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모여들다2021.05.24.
아젠은 소작인들의 수확 상황을 점검했다. 지난해보다 현저히 떨어진 수확량에 표정이 굳어진 그가, 옆에 있던 집사장에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이 수치는 비정상적이다. 혹여 숨기는 건 없는지, 잘 파악해라.”
“예.”
“아버지, 그건.”
그때, 아젠의 앞에 서 있던 메사리나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한번 파악해보겠습니다. 맡겨주세요.”
“네가?”
“예. 잘할 수 있어요.”
아젠은 묘한 시선으로 메사리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 메사리나는 절로 환해지려는 입꼬리를 꾹 누르고서 애써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예, 아버지. 최선을. 아니 무조건 잘 해낼게요.”
현재 메사리나는 아젠의 눈에 띄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있었다. 예전엔 집무실엔 얼씬도 못 하게 했었으니까. 그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여기저기 열리는 사교 파티에 참석하며,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에 백작령을 돌보는 일은 없었다. 아젠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메사리나에게 체자렛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멜리아가 떠난 이후, 달라졌다.
‘이젠 내가 아버지의 유일한 딸이자, 후계자야.’
그는 단 한 번도 아멜리아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체자렛은 내가 이을 거야. 내가 체자렛 백작이 되고 말 거야.’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들어와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황궁에서 당도했습니다.”
황궁이라는 말에 메사리나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아젠은 무심한 시선으로 초대장을 확인했다.
“황실 주최 무도회에 참석하라는군.”
아젠의 말에 집사장이 곧장 물었다.
“바로 솔라리스로 갈 준비를 할까요?”
“곧 대회의가 열리지? 꼴도 보기 싫은 걸 보게 되겠군.”
아젠의 목소리에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는 아멜리아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메사리나는 그 모습에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폐하께 양해를 구하고, 몸이 불편하여 갈 수 없다고 전해라.”
“예.”
초대를 거절하는 모습에 메사리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황실 무도회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요? 굳이 아버지의 이름을 다른 누구 때문에 흠집 낼 필요는 없죠.”
“…….”
“제가 체자렛을 대표해서 다녀올게요.”
메사리나는 아젠의 표정을 살피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아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더니 짧게 답했다.
“그렇게 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젠은 집사장에게 말했다.
“솔라리스로 갈 준비를 해라. 체자렛을 대표하는 것이니, 준비에 소홀함 없게 하고. 폐하께 바치는 선물도 귀한 것으로 마련해.”
“알겠습니다, 백작님.”
뒤돌아선 메사리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자리에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벅차오르는 희열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직접 말했다.
‘체자렛을 대표한다고 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이 메사리나가!’
집무실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온 메사리나에게 이미 소식을 들은 후지아가 감격한 표정으로 뛰어들었다.
“메사리나! 오! 메사리나!”
후지아는 메사리나를 꼭 안아주며 온몸을 떨었다.
“됐어. 된 거야. 드디어 백작님이 널 인정한 거야. 이제 전부 네 것이라고!”
후지아의 호들갑에 메사리나는 오히려 의연하고 우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집안에 아버지의 딸이 나밖에 없는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래. 그렇지. 너밖에 없지. 너밖에 없어! 후후훗! 체자렛 백작가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 확인해야겠다. 소작인들의 수확이 줄었다고? 그건 있을 수 없지. 그놈들이 숨기는 거야. 이제부터 확실하게 거둬야 해. 전부 다 우리 것이니까!”
후지아는 탐욕스럽게 눈을 빛내며, 메사리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황실 무도회에서도 네가 가장 빛날 거다. 이 엄마가 그렇게 만들 거야. 최고급 드레스로 준비하고, 최고급 보석들로만 치장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너만 쳐다볼 수 있게. 네가 주인공이 되어야 해. 절대 지지 마라.”
메사리나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당연하죠. 누구한테도 절대 안 져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얼마나 준비할 게 많은데!”
후지아가 떠나고, 메사리나는 살짝 열기가 깃든 눈빛으로 에드조프를 떠올렸다. 곧, 대공 전하의 탄일이었다. 그녀는 서랍장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탄일보다 늦게 도착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야. 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드리고 싶었으니까.”
