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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축복의 꽃 (16/199)

16화. 축복의 꽃2021.02.26.

아멜리아는 하얀 헝겊에 묻어나는 붉은 피를 응시하며 서늘한 시선을 보였다.

16553701200631.jpg‘황실에서 하는 일에 실수는 없어. 전부 다 의미가 있는 거야.’

무딘 칼날에 숨어 있던 딱 한 점의 날 선 칼날. 함께할 테지만, 서로 피 볼 일 없게끔 하자는 경고.

16553701200631.jpg‘내가 가주가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가.’

그녀는 지금의 황제를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 백작가에, 그것도 사교계에 제대로 입성해 본 적 없는 한낱 시한부 영애를 황제께서 미워하고 자시고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를 싫어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

16553701200631.jpg‘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 전하.’

황제께서 클리오 대공 전하를 싫어하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는데, 황실에선 아무런 답서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북부로 버리듯 보냈다고 하여도 황자 전하인데. 이토록 아무 반응조차 없는 건.

16553701200631.jpg‘우리 아버지 같아.’

결혼하던, 말던 관심조차 없다는 것. 사실 대공 전하께서 마음대로 북부를 벗어난 것도 조금 걸렸는데, 그조차 반응이 없었다.

16553701200631.jpg‘이 정도면 나 몰래 대공 전하께서 폐하와 무슨 얘기가 오간 게 아닐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점점 더 궁금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에드조프의 말도 거슬리고 말이다.

16553701200701.jpg‘천한 어미 때문에 고귀해야 할 누군가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데. 그걸 알고도 뻔뻔스럽게 돌아와서는.’

16553701200631.jpg‘설마 황후 폐하와 관련 있는 걸까?’

앞으로 그분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피오레 말고 다른 공작가를 그분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이걸 제대로 묻긴 물어야 하는데.

16553701200631.jpg‘이상하게 겁이 나.’

그토록 올곧았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흔들리다가 상처받고 깨질까 봐. 그래, 조금이라도 그를 상처 입힐까 봐. 그게 조금 무서웠다. 아멜리아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바깥이 부산스러웠다.

16553701200716.jpg“어머, 화가가 당도했나 봐요.”

오늘은 결혼식과 작위 수여식에 쓰일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16553701200716.jpg“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오셨네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가 움찔하며 재빨리 상처 난 손을 뒤로 숨겼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이클리트는 뭔가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그녀를 향한 눈빛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케이트에게 다시 검을 전달했다.

16553701200631.jpg“무사히 하사받았다고 전달하고. 감사하다고. 오직 폐하를 위해서만 그 칼날은 날카로워질 것이라고 전하도록.”

케이트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이클리트는 걸음을 옮기는 케이트를 눈으로 계속 좇았다. 마미가 화가를 도와주는 사이, 이클리트는 그제야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1655370123226.jpg“무슨 일입니까?”

아멜리아는 확신하며 묻는 그의 말에 움찔했으나, 일단 발뺌했다.

16553701200631.jpg“무슨 일이라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1655370123226.jpg“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닌데.”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뒤로 가는 척, 숨긴 손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녀는 살짝 울상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16553701200631.jpg“진짜. 대공 전하께는 뭐 하나 숨기질 못하겠어요.”

1655370123226.jpg“숨기지 않으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특히나 이렇게 다친 건.”

이클리트는 피가 묻어난 헝겊을 보며 목소리가 낮아졌다.

16553701200631.jpg“너무 사소한 거니까 숨겼죠. 그냥 편지를 읽다가 종이에 베였어요. 별로 안 깊잖아요.”

상처를 살피던 이클리트가 차가운 숨을 삼켰다. 단숨에 알았다. 칼에 베인 상처라는 걸. 이클리트는 케이트를 떠올렸다.

1655370123226.jpg‘폐하께 하사받은 것. 공작에게 내리는 무딘 칼날의 검. 설마 거기에 베인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그의 표정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1655370123226.jpg‘나 때문이군.’

아멜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클리트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16553701200631.jpg“그러는 대공 전하는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없으세요?”

1655370123226.jpg“……없습니다.”

머뭇거린 기색을 아멜리아는 처음으로 읽었다.

16553701200631.jpg‘이거 묻는다고 쉽게 대답해줄 것 같지 않네.’

16553701200716.jpg“대공 전하! 가주님! 이쪽은 준비가 끝났어요!”

마미의 목소리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경쾌하게 울렸다. 아멜리아는 내심 잘됐다, 생각하며 얼른 분위기를 바꿨다.

