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예쁘고 또 예쁜 것으로2021.02.22.
“내가 그렇게 안 둬.”
지독한 감정이 눌렸다. 이클리트는 곧장 아멜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아멜리아는 그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무섭게 떨렸던 몸이 녹아내렸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진 것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모습만 보였다. 주변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그의 모습이, 태양 같았다. 그 어떤 순간에도 제 눈길 끝에 있는 이 사람이.
‘왜 항상 곁에 있어요? 왜 자꾸 날 위로해주는 거예요?’
차마 묻지 못하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며, 아멜리아는 그를 붙잡은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이클리트와 아멜리아가 떠나고, 그 빈자리로 아젠이 걸어왔다. 아젠은 이클리트가 있었던 빈자리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내가 분명 봤어. 갑자기 해가 떠서 사방이 훤했다니까?”
“날이 저문 지가 언젠데 무슨 해가 나와. 달을 잘못 본 거 아니야? 오늘 달도 훤하네.”
“아닌데. 분명 해가 떴었는데…….”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아젠은 두려움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폐하께서 ‘그 실험’ 에 성공하셨던 건가. 아니면, 모르고 계시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성공했을 리가 없어.”
아젠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더는 그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만약 그렇다면.’
아젠은 아멜리아를 떠올리며 차갑게 혀를 찼다.
“너는 또 네 곁에 있는 이를 죽이겠구나. 아주 잔인하게.”
*** 피오레 공작가에 도착한 아멜리아는 기운이 없었다. 마미도 그런 아멜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별말 없이 곁에 있기만 할 뿐이었다. 마미가 그녀를 방으로 모시려고 할 때. 이클리트가 먼저 아멜리아에게 권했다.
“잠시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가면 안 될까요? 지금 좀 피곤해서…….”
보통 이렇게 말하면 순순히 물러났었는데, 어쩐지 이클리트가 살짝 고집을 세웠다.
“꼭 가주면 좋겠습니다.”
이클리트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기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럼.”
“그럼 저도 같이…….”
“내가 잘 모시도록 하지.”
이클리트가 마미를 부드럽게 막아섰다. 즉, 단둘이 가고 싶다는 얘기였다. 아멜리아는 계속해서 의아함이 떠올랐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인 거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이클리트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서 익숙한 향기가 아멜리아에게로 훅 밀려들었다.
“제비꽃 향기가 대체 어디서 이렇게…….”
아멜리아는 순간 흔들리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길은 폐허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제비꽃밭으로 가는 길이었다.
‘설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클리트의 손을 놓고서 달렸다. 걸음을 내디디면 내딛을수록 바람에 맺힌 제비꽃 향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럴 수가 없잖아. 그 꽃은 이미…….’
달려가던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아니, 그대로 굳어졌다. 눈앞에 휘늘어지게 피어 있는 제비꽃이 끝도 없이 넘실거리며 까만 밤하늘 아래서 보랏빛 장막으로 춤추고 있었다. 정말이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에 아멜리아는 겨우 숨을 내뱉고, 또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어둠이 마냥 아무것도 없이 까맣기만 한 건 아닙니다.”
아멜리아의 곁으로 다가온 이클리트가 잔잔하게 부는 바람 끝에 제비꽃을 뒤섞으며 속삭였다.
“이토록 사방이 고요하고 적막하니, 꽃이 더 예쁘게 보이지 않습니까?”
눈가에 몰린 열기가 결국 눈물이 되어 그녀의 두 뺨을 갈랐다.
“어둠을 계속, 무서워했는데. 원망하기도 했었는데. 당신 때문에. 예뻐 보이잖아요…… 흡!”
그녀의 두려움과 원망을 이클리트는 예쁘고 또 예쁜 것으로 덧씌우며 지워나갔다.
“영애는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영애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휘둘려서 아파하지 말아요. 그건 영애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한 겹, 한 겹 포개지며 아멜리아의 마음속 깊이 파인 상처 위로 안온하게 내려앉았다.
“영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아요. 그들의 사랑으로 이뤄진 영애는 무척 예쁘고 사랑스럽고. 그러니 영애는 한 번도 버려진 적 없어요. 앞으로 계속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도록 해요.”
어느새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아멜리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고, 항상 웃도록 하고.”
눈물을 닦아 내리는 그 손길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묘한 긴장감이 맺혔다.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그래도 여전히 허전하다면.”
상처를 어루만지듯 매만지던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아멜리아는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대공 전하?”
“곧 결혼식이 거행될 테고, 그럼 우린 부부가 될 겁니다.”
“그렇죠.”
“영애는 나를 반드시 황제로 만드세요.”
“당연해요.”
“그런 영애를 나는 끝까지 책임지고 지키겠습니다.”
“……네?”
이클리트는 여러 말속에 감춰두면서도, 그녀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조금 꺼냈다.
“마지막까지 나만은 당신의 편이 될 겁니다. 우린 이제 부부니까요. 내가 당신의 새로운 가족이 되겠습니다. 그것조차 이용하는 겁니다, 나를.”
