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식사 후에는 곧바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스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향했기 때문이다.
나와 헤레이스 사이 역시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는 잊을 만하면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황궁에서는 최근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최근 들어 올리비아의 몸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역시 올리비아는 일어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곤했구나 하고 생각했던 루이스도 올리비아의 늦잠이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 되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디 안 좋기라도 한 건가.”
올리비아가 몸을 뒤척이며 답했다.
“그냥 몸이 좀 무겁네요…계속 피곤하고…….”
순간 루이스는 덜컥 겁이 났다. 어쩐지 너무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행복하기만 할 리는 없는 것인가.
“지금 이러는 게 처음인 건가.”
시녀장이 루이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최근 들어 황후 마마께서 음식을 잘 드시지 못했습니다.”
“그걸 왜 지금 알리는 건가!”
역시나 루이스는 시녀장의 말을 듣자마자 흥분하며 화를 냈다. 황후의 몸이 안 좋으면 바로 알려서 진료를 받아야지, 지금까지 뭐하고 있다가 이렇게 힘들어하나. 순간 울컥했다.
그때 올리비아가 루이스의 팔을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폐하. 제가 괜찮으니 말하지 말라고 단속하였습니다.”
“올리비아…….”
올리비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뻔했다. 괜히 걱정할까 봐 그런 것이었겠지. 루이스는 속상한 마음에 올리비아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채로 루이스를 향해 웃고 있었다.
루이스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그리고 황궁 주치의를 불렀다. 황궁 주치의는 연락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가 황후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루이스의 근심 걱정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였다. 황궁 주치의는 최대한 신속하게 올리비아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황궁 주치의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루이스의 불안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주치의는 어째서인지 올리비아의 몸 상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가 다시 올리비아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올리비아의 몸에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닐지 걱정이 가득한 루이스에게는 모든 행동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황궁 주치의의 진료가 길어질수록 루이스의 인내심 역시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루이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주치의를 붙잡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할 때였다.
주치의에게는 천만 다행히도 때마침 진료를 마치고 루이스를 돌아보았다. 루이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올리비아의 상태를 물었다,
“…어떤가.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황궁 주치의는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올리비아를 살핀 후에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확실히 큰일은 큰일입니다.”
루이스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올리비아가 큰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을 때였다. 루이스는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었다.
“뭔지 말하도록.”
주치의는 신중하게 말했다.
“회임하셨습니다.”
“…뭐?”
루이스는 멍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황궁 주치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회임을 하셨습니다.”
루이스는 그대로 석고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너무 기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황후…….”
루이스는 올리비아를 불렀다. 그리곤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덩달아 올리비아도 루이스를 빤히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마치 앵무새가 된 것처럼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
그리고 또 말이 없었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시종장과 시녀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곤란해했다. 회임이라니, 대단한 경사였다. 바로 축하 인사를 하고 모두 즐거워해야 하는데, 주인인 루이스와 올리비아의 반응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하염없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역시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올리비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루이스의 눈가에 투명한 액체가 반짝이는 것을 본 올리비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폐하…설마 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