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체자렛 백작가2021.02.19.
아멜리아가 밖으로 나오자, 이사나가 그녀를 반겼다.
“가주님.”
그는 더없이 상큼한 목소리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멜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이사나의 모습에 멈칫했다. 특히, 제대로 제복을 갖춰 입고 있는 모습이 의아했다. 물론 옆에 서 있던 마미의 표정은 발그레해진 상태였지만.
“무슨 일이지?”
아멜리아는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으나, 이사나는 태평하게 답했다.
“체자렛 백작가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호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조용히 다녀올 거야.”
하지만 의외로 이사나가 단호하게 손짓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이제 피오레의 가주가 되실 분. 혼자의 몸이 아니십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지키지 못했다면, 피오레의 티어들 자존심 문제기도 합니다. 적이 전혀 없으신 것도 아니신 듯하고.”
살벌한 말을 상큼하게 던지는 이사나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뭔가 묘했다. 마미는 마냥 잘생긴 얼굴에 홀딱 빠진 듯했지만 말이다. 이사나 블란. 듣자 하니 외모 출중하고, 성품도 다정하고 친절해서 그에 대한 평판은 무척 좋았다. 저격대 단장으로는 최연소라고 했으니, 실력도 뛰어나고.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아멜리아는 이상하게 그 완벽함이 신경 쓰였다.
‘저 미소를 영 믿을 수가 없어.’
뭔가 묘하게 날 서 있다고 해야 할까? 저 헤실헤실한 미소 뒤에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특히나 자신에게 깍듯하긴 하지만 신뢰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탐색하는 시선이었으니까.
“가주님?”
이사나는 말이 없어진 아멜리아를 깨웠고, 마미는 그런 아멜리아에게 속삭였다.
“뭘 망설이세요! 당연히 호위단은 있어야죠. 그것도 이사나 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어요. 아주 화려하게 귀환하셔서 기를 팍 꺾어버려야 할 거 아녀요! 특히 메사리나 그 계…… 아니. 아가씨께!”
이사나는 마미의 말에 웃음을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런 것도 필요하십니까? 그럼 더 화려한 제복으로 갖춰 입을까요? 호위단 수도 늘리고…….”
“아니! 아니다. 진짜 그럴 필요는…….”
“레이디 아멜리아는 내가 모실 것이다.”
그때, 아멜리아의 귓가로 듣기 좋은 저음이 감돌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이클리트가 자연스럽게 아멜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다 훨씬 더 단정한 차림에 나름대로 머리도 깔끔하게 올린 상태였다. 이사나는 곧장 그에게 예를 갖췄다. 이클리트는 그런 이사나를 맘에 안 드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클리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호위는 걱정 말고 돌아가라.”
“그래도 호위 인원이 더 필요하실 텐데요?”
이사나가 어쩐지 쉽게 물러나지 않자, 이클리트의 표정이 점점 더 얼어붙었다.
“왜 더 필요하지? 나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그런가?”
칼날 같은 살기가 이사나를 꿰뚫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벌써 두 번째. 인정하긴 싫지만, 정말 기운만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짓누른다. 결국, 그의 입매가 스르르 풀리며 이클리트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장의 흑사자신데. 그럼 대공 전하만을 믿겠습니다.”
“그대가 믿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지킬 테니.”
이클리트는 마지막까지 이사나를 향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생각지도 못한 신경전이 어이없었고, 마미는 두 사내가 아가씨를 서로 지키려고 하는 광경이 마냥 흐뭇하기만 했다. 이사나가 떠나고, 마미도 마지막 준비를 하겠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마주했다.
“정말 같이 가실 거예요?”
“당연히 같이 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체자렛 백작가니 말입니다.”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의미 있는 곳이 아니에요. 굳이 같이 가실 필요는…….”
“굳이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린 계속 함께해야 하는데.”
“그 말이 이렇게 어딜 갈 때마다 곁에 있는 건 줄 몰랐네요.”
“이사나 경의 말처럼 호위는 필요합니다. 호위단을 대규모로 꾸리는 것보다는 내가 나을 거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영애를 지킬 테니까.”
아멜리아는 이글거리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멈칫하고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그녀는 살짝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는 순간, 이클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고맙고.”
“겉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니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처음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달라고. 무엇이든, 기꺼이 복종하겠다고 했으니까.”
