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16장. 프러포즈 (3)
식사가 마무리되고 차와 디저트가 나왔을 때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헤레이스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고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에일린,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헤레이스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입술을 뗄 듯 말 듯 몇 번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에일린.”
그리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 다시 한번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헤레이스가 내게 프러포즈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놀랍다거나 혼란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치 저녁 인사를 들은 것처럼 담담했다.
게다가 루이스와 올리비아의 반응을 보아하니 어쩐지 두 사람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설마 그래서 오늘 갑자기 찾아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레이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부인과 다시 함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의식이 없을 때는 분명 그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다시 망설여졌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식탁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긍정도 부정도 내 입에서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내용이든 대답해야 했다. 나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죄송하지만…….”
내가 대답을 이어 가기도 전이었다. 헤레이스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말했다.
“천천히 대답해 주세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럴수록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대신…대답할 때까지는 여기 머물러 주세요.”
헤레이스는 내가 공작가를 떠나려고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누가 말한 거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에밀이 시선을 회피한다. 그녀가 헤레이스에게 귀띔을 해 준 것이다.
“그렇게 할게요.”
결국, 나는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할 때까지 공작가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올리비아는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어린 황자를 루이스의 품에 넘긴 채로. 루이스가 익숙하게 어린 황자를 받는 모습도, 어린 황자가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자 루이스가 순간 당황하다가도 곧 익숙한 듯이 아기를 달래는 것도 과히 진풍경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내 손을 꼭 붙잡고 한 말을 떠올리면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에일린, 나는 행복해.”
“…….”
“그러니까 너도…하고 싶은 걸 해.”
“응…….”
올리비아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멈췄다. 뭔가를 생각하는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나와 폐하는 과거와 다른 선택을 했어. 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
올리비아가 나를 단호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이 훨씬 행복해. 분명 폐하도 그러실 거야.”
올리비아는 단호하지만 분명 행복에 넘치는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 그녀의 말에는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네 선택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 오로지 네가 원하는 것만 생각했으면 좋겠어.”
나는 그녀의 말에 최대한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응.”
지금 당장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그녀의 말을 잊지 않겠다고.
올리비아의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 두 사람은 이미 행복하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고. 우린 행복하니 이제 너도 행복해지라는 올리비아의 진심이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스러운 아이인 황자도 돌아갔다.
나는 공작가에 남은 채 여전히 그의 회복을 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대로였다. 하지만 평범함 속에 숨긴 채, 나는 그의 고백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망설였다.
그럴 때마다 헤레이스는 갑자기 내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끊임없이 약속했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존재와 진심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에일린.”
“…?”
“평생 그대를 위해 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 말은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알 수밖에 없었다. 차마 모른 척 외면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전혀 망설여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 회귀 전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나의 불안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헤레이스는 무턱대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키겠습니다.”
어쩌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속되는 약속에 깨달았다. 그 역시도 과거를 전부 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역시 언제 어떤 상황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과거는 바뀌었고, 비슷한 일이 벌어져도 그가 선택하는 것은 나라는 사실을 나에게 끊임없이 알리고 있었다.
결국,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독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과거를 떨쳐 내지 못한 채 기억에 끊임없이 휘둘렸다. 하지만 결국 회귀 전의 일 역시 모두 내가 겪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일어난 적도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내가 잊어버리기로 하면 그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루이스는 회귀 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회귀 전에는 마지막까지 비혼이었다. 황후도 후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후는 물론, 아이도 가지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보였다.
* * *
후원에서 헤레이스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런데 헤레이스가 나를 보자마자 눈이 커지면서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의아해하며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하…….”
하지만 헤레이스의 말과는 달리 그는 등 뒤로 팔을 숨겼다. 내게 숨기기 위한 것처럼 다급하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내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럼 그 뒤로 숨긴 팔은 뭐죠?”
결국, 헤레이스는 울상을 지으며 등 뒤로 숨긴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친 건가요?”
심각해 보이지는 않지만, 팔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동선을 보면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다가 검에 베인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내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괜찮다고 자만하더니.
평소의 헤레이스였다면 실수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다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니었다.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순간순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앞으론 더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주치의가 가져온 약과 천을 빼앗듯이 집어 들어서 일부러 헤레이스의 팔을 힘껏 쥐고 거칠게 치료해 주었다. 그는 통증을 느끼는지 순간 인상을 찡그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더 험상궂은 얼굴로 지금 아픈 거냐며 위협하듯 물었다. 헤레이스는 고개를 열심히 내젓고는 아프지 않다고 하며 내게 팔 한쪽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깨끗한 천으로 닦고 그 위에 약을 발라 주었다. 그래도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서 그 위에 천을 덧대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몸을 더 소중히 여기세요.”
헤레이스는 내 눈치를 보며 답했다.
“…네.”
나는 치료가 끝났는데도 그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만약 이런 일이 또 있으면 더 아프게 치료할 거예요.”
“…얼마든지요.”
헤레이스의 입가에는 어쩐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일부러 더 아프게 치료해서 힘들었을 텐데도 마치 기대된다는 듯이.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가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후우…그러니 어쩔 수 없네요.”
나는 헤레이스의 팔을 힘을 주어 꽉 쥐었다가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해요.”
순간 헤레이스의 행동이 느릿해졌다.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헤레이스가 나를 보며 멍한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
“네…?”
헤레이스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의 눈빛 속에 담긴 희망과 불안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해 줄게요.”
나는 헤레이스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미소를 지었다. 내 말 한마디에 극적으로 반응하는 그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나는 좀 더 확실한 대답을 했다.
“그대와 결혼을.”
헤레이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내가 본 어떤 것보다 가장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은 환희로 가득 찼다. 눈가에 투명한 액체가 반짝일 만큼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잊었다는 말은 거짓말로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던 일이고, 미래를 몇 번이고 바꾼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이니까. 나는 여전히 그날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역시 분명히 존재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회귀 전의 헤레이스와는 분명 달랐다. 모두 잊을 수는 없지만…앞으로 함께라면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헤레이스가 기약 없이 잠들어 있을 때, 그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음은 진짜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모두가 포기한 헤레이스가 깨어났을 때,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의 손을 붙잡고 빌었던 모든 말들이 결국엔 내 진심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