준비한 선물은 비싼 세공으로 만든 반지였다. 반지엔 영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메사리나는 체자렛 백작가를 이어받고, 보다 당당하게 에드조프의 곁에 있고 싶었다.
‘추문이 아니야. 내가 그분의 진정한 연인이야. 그분이 황위에 오르시면, 나도 황후가 될 수 있어.’
아버지의 관심도. 바스티얀 대공 전하도.
“전부 다 내 것이야, 아멜리아.”
*** 에드조프가 무거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황후궁이 있는 쪽이었다. 내일은 그의 탄일이었다. 하지만 황실은 특별히 황자의 탄일을 챙기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엔 클로에가 항상 소박하게나마 에드조프의 탄일을 챙겼다. 축하한다는 한마디. 그리고 어설프지만, 그녀가 직접 만든 케이크로. 지금은 모두 꿈같은 허상이다. 다시 갖고 싶은 허상. 몇 번이고 그 기억만을 빨고 또 빨면서, 스스로가 비참해진다. 그래서 탄일이 다가오면, 참을 수가 없어진다. 황후궁 앞에 멈춘 에드조프의 앞을 황후궁의 시녀장이 가로막았다.
“대공 전하, 어쩐 일이십니까.”
에드조프는 서늘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어마마마를 뵈러 왔다.”
“폐하께서 이 문을 절대로 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내 탄일. 어마마마께선 항상 내 탄일을 챙겨주셨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공 전하.”
“폐하의 아내기도 하지만, 내 어머니다. 비켜라.”
“안 됩니다. 아시지 않으십니까?”
시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속삭였다.
“어차피 대공 전하를 못 알아볼…….”
짜악-!
“윽!”
에드조프는 시녀장의 뺨을 후려치고는 그대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온기 한 점 없이, 차갑게 박히는 시선에 시녀장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온몸을 떨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날 못 알아보시다니. 내 어머니인데. 내가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시, 실수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윽!”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던 에드조프는 일순, 다시 입꼬리를 부드럽게 풀면서 손을 뗐다. 시녀장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에드조프는 그런 시녀장에게 짧게 말했다.
“꿇어.”
그의 명령에 시녀장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빌어.”
시녀장은 고개를 숙이고서 두 손으로 빌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사과할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음엔.”
그는 다정한 손길로 시녀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고개 숙일 필요 없을 테니까.”
에드조프는 다시 단정한 표정으로 걸음을 돌렸다. 시녀장은 그 자리, 그대로 굳어진 채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로 키르케가 다가와 얼음을 건넸다.
“이걸로 식혀라. 뺨이 더 붓겠다.”
“유, 유모님.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딱하시지. 얼마나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겠어. 그걸 생각하면, 이 유모의 마음이 참으로 쓰라려.”
키르케는 몹시도 안타까운 표정을 띠며, 굳게 닫힌 황후궁을 응시했다.
“보고 싶으시면, 만나게 해드려야지. 우리 황자 전하의 탄일인데. 이 유모가 소원을 들어드려야지.”
“유모님?”
“황후 전하께서도 아들을 몹시 만나고 싶으실 거야. 그토록 그리워했으니까. 마침, 전부 모일 거잖아?”
*** 황후궁을 벗어난 에드조프는 다시금 숨이 답답하게 조였다. 항상 탄일이 다가오면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엉켜버렸다. 이런 나약한 모습, 이 황궁에서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는데. 특히나 황제 폐하께서 보시면 안 되는데. 그럼에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창문 너머로 후원의 꽃들이 보였다.
‘저는 제비꽃을 좋아해요. 어머니가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보고 있으면, 몹시 그리워져요.’
‘왜 너무 사랑하고, 소중한 건 오래가지 못할까요? 그러니까 더 보고 싶은 것 같아요. 대공 전하는 저를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제가 너무 미안하니까요.’
문득 아멜리아, 그녀의 나약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제비꽃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 귀찮아서 아무 꽃이나 선물해도, 자신이 주는 건 다 좋다며 바보 같이 웃었다. 탄일이면 말도 안 되는 케이크도 보냈었다. 물론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이 치웠기에, 맛은 기억 안 나지만.