아멜리아는 그가 여기서 청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진짜처럼.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듯이. 하지만 전부 거짓이다.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야 하니까.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야.’
술렁이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니, 묘하게 따끔거렸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잖아. 다른 누군가를 맘에 두고 있으면서. 근데 누굴까? 괜히 신경 쓰이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냉혹한 괴물 대공은 아닌 게 확실했다. 오히려 누군가를 깊이 맘에 담고 있으니, 순정파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렇게 맘에 없는 말을 달콤하게 쏟아내고 있지 않던가!
‘신분에 가로막힌 사랑, 뭐 그런 건가? 혹시 황제가 되려는 이유도 그 여자랑 관련 있는 거 아닐까?’
생각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곳까지 뻗어 나가자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대공 전하께서 아시겠지만, 우린 몹시 사랑하는 사이여야 해요.”
“물론입니다.”
이클리트는 어쩐지 낯빛이 어두워 보이는 아멜리아를 살폈다. 자신이 너무 선을 넘는 말을 했나,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바람은 안 돼요.”
“…….”
“나중에 황제가 되신 후에 정부를 두시는 건 괜찮지만…….”
사실 그것도 약간 거슬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서로 이용할 거 다 이용한 후에도 그가 이 계약을 계속 이어나갈 필요는 없는 거니까. 그때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나도, 얼마 살지 못할 테고.’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다소 차가워진 어조로 말했다.
“나야말로 제대로 하고 싶네요.”
“뭘요?”
“애인은 안 됩니다.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것도 안 됩니다.”
몹시 단호한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하?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실 필요 없으세요. 저도 필요 없으니까. 그럴 시간도 없고.”
“물론 그럴 것 같았지만.”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자긴 생각하는 것으로 모자라 나중에 제대로 만날 생각이면서! 근데 진짜 누구지? 누굴까? 물어보면 안 되겠지? 이건 계약과는 상관없잖아. 아니지. 그래도 지금은 계약에 충실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다른 여자가 있다면 내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머릿속으로 몹시 치열하게 생각하던 아멜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아니야.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자신이 신경 쓰이는 이유는 단 하나. 계약이 틀어질까 봐. 혹시라도 남에게 자신들의 사이를 들킬까 봐. 그뿐이다. 그러니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그치만. 뭔가 지는 느낌은 싫으니까.’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절 진심으로 좋아하지는 마세요.”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는 멈칫했다.
‘이 이상한 말은 대체 뭐야! 날 좋아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이분도 그냥 계약일 뿐이잖아!’
없던 말로 할까? 지금이라도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본다는 건, 대체 뭐야?
“아, 루나비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루나비요? 어디? 어디요?”
루나비는 오직 밤에, 그것도 가장 깨끗한 달빛 아래에서만 나타나는 나비였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나비가 제비꽃 사이로 하늘하늘 날아다니며 빛나고 있었다. 워낙 날개가 투명했기에, 보랏빛이 물들어 마치 제비꽃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 같았다.
“와아! 너무 예쁘다.”
여전히 이 풍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다시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곳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활짝 피어났을까. 그때보다 더 예쁜 모습으로.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너무 사랑하고 소중한 건 오래 가지 못해서 슬펐다. 자꾸 보고 싶어지니까. 그런데 이분은 그저 스치는 모든 것들을 붙잡아서 다시 제게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대공 전하와 있으면 자꾸 신기한 일이 생겨.’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고, 폐허를 제비꽃으로 채워준다. 마법을 쓰는 것 같진 않은데.
‘다른 건 몰라도 생명을 다루는 건 마법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고대에서도 그건 불가능했다고.’
마법은 만능이 아니기에. 생명을 다루는 건 오직 신의 영역이다. 그때, 이클리트의 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는 눈가를 살짝 접으며 속삭였다.
“거기도 루나비.”
“네? 어디요?”
“영애 바로 옆에 있습니다.”
“어디? 없는데?”
아멜리아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이클리트가 순식간에 제비꽃 한 송이를 흔들자 루나비가 날아와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기.”
그녀는 바로 코앞에서 빛나고 있는 루나비의 모습에 그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너무 예뻐요. 꼭 제비꽃 위로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이클리트는 단 한 순간도 아멜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속삭였다.
“그러네요. 난생처음 봅니다. 이렇게 예쁜 거.”
간지럽게 파고드는 속삭임에 아멜리아는 다시금 저를 응시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훔쳐보았다. 그가 보여주는 이 밤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쩐지 위험했다.
‘그래. 그냥 우연이야. 그저 계속 우연인 거야.’
그게 아니면. 이 예쁜 게 전부 부서질 것 같아서. 또 다른 두려움이 생길 것 같았다. *** 벨반은 아멜리아를 보자마자 와락 안아주었다. 그의 눈가엔 아닌 척하려고 해도 이미 촉촉하게 젖은 상태였다.
“아일리가 이루지 못한 걸 네가 이뤘구나. 게다가 네가 건강해지다니. 이건 기적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정말 감사해요.”
