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16장. 프러포즈 (2)
“공작님…?”
“그게…지금은 괜찮아진 것…….”
갑자기 괜찮아졌다는 말에 내가 믿지 못하고 그의 모습을 살피자, 그가 얼굴이 다시 일그러뜨리며 몸을 웅크렸다.
“다시 아프긴 한데……. 주치의를 부를 만큼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찮은가 보네요.”
어느새 나는 팔짱을 끼고 헤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척 눈을 찡그리면서도 힐끔 내 표정을 확인하는 헤레이스를 빤히 보면서 그대로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나 지켜보자 싶은 마음으로.
“아니…근데 갑자기…….”
헤레이스는 갑자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아파했다. 아니, 아픈 척하는 게 보였다. ‘다 티 나니까 그만해.’라는 내 적나라한 시선이 느껴졌는지, 헤레이스가 슬금슬금 아픈 척을 그만두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헤레이스가 왜 이러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도 무시했을 테지만. 그가 쓰러져 있는 동안 약속한 것이 있으니까…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뗐다.
“회복하실 때까지 옆에서 도울 테니 걱정 마세요.”
내 말에 헤레이스가 민망해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지 않는 척 힐끗, 시선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헤레이스는 지금도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뿐, 검에 찔린 상처가 아문 것이 아니니까. 다만 그는 검에 찔린 통증을 내게 티 내지 않고 괜히 꾀병을 부린 것이었다.
이후 헤레이스는 주치의가 얘기한 대로 회복에 집중했다. 약은 강한 진통제가 동반되어 있어서 헤레이스는 하루에 절반을 잠들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도 계속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렇게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나서야 헤레이스는 조금씩 움직이면서 치료와 동시에 체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헤레이스는 어느새 검을 잡고 있었다. 아직 체력 회복도 완벽하게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다신 못 잡을 거라는 검을 잡고 있다니. 그러다 헤레이스의 몸에 더 무리가 갈 것 같아서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 마세요. 그저 몸풀기 용으로만 하는 겁니다.”
걱정하는 나와 괜찮다는 헤레이스 사이에 실랑이가 몇 번 오갔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간단한 훈련이라는 핑계를 대며 내 눈을 피해 끈질기게 훈련을 했다.
그런데 헤레이스의 회복 속도는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엄청났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나 역시도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속도였다. 그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치의가 올 때마다 그들 역시도 깜짝 놀라고는 했다. 주치의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회복되시다니. 대단합니다.”
“얼마나 좋아진 거지? 몸에 무리가 간 곳은 없는 건가.”
나는 혹시 몰라 주치의에게 두 번, 세 번 확인을 했다. 주치의는 내 물음에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일상생활은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몸에 근육이 잡힌 것을 보니, 일상생활 이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치의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깨어난 것은 기적일지 몰라도 그가 회복한 것은 오로지 헤레이스의 노력 때문이었다. 아마 그동안 남몰래 단련해 온 체력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서 헤레이스를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사실 지독하게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와 결혼생활을 할 때도 매일 연무장에서 개인 훈련을 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가볍게 몸을 푸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단련해 왔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드디어 헤레이스의 몸에 감고 있던 붕대를 모두 풀게 되었다. 그동안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는 해도 상처가 워낙 크고 깊어서 어깨부터 허리까지 깨끗한 붕대로 감싸서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붕대를 푸는 것이 그의 완벽한 회복을 뜻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가 천을 푸는 이 순간을 계속 기다려 왔다.
“불편한 곳은 없나요?”
“괜찮습니다.”
헤레이스가 팔을 몇 번이나 돌려 보았다. 몸이 가벼운지 헤레이스의 움직임이 한결 편해 보였다. 헤레이스는 어느 정도 이상으로 회복되었다.
“갑갑하던 게 사라져서 좋네요.”
헤레이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로 괜찮아졌다.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검술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했다.
그러니… 내가 이제 더 이상 공작가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 곧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이제 돌아갈 때네.”
마침 잘됐다. 공작가에서의 생활이 더 익숙해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이곳은 잠시 머무르는 것일 뿐. 더 이상 내 집이 아닌지 오래되었으니까.