아멜리아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에서 멀어지기도 전에,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젠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너무 익숙해져서, 이렇게 잡고 있지 않으면 허전하다는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 아멜리아가 말렸으나, 체자렛 백작가로 향하는 호위단이 작게나마 꾸려졌다. 이는 마미의 의견이었다. 귀족에게 중요한 건 평판이고 품위이기에. 어느 정도 기본은 갖춰야 한다는 것.
‘아가씨는 사교계를 몰라도 너무 모르세요! 그 세계가 괜히 예법을 따지고, 화려하게 꾸미는 게 아니라고요! 아가씨는 곧 피오레의 가주가 되실 분.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초라해 보이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완강한 마미의 의견에 아멜리아도 이 정도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피오레의 문양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마차를 타고서 마침내 체자렛 백작가에 당도했다. 이클리트의 손을 잡고서 마차를 나선 아멜리아의 시선이 복잡했다.
‘처음 여길 나설 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리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체자렛이라는 이름에 얽매여 있었을 테니까. 그때, 저택의 문이 열리면서 하인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마미는 집사장도 아닌 고작 하인이 접대하는 것에 분노했다.
“지금 이게 무슨 경우죠? 차기 가주님과 대공 전하를 접대하는 건데!”
아멜리아는 그런 마미를 말리며, 오히려 이클리트에게 미안했다.
“죄송해요, 대공 전하.”
“아닙니다.”
“오늘만 참아주세요. 아직은 작위 수여를 하지 않았으니. 오늘은 아버지의 딸, 체자렛 영애로 왔으니까요. 딱, 오늘만.”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차갑게 하인에게 꽂혔고, 하인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멜리아는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너무나도 숨 막히는 백작가로 들어섰다. 집 안의 분위기는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체자렛 하인들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고, 오히려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그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만 할 뿐,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미는 그 모습에 분했지만, 이클리트는 그저 아멜리아의 곁에 있을 뿐이었다. 아멜리아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이었다. 자신은 이 저택에 살았으나, 살지 않았던 유령 같은 존재였으니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존재. 하지만 그런 취급은 자신으로 족하다. 아멜리아는 멀뚱멀뚱 서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
“클리오 대공 전하와 이 아이를 응접실로 데려가라.”
“같이 가겠습니다.”
“예! 저도 같이 갈게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는 혼자 만나고 싶어요. 이해해주세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시선에 뭔가 불안했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는 우물쭈물하는 하인을 향해 날 선 어조로 외쳤다.
“당장 제대로 모셔라. 내 손님이 아닌 피오레 공작가에서 오신 손님들이니.”
“예? 아, 알겠습니다.”
하인이 이클리트와 마미를 데려갔고, 아멜리아는 심호흡하고서 아버지가 계신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더 심한 하인들의 태도를 보니, 아버지는 자신이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수습되지 않은 거겠지. 아버지가 말한 수습은 이게 아니니까.’
하지만 자신이 택한 수습은 이것이고, 오늘은 이해가 아닌 통보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걸음을 옮기던 와중, 어떤 그림자가 그녀 앞을 막았다. 체자렛 백작부인이자 아멜리아의 새어머니인 후지아였다. 후지아의 눈가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같은 소리 하는구나. 애당초 우릴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던 거지. 메사리나도. 그렇게 착한 척 가증 떨면서 챙기더니. 이런 식으로 버려?”
후지아의 말에 아멜리아는 자꾸만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지금 누가 해야 할 소리를 누가 하는 걸까.
“대체 네가 무슨 수작으로 피오레를 차지한 건인지는 몰라도, 체자렛엔 눈독 들이지 마. 더 이상 우린 가족이 아니니까.”
아멜리아는 후지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저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미움받아야 했다. 또한 몇 번이고, 죽어야만 했다.
“애초에 가족이 아니었잖아요. 한 번도 제가 살길 바라지 않으셨잖아요.”
자신이 내뱉고도 우스운 말.
“내가 바란다고 네가 살 수나 있었고?”
“그래서 죽이려고 하셨어요?”
냉랭하게 되돌아오는 아멜리아의 말에 후지아가 멈칫하며 외쳤다.
“네가 지금 무슨!”