16553701200631.jpg“자자. 상처는 괜찮으니까, 얼른 준비하죠. 예쁘고 멋있게 그려야 하니까요.”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와서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방안에 마련된 밀실인 부두아르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마지막까지 아멜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아멜리아는 마미가 준비한 하얀 드레스를 갖춰 입었다.

16553701200716.jpg“오늘은 밑그림만 그릴 텐데, 나중에 채색 들어갈 땐 이 드레스에 축복의 꽃이 그려질 거예요.”

16553701200631.jpg“축복의 꽃?”

16553701200716.jpg“피오레의 상징이 꽃이잖아요. 신관님이 축복으로 만든 꽃장식으로 웨딩드레스를 꾸미죠. 일명 ‘축복의 꽃’이라고 불려요.”

마미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들뜬 어조로 말을 이었다.

16553701200716.jpg“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근사한 웨딩드레스가 될 거예요. 행여 조금이라도 축복의 꽃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당일까지 완벽하게 보관될 테고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16553701200631.jpg“망가져서 못 입으면 어쩔 수 없지, 뭐.”

16553701200716.jpg“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주님!”

그러자 마미와 더불어 다른 하녀들이 경악했다. 아멜리아는 순간 자신이 무슨 엄청난 실수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16553701200716.jpg“무려 축복의 꽃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라고요!”

16553701200716.jpg“공작가의 결혼식에 축복이 빠지다니. 그건 있을 수 없어요!”

태양신을 섬기는 솔라는 신관의 축복 아래 결혼식을 치르는 걸 큰 영광으로 여겼다. 축복이 깃든 물건을 지니고 결혼하는 신부를 축하하면, 그 축복을 나눠 받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신관이 주체하는 결혼식은 보통 황족이나 귀족 중에서도 후작과 공작만이 가능했다. 태양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신관의 축복을 받는 건 선택 받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영지민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지민들은 공작가의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저 그 근처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축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작가의 결혼식은 보통 결혼식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성스러운 의식인 셈.

16553701200716.jpg“특히 다섯 공작가는 보이는 평판, 명예, 품위 어느 것 하나라도 흠집이 나선 안 돼요! 그런 걸 지키는 것도 가주의 의무! 공작령에 사는 영지민들도 긍지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한다고요!”

새삼 공작이 된다는 게, 얼마나 보는 눈을 의식해야 하는 자리인지 알 것 같았다.

16553701200716.jpg“특히 가주님은 시험을 조금 소란스럽게 끝내셨잖아요. 아닌 척해도 아직 말이 나오는 중이에요. 그러니 이번 결혼식과 작위 수여식이 매우 중요하다고요.”

하긴. 보수적인 귀족 세계에서 너무 튀긴 했다. 앞으로 대공 전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선 평판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16553701200631.jpg“알았어. 조심해서 행동하도록 할게.”

16553701200716.jpg“웨딩드레스와 별개로 작위 수여식 드레스도 따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경악했다.

16553701200631.jpg“뭐? 그건 또 따로야?”

16553701200716.jpg“당연하죠!”

16553701200631.jpg“굳이 따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16553701200716.jpg“가주님. 제가 또 아까 했던 설명을 장황하게…….”

16553701200631.jpg“알았어, 알았다고.”

뭔가 살짝 걸리는 게 있기는 했지만, 여기서 언급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리치장을 하고 드레스까지 갖춰 입고서 부두아르를 빠져나오자, 역시나 치장을 마친 이클리트가 굳어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초조한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자꾸만 갈 곳을 잃은 손이 목덜미를 향했다가 아차, 하며 내려놓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16553701200631.jpg‘엄청 답답하시구나.’

현재 이클리트의 의복은 무도회에서 입었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하얀 포엣 셔츠에 그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날 만큼 딱 알맞은 프록코트 사이로 크라바트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떨어졌다. 게다가 어깨에 살짝 걸친 망토 역시 황금색 장식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마도 저렇게까지 꾸민 건, 대공 전하 인생에 처음인 듯싶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슬쩍 다가갔다.

16553701200631.jpg“저도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이런 예법은 아직 저도 어색하니까, 같이 배워 봐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조심스러운 배려에 엷은 미소를 띠며 각오를 다졌다.

1655370123226.jpg“노력, 해보겠습니다.”

그 비장한 표정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녀는 또다시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 걸음을 돌린 아멜리아는 순간 뒤에 있던 수납장 고리에 리본이 걸려 휘청였다.

16553701200631.jpg“아!”