사실 요 며칠 사이에 스스로 깜짝 놀란 순간들이 있었다. 공작가가 마치 내 집인 것처럼 편하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어서. 그러니 지금이 돌아가기에는 적기였다. 괜히 머뭇거리다가 떠나지 못하기 전에.
오늘 헤레이스와 식사를 하면서 떠난다는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할 수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손님이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이다.
의외의 손님은 루이스와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 그리고 황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앨버트가 다급하게 와서 보고했다. 그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헤레이스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올리비아는 뱃속에 있던 아이를 낳았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던 데,다 그날의 무리로 인해 예정일보다 좀 더 일찍 산통을 느꼈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해진 상황에서 안 좋은 사건으로 산통을 느꼈기에 모든 사람이 긴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리비아와 뱃속의 아이를 지켜야만 했다.
루이스는 올리비아가 산통을 느낀 순간부터 그녀의 곁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불안해하면 옆에서 안심할 수 있도록 지켜 주고, 그녀가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면 루이스는 더 괴로운 마음에도 올리비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황후가 해산을 하는 동안 황제가 그 곁을 지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지만, 루이스는 그런 규율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올리비아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루이스의 정성 덕분인지 올리비아의 강인함 때문인지, 올리비아는 아이를 무사하게 낳을 수 있었다. 아이가 황자라는 사실과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올리비아는 쓰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피로가 쌓인 것일 뿐, 올리비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회복했다.
올리비아가 산통을 하며 황궁으로 간 것을 알았지만, 찾아가지 못했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를 살피느라 아직 황궁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온전한 축복을 주고 싶은데 헤레이스가 깨어나지 못한 상황에 내 괴로움이 아주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까 봐 차마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축하한다는 서신으로 대신하고 만남을 조금 뒤로 미뤄 두고 있었다.
이제 곧 찾아가려고 했는데…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먼저 공작가를 찾아온 것이다.
놀란 마음으로 응접실로 현관으로 향하자, 마차에서 내려 들어오는 루이스와 올리비아, 그리고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어린 황자가 보였다.
“에일린…!”
“드디어 얼굴을 보는구나.”
올리비아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 뒤에서 루이스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이스는 이전과는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루이스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 좋은 것이 당연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는 헤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다행이군.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건강해진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그의 건강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호전되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 역시 보고받은 것이다.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황자 전하의 출산을 축하드립니다. 제 몸이 이러다 보니 인사도 늦었습니다.”
“그대가 건강한 것이 우선입니다.”
올리비아가 헤레이스의 인사에 화답을 하며 루이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미리 오간 것이 있는지, 올리비아가 루이스에게 계속 눈치를 주었다. 루이스는 딴청을 부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헤레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올리비아를 구해 줘서…….”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궁금해하던 나와 헤레이스는 루이스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역시나 루이스는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하려는 듯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고마웠어.”
난생처음 하는 말에 부끄러운지 루이스의 시선은 저 멀리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헤레이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부 인사가 몇 차례 오고 간 후에 올리비아가 어린 황자의 얼굴을 보여 주며 소개했다. 그때 황자가 방긋, 웃었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흥분한 것은 나와 헤레이스가 아닌 올리비아와 루이스였다.
“황자가 웃는 얼굴 좀 보세요.”
루이스가 황자가 방긋 웃는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날 보고 웃는군.”
두 사람은 어린 황자가 웃는 것만으로도 감탄하고 기뻐했다. 그러면서 경쟁하기도 했지만. 올리비아와 루이스가 황자가 누굴 보고 웃는지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절 보고 웃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이것 봐. 날 보고 있잖아.”
그 모습은 부디 다른 사람이 보지 않기를 바랄 만큼 황제와 황후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유치했지만, 그래서 더욱 좋아 보였다.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어느새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지 에밀이 우리에게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사 자리는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함께할 뿐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가 가끔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오늘 헤레이스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었고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대로 지금 그 말을 꺼내면 분위기가 가라앉을 테니까. 지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