“피오레 공작가로 가는 길에 큰일을 당할 뻔했어요. 어머니 짓 아니에요?”
후지아는 몰아붙이는 아멜리아의 말에 경악했다.
“하! 내가 뭐, 도적들을 사서 널 죽이려고 했다는 거니?”
“도적이라고 말 안 했는데.”
아멜리아의 한마디에 후지아가 멈칫했다.
“크, 큰일 당했다며. 그럼 당연히 도적이지.”
“거긴 도적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고 사람들 모두가 의아해하던데요.”
“헛소리하지 마. 증거도 없이 네가 날 모함해?”
“이번 한 번인 것도 아니잖아요?”
아멜리아는 그녀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박으며 끔찍한 진실을 읊조렸다.
“사실 저, 다 기억해요, 어머니. 기억해도 못 하는 척했던 거지. 어머니가 나 버리고 죽이려고 했었다는 거. 어릴 적, 그 캄캄한 어둠 속에 나는 길을 잃었던 게 아니라 버려졌었다는 거.”
가끔,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그녀는 어둠을 무서워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빨리 좀 죽어버려!’
깊은 밤, 어린 아멜리아가 산속에서 길을 잃었던 건 후지아가 그녀를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려 쓰러졌던 그녀를 운 좋게 사냥꾼이 발견하여 데려왔던 것.
‘아멜리아, 괜찮니? 세상에 어린 것이 어떻게 거기까지 혼자 갔던 거야!’
하지만 살아 돌아온 아멜리아에게 후지아는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다독여주었었다. 그녀는 다 기억했다. 자신을 안아주는 이 손으로 자신을 어둠 속으로 떠밀면서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었던 그 목소리를. 그런데도 그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여튼 쓸모없는 것.’
아버지의 차가운 냉대. 어린 아멜리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슨 진실을 말해도 변하는 건 없을 거라고.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을 더 미워할 것 같아서.
‘죽는 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아니면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가?’
그래. 너무 익숙해서. 지금까지 목숨을 위협했던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지 알면서도 참고, 괜찮다고 넘기며 외면했던 이유였다. 후지아는 아멜리아의 말에 감추려고 해도 눈빛이 마구 흔들리며 애써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 네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니?”
“협박이 아니라 경고죠. 더는 눈에 빤히 보이는 그런 멍청한 수, 쓰지 말라는. 이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참지 않을 테니까.”
그래,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 이후로 자신이 이 전부를 버릴 거니까.
“마지막 자비예요. 내가 이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어머니도 감히 선을 넘지 마세요. 다음엔 체자렛 영애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닌 피오레 가주를 죽이려고 한 죄로 오히려 그 목숨이 날아갈 테니까.”
하얗게 질린 후지아의 얼굴 위로 아멜리아는 잔뜩 벼린 경고를 심었다.
“아, 이제 어머니도 아니지. 체자렛 백작 부인, 이렇게라도 불리고 싶으면 얌전히 계세요. 부디.”
그녀는 차갑게 후지아의 곁을 떠났다. 생각지도 못한 모멸감에 후지아의 입술이 파들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저 계집이 피오레 가주라니.
‘죽어야 하잖아. 그게 맞는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죽지 않고 마법까지!’
“메사리나. 이 아인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시 전부 빼앗아야 할 거 아니야!”
*** 하나는 끝낸 것 같고, 이제 가장 무거운 하나가 남았다. 집무실에 당도한 아멜리아는 제 앞을 건방지게 막아선 집사장을 응시했다. 그는 시건방진 표정으로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볼 이유는 없다고 하십니다.”
집사장은 일부러 아가씨라는 말을 강조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처음으로 다른 이름을 내뱉었다.
“체자렛 영애를 볼 이유는 없으시겠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나는 아멜리아 피오레다. 그러니 비켜.”
“그건 주인님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셨습니다.”
끝까지 막아서는 집사장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차갑게 웃었다.
“못 들었나? 내가 체자렛 백작을 보러 왔다는데, 감히 일개 집사장이 끼어들어?”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은빛 소총을 꺼내 장전했다.
“소문이 다 퍼졌을 텐데. 내가 어떻게 가주가 되었는지. 그 시험 결과가 어땠는지. 아니면 눈으로 직접 봐야 믿으려나?”