이클리트는 곧장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16553701200631.jpg“어머, 고마워요.”

1655370123226.jpg“리본이 다 풀렸습니다.”

16553701200631.jpg“이런. 마미에게 다시 부탁해야겠어요.”

풀린 리본을 잠시 보던 이클리트가 부드럽게 그녀를 돌려세웠다.

1655370123226.jpg“제가 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는 깜짝 놀랐다.

16553701200631.jpg“대공 전하께서요? 리본을? 하실 수 있으세요?”

1655370123226.jpg“뭘 매는 건 잘합니다. 북부에서 사냥하고 나면, 짐승을 단단히 묶었거든요. 같은 끈인데, 비슷하지 않을까요?”

16553701200631.jpg“당연히 비슷하죠! 그럼 부탁드려요.”

아멜리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고, 이클리트는 리본을 잡고서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아멜리아는 괜스레 긴장감을 느꼈다.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고, 그 감각이 그녀에게도 전해져서 절로 기분이 묘해졌다. 하필이면 뒤가 조금 파인 드레스라서, 그가 내쉬는 숨결까지 고스란히 느껴져 절로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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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각. 사각. 그의 손가락을 타고 움직이는 이 작은 소리마저도 자꾸 뜨겁게 귓가로 파고든다. 그녀는 열기가 몰린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16553701200631.jpg‘뭐, 뭐지? 괜히 기분이 왜…….’

마치 억겁처럼 느껴지던 시간 끝에 이클리트가 마침내 살짝 뒤로 물러섰다.

1655370123226.jpg“다 됐습니다.”

아멜리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16553701200631.jpg“고, 고마워요.”

1655370123226.jpg“그럼 이제 제 머리도 좀 정리해주시겠습니까?”

16553701200631.jpg“머리요?”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조금 헝클어진 것 같았다.

16553701200631.jpg“마미를 부를까요?”

1655370123226.jpg“마미는 바빠 보이는데. 다른 하녀들도.”

그의 말처럼 다들 몹시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초상화 역시 피오레의 역사와 함께할 아주 중요한 의식이었으니까.

1655370123226.jpg“그냥 잠깐만 만지면 될 것 같은데.”

어쩐지 조금 조르는 듯한 어조였으나, 아멜리아는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1200631.jpg“뭐, 그 정도는.”

이클리트는 곧장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아멜리아는 탁자에 놓여 있던 빗을 쥐고서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16553701200631.jpg“이런 거 해본 적이 없어서 잘하진 못해요. 이상하면 마미한테 다시 해달라고할게요.”

1655370123226.jpg“전혀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너무 맘에 듭니다.”

16553701200631.jpg“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1655370123226.jpg“느낌으로.”

그는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1655370123226.jpg“그대가 아주 소중하게 만져주고 있으니까.”

그의 속삭임에 아멜리아는 순간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16553701200631.jpg“그, 그냥 잘 못 해서 조심하는 건데…….”

1655370123226.jpg“설령 그런 이유라도.”

빗으로 빗으면서 슬쩍, 슬쩍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스치는 게 좋았다. 마치 쓰다듬어주는 것 같아서. 동경하고 바라던, 그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강아지를 쓰다듬어주고. 어머니가 아이를 다독여주는 그런 느낌. 그로서는 도저히 가져보지도, 가져본 적도 없는 평범하지만 따뜻한 그런 거. 그런 소중한 추억 하나가 그녀로 인해 생기고 있었다.

1655370123226.jpg‘내게 모든 처음은 당신이었어.’

아마 그녀는 앞으로도 절대 모를 테지만. 아멜리아는 그의 머리카락을 빗다가 얼핏,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곤 입매가 스르르 풀렸다.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모습. 그 모습에 아멜리아는 살짝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머리카락이 스치면서 그녀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그를 봤을 땐, 엄청 무서운 맹수라고 생각했는데.

16553701200631.jpg‘지금 이 모습은 그냥 갸릉갸릉 하는 고양이 같아.’

뭔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 누구도 알지 못할 괴물 대공의 숨겨진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남들이 알았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론.

16553701200631.jpg‘나 혼자만, 보고 싶다…….’

16553701200716.jpg“가주님! 이제 준비 다 됐어요!”

마미의 목소리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가 깨졌다. 이클리트는 몸을 일으키고서 손을 내밀었다.

1655370123226.jpg“그럼 가실까요?”

16553701200631.jpg“네.”