“내가 더 감사하지. 나중에 아일리를 다시 만나게 되면, 부끄럽지 않게 얼굴 볼 수 있겠어. 그래. 네가 마법을 쓸 수 있었구나. 역시 심장이 문제였어.”
아멜리아는 그저 많은 비밀을 삼키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벨반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서 진심으로 말했다.
“피오레를 잘 부탁한다. 너에게 줄 수 있어서 내 마음도 한결 가볍구나. 다른 티어들도 네 실력을 인정했으니, 많이들 도와줄 거다.”
“공작 각하께서도 절 많이 도와주세요. 아직 온전히 이 큰 걸 이끌기엔 부족한걸요.”
“내가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구나.”
아멜리아는 살짝 머뭇거리며 본격적으로 묻고 싶은 걸 물었다.
“그런데 황실에 무슨 일이 있나요? 황궁에 자주 가시는 것 같던데…….”
이제부터는 제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벨반은 아멜리아의 말에 망설였으나, 이젠 그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폐하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
‘역시 그런가.’
“황후 폐하께서도 황후의 역할을 하지 못하시고 말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죠? 황후 폐하께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물론 언제부터인가 황후께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황실에서 큰 문제는 아니라고만 얘기했었다.
“이건 기밀 사항이긴 하지만, 너도 이제 다섯 공작가 중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가 될 테니 알아야겠지.”
벨반은 한껏 낮아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정신적인 병환이 깊으시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시지. 그래서 황후궁에 갇혀 지내고 계신단다.”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에 아멜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폐하께서는 황실에 생긴 변고에 황권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고 계신다. 특히 전쟁을. 자세한 건 대회의에서 알게 될 거다.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좋지는 않아. 그래서 너의 결혼식과 작위 수여를 서둘러야 할 것 같구나. 일단 결혼식이 우선이겠지?”
아멜리아는 생각을 뒤로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벨반과 헤어진 아멜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황실은 어지러웠고,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건.
‘전쟁이라…….’
솔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프리메 제국. 태양의 가호를 받은 솔라와 달리 안개와 눈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북부가 얼어붙어 있는 건, 전부 프리메 제국의 영향이었다. 두 제국은 사이가 좋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살얼음판 위였다. 바로 두 제국 사이에 겹쳐 있는,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정령들의 땅. ‘시간의 숲’ 때문이었다.
‘아무리 두 제국이 그 숲을 노리고 있다고 해도, 당장 전쟁까지는 아니었는데.’
숲이 탐나긴 하지만, 당장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는 아닌 게 그 숲은 정령들에 의해 봉인되어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다.
‘설마 폐하께서 승하하시기 전, 일단 정복이라도 하시려는 건가.’
방에 도착한 아멜리아는 곧장 마미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마미를 대신해 케이트가 서 있었다.
“케이트?”
케이트는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머물 곳을 다시 마련했습니다, 가주님. 비올렛 궁으로 가시지요. 이미 짐도 전부 그쪽으로 옮겨두었습니다.”
“아…….”
지난번 잠시 머물다 가라고 했던 케이트가 직접 머물 궁을 준비하고, 호칭도 바뀌었다는 건 태도가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뭐든 철두철미한 그가 결국 자신의 감정보다 결과로 보인 아멜리아를 가주로 인정한 것이다.
‘진심으로 그의 신뢰를 받으려면 앞으로 내가 잘해야겠지만.’
비올렛 궁에 도착하자 마미가 그녀를 반겼다.
“아가씨! 아니 이제 가주님!”
하지만 뒤에 서 있는 케이트의 엄한 눈빛에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웃음을 꾹 참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머물던 곳과는 차원이 다른 방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이 가문의 새로운 일원이 됐다는 것이 실감 날 정도로.
“가주님, 황궁에서 도착한 물건이 있습니다.”
“황궁?”
아멜리아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고서 케이트가 들고 있는 황금색 상자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다섯 공작가의 작위 수여에 황실은 개입하지 않았다. 공작가에서 결정하면, 황제는 그 의견을 존중하는 것. 그만큼 다섯 공작가는 여러 가지 독자적인 권능이 주어져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검입니다.”
대신 황제는 새로운 가주에게 날이 없는 검을 하사했다. 서로가 적이 아닌, 지키고 함께 나아가는 관계라는 의미.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칼자루를 들고서 무딘 칼날을 더듬었다. 그 순간.
“윽!”
“가주님!”
아멜리아는 굳어진 시선으로 살짝 베인 손가락에 맺힌 피를 바라보았다. 분명 날이 무뎌야 하는데, 딱 한 부분의 날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마미는 곧장 헝겊으로 피를 닦아냈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황궁에서 실수가 있었나 봐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아멜리아와 케이트의 표정은 달랐다.
‘황실에서 내린 물건에 실수? 그것도 새 가주에게 하사하는 검에?’
아멜리아는 점점 붉게 번지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가주가 된 걸 싫어하시는구나, 폐하께서.’
아니면 혹, 클리오 대공 전하에게 하는 경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