탕-! 아멜리아는 바닥을 향해 그대로 총을 쐈다. 굉음 같은 총성 끝에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그보다 날카롭게 울렸다.
“계속 걸음을 막으면, 귀족법에 따라 다음엔 머리다. 자, 어떻게 할까?”
소문으로 듣긴 했으나, 정말로 아멜리아가 총을 쓰자 집사장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걸음을 비킬 수밖에 없었다.
“드, 들어가십시오.”
아멜리아는 초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철옹성처럼 보이는 집무실의 문.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은 두려움이 아멜리아의 심장을 들썩이게 했다. 5살 때,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이곳을 제 발로 직접 온 적은 없었다. 아버지를 단둘이 만난 적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젠 마주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니까.’
아멜리아는 떨리고 있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서 집무실의 문을 스스로 열었다. 어떤 언질도 없이 집무실 문이 함부로 열리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아젠 체자렛 백작은 뜻밖의 존재에 더욱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네가 여기 무슨 일이지? 수습하고 돌아오라고 했을 텐데.”
같은 백작가에 있으면서, 거의 반년 만에 보는 얼굴임에도 아젠의 시선에 딸을 향한 온기는 없었다. 온기는커녕 분명 소식을 들었을 텐데.
‘내 심장이 어떤지. 이제 괜찮아진 건지. 그런 것조차 묻지 않으시는구나.’
아멜리아는 어느 순간 편하게 웃었다.
‘이젠 진짜 미련도 없어.’
“지금 웃는 거냐?”
“저는 이미 수습했습니다. 곧 피오레 가주가 될 테고, 그래서 체자렛을 버릴 겁니다. 이제부터는 피오레 이름으로 클리오 대공 전하와 결혼하겠습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황제 폐하께서 버린 황자와 결혼이라고?”
“저한테는 괴물 대공이 어울린다고. 바스티얀 대공 전하는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신 건 아버지시니까. 사실 허락도 이유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통보하러 온 겁니다.”
아멜리아는 마지막에 마지막 감정까지 전부 끌어모아 말했다.
“보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평생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백작가는 아버지의 재산이고,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걸로 전부 다 되었다고 생각하며 돌아선 순간.
“또 소중한 것을 잃겠구나, 네 어머니를 잡아먹은 것처럼.”
아젠의 날카로운 말이 그대로 박혀왔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아버지까지 잡아먹으려고 하는구나. 아멜리아, 넌 혼자 있어야 해. 태어난 순간부터 넌 저주받았어. 그게 아니면, 멀쩡했던 그녀가 널 낳고나서 죽었을 리가 없지. 넌 네 곁에 있는 모든 걸 불행하게 만들어. 그래서 널 가둔 거다. 죽으려면 혼자 조용히 죽으라고.”
“…….”
“그래, 꺼져라. 바스티얀 대공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너 같은 계집은 더 이상 쓸모없으니. 하지만 이 선택을 넌 반드시 후회할 거다, 아멜리아.”
아젠의 시선에 아멜리아를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절 그렇게 버린 건가요?’
아멜리아는 더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그대로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이미 해가 저문 복도는 새까맣다. 그 어둠에 아멜리아는 숨이 차오르다 못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와 그녀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어둠이 무서운 건 사실 후지아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사라졌다. 필요한 것만 챙긴 채 떠나버린 것. 자신을 홀로 남겨둔 채. 거기서 이미 자신은 버려졌던 거다. 다 떠나버린 그 어둠 속에 홀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이 까만 곳에서 난 매번 버려져. 끊임없이 버려지고 또 버려지고…….’
점차 뒤덮기 시작하는 기억이 아멜리아를 짓눌렀다. 아버지에게 버려졌던 그 시간, 그때처럼.
“아니야. 이번엔 내가 떠나는 거야. 내가 버리는 거라고. 그러니까, 움직여…… 제발. 제발!”
“아멜리아!”
어둠 속에서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너무 어두워요. 여기. 너무, 너무 무서워. 날, 또 버리지 마…….”
부서질 듯 떨리고 있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이클리트가 나직이 속삭였다.
“어두우면, 밝히면 돼요.”
순간, 엄청난 빛이 사방으로 쏟아지면서 아멜리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대공, 전하…….”
“걱정 말아요.”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햇빛에 싸여 있는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당신을 아프게 하는 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안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