하지만 역시 마주 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좋았고, 당연하게 잡아주는 이 단단하고 도드라진 손이 좋았다. *** 결혼식에 쓰일 부부의 초상화가 그려지고, 마지막으로 작위 수여식에 쓰일 아멜리아의 단독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오늘은 밑그림만 그리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자세를 잡고 있는 아멜리아의 표정이 자꾸만 굳어졌다. 장총을 맨 채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곤욕이 따로 없었다.

16553701401129.jpg“가주님, 움직이지 마십시오. 거의 다 끝나갑니다!”

화가가 빠르게 밑그림 작업을 했고, 이클리트는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작 저 종이 하나에 그녀를 다 담아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1655370123226.jpg‘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화가가 마지막 밑그림 작업을 끝내고 펜을 내렸다.

16553701401129.jpg“됐습니다, 가주님.”

16553701200631.jpg“와! 진짜 너무 힘들어!”

아멜리아는 굳어진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을 재미있게 보다가 화구를 정리하는 화가에게 몰래 다가갔다.

1655370123226.jpg“거기.”

16553701401129.jpg“예? 아, 대공 전하. 무, 무슨 일이십니까? 뭔가 제가 잘못한 것이라도…….”

벌벌 떠는 화가 앞에 이클리트가 무심히 말했다.

1655370123226.jpg“조금 전에 밑 작업 한 그림. 똑같은 거로 작게 하나 더 그려라.”

16553701401129.jpg“……예?”

이클리트는 품에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화가에게 건넸다. 원래의 초상화 값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1655370123226.jpg“가주님, 몰래.”

언제나 항상 보고 싶으니까. 아직 정리 못 한 부부 초상화 스케치를 보면서 이클리트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떨리는데. 정말로 감히 그녀와 결혼을 한다. *** 청첩장이 귀족들에게 전부 보내졌다. 아직 작위 수여 전이지만, 피오레 가주로서 치루는 결혼식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는 듯, 무척이나 크고 성대하게 치러지는 듯했다. 체자렛 백작가에도 청첩장이 당도했고, 후지아는 부들거리는 눈빛으로 청첩장을 움켜쥐었다.

16553701432414.jpg“이제 공작이라고 제대로 콧대 좀 높이려나 보지? 하!”

클리오 대공과 결혼하는 건 아주 후련하다. 살롱에서 부인들 입에 어찌나 오르내리던지. 하지만 피오레 가주가 되는 건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그 시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계속 듣기 역겨울 정도로!

16553701432414.jpg“그 자리는 우리 메사리나의 것이었는데. 정말 이대로 뺏기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체자렛의 재산이 우리에게 넘어오겠지만, 그래도 부가 생기면 명예까지 탐나는 거 아니냐고!”

속이 뒤틀리는 기분에 청첩장을 집어 던지려는 순간, 메사리나가 청첩장을 가로챘다. 후지아는 그녀를 보고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16553701432414.jpg“너! 뭐야.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메사리나는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으로 청첩장을 훑어보았다.

16553701432435.jpg“생각 좀 하느라고요.”

16553701432414.jpg“아주 태평한 소리 하고 있구나. 이대로 있을 거야? 이 계집애는 결혼도 하고, 이후엔 작위 수여도 할 텐데. 정말 이대로 다 뺏길 거냐고!”

16553701432435.jpg“어머니, 말했잖아요. 생각 좀 했다고. 그 생각을 그냥 꽃구경하고 경치 구경이나 했겠어요?”

후지아는 메사리나의 말에 표정이 환해졌다.

16553701432414.jpg“역시 내 딸! 뭔가 좋은 생각이 있는 거지? 그렇지?”

16553701432435.jpg“일단 여기 가야죠.”

16553701432414.jpg“결혼식을 간다고? 여길 왜 가. 속 뒤집어지게.”

16553701432435.jpg“내 속이 뒤집어질까, 저쪽 속이 뒤집어질까?”

16553701432414.jpg“뭐?”

메사리나는 살포시 입꼬리를 당겼다.

16553701432435.jpg“이번엔 내가 울릴 거니까.”

순간, 청첩장을 움켜쥔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16553701432435.jpg“이쪽 세계는 평판과 명예가 생명이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입고 먹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게 잘못되면 엉망이 되는 곳이라고요.”

아무리 아멜리아가 달라지고, 그 목숨이 연장됐다고 해도. 백작가에서 나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쪽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16553701432435.jpg“순백의 신부는 그날 없어요.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러내지 못한 백치 가주만 있을 테니까.”

철저히 더럽히고, 또 더럽힐 거다. 아주 엉망진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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