“……한 번은 먹어볼 걸 그랬던가.”
생각해보면, 어마마마께서 제게 주신 것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항상 죽는 것을 염두에 둔 채, 남겨질 자신을 염려했다. 스스로는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그래. 그댄 날 그렇게 사랑했어. 자기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그 심장은 오직 날 생각하며 뛰었다고.’
곧 그녀가 이곳으로 온다. 그녀를 만나면 또 어떤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지, 기다려졌다. 사랑했던 순간보다 더 집착하는 시선으로 분명 자신을 볼 테니까.
“그래, 어서 와. 아멜리아. 어서, 날 만나러. 내 앞으로. 이번엔 그댈 위한 제비꽃을 줄 테니.”
*** 황궁에는 무기를 소유한 기사나 티어들이 들어갈 수 없었기에, 이사나와 카마리가 밖에서 확인 절차를 밟는 사이,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마미와 함께 작은 마차를 타고 황궁, 솔라리스에 입성했다. 이클리트가 내민 손을 잡고서 마차에서 내린 아멜리아는 백색으로 빛나는 황궁의 모습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엄청난 규모의 모습. 그것도 여긴 본궁인 여름 궁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를 뵙는 건 대회의날이었기에, 현재 황궁에 당도한 귀족들과 다섯 공작가는 전부 별궁인 겨울 궁에 머물고 있었다.
“역시 황궁은 굉장하네요.”
“그러네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억지로 웃으며 낯선 시선으로 황궁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에겐 황궁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그가 황궁에서 머문 곳은 이런 빛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책사인 에리얼과 시녀, 시종들이 우르르 걸어왔다. 에리얼은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공 전하,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이클리트와 에리얼의 시선이 맞닿았으나, 그저 빠르게 스쳤다. 마미는 둥이를 안고서 어쩐지 불편한 표정으로 아멜리아에게 속삭였다.
“다른 귀족들이 보이지 않네요.”
“다들 바쁜가?”
“바빠도 이건 말이 안 되죠. 대공 전하와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셨는데!”
마미가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을 나무랄 수 없었다. 무려 제국의 황자와 공작이 황궁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응당, 황궁에 먼저 도착한 귀족들이 차례로 나와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해야 옳았다. 다섯 공작가를 제외하면, 이 황궁에 있는 귀족들이 이들보다 계급이 높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가주 후보자들을 소개했던 연회에서도 모두가 대공 전하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굴었다. 그땐 외조부께서 나섰지만, 이젠 다르다.
‘이젠 내가 대공 전하의 권위를 지켜야 해.’
그때, 에리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귀족분들도 대공 전하께 인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서 정원에서 작은 무도회를 여시는 바람에 소식이 늦어지는 듯합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대공 전하.”
“무도회라면?”
아멜리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대공을 무시한 채 참석하는 무도회라면 주인공은 단 한 사람.
“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탄일을 축하하는 무도회입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탄일…….”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온 에드조프의 이름에 이클리트는 저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황궁에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그의 눈동자로 불안이 스몄다. *** 마미는 둥이를 데리고 황궁 시녀들과 사라졌고,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에리얼이 직접 황궁에 있는 동안 머무르는 방으로 안내했다. 에리얼은 침실 앞에 걸음을 멈추고서, 아멜리아를 안내했다.
“이 방은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쓰실 방입니다. 대공 전하는 바로 위층을 준비했습니다.”
이클리트는 그 말에 처음으로 에리얼에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우린 부부인데.”
“부부라도 혹, 불편하실 수 있으니 침실을 두 개 준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아멜리아는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그래도 마차에서도 잠을 거의 못 이루셨는데. 게다가 황궁이면 더 불편해서 그러실 테고.’
그녀는 이클리트를 배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순간, 이클리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당겨, 아멜리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그에게 안겨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녀를 뺏기지 않겠다는 듯, 안고서는 잔뜩 거칠어진 어조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아직 신혼이 끝나지 않아, 조금도 부인을 떼어놓고 싶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