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날 선택했고, 날 원합니다.2021.05.28.
집요하게 붙드는 손길. 다소 정제되지 못한 거친 목소리가 아멜리아의 귓가에 와 닿았다. 그녀는 살짝 의아했다. 어쩐지 지금 대공 전하의 모습은, 뭔가 불안해하면서 고집부리는 아이 같았다.
‘아이라니. 대공 전하께서? 말도 안 돼.’
에리얼은 이클리트를 보면서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침실 하나는 비워두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에리얼은 돌아서기 전, 처음으로 이클리트를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그의 입에서 서늘하게 걸리는 황자라는 호칭에 이클리트는 잔뜩 눌린 어조로 읊조렸다.
“그래. 오랜만이지. 아주, 오랜만이야.”
***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이클리트를 보며 말했다.
“꼭 같이 있지 않아도 괜찮은데. 대공 전하 피곤하시잖아요. 마차에서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신 것 같고. 적어도 밤에는 각자의 방에서 편하게 계셔도 괜찮아요.”
“제가 피곤한 거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네?”
“여긴 피오레 공작가보다 더 우리를 주시하는 눈이 많습니다. 수많은 귀족도 모여 있고요. 그러니 제대로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이클리트는 잡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며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잊으셨습니까? 우린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그만큼 서로를 원하고 또 원하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숨 막히게 파고드는 저음에 아멜리아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어쩐지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 한 점의 온기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위험하게 전해지는 감정이 낯설어서, 아멜리아는 마른 숨을 삼켰다.
“잊었을 리가 없죠. 대공 전하와 제가 지금 이 침실에 같이 있는 이유인걸요.”
마주 본 그녀의 눈동자가 나직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이클리트는 이를 악물고서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풀었다.
“멀어지지 마십시오, 내게서.”
거친 어조와 달리 절박하게 느껴졌다. 그는 황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초조한 감정을 고르고 또 골랐다. 오랜만에 황궁에 돌아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끔찍한 과거가 그를 할퀴어서도 아니었다. 에드조프 라이엇 바스티얀. 그의 존재가 그녀에게 닿는 것이 싫었다. 야시장에서 완전히 가시지 못한 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끊어내야 하는데. 생각과 달리 이성이 멋대로 날뛰며, 그녀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앞에 그녀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때, 이 묘한 분위기를 마미가 깨고 들어왔다.
“대공 전하, 가주님, 들어가도 될까요?”
이클리트는 곧장 등을 보였고, 아멜리아 역시 표정을 바로 하며 마미를 불렀다.
“괜찮아,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마미는 뭔가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쥐고 있는 걸 그녀에게 줘도 되는 건지, 살짝 난감해졌다.
“둥이는?”
“아, 제가 머무는 방에 뒀어요. 여행이 많이 고단했는지 바로 잠들더라고요.”
“너랑 많이 친해진 모양이네,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게. 초대장이 왔습니다.”
“초대장?”
초대장이라는 말에 등을 보이던 이클리트의 어깨가 움찔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보내신 무도회 초대장입니다. 지금 정원에서 열리고 있는 무도회요.”
아멜리아는 마미의 말에 절로 냉소가 그려졌다. 그 짧은 사이에 초대장까지 만들어서 자신에게 보냈다, 라. 왜 초대하는지, 그 이유가 훤히 보였다. 마미는 초대장을 얼른 다시 거두려고 했다.
“그냥 제가 알아서 처리를…….”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 초대장을 제대로 건네받았다.
“아니. 초대받았으니, 가야지.”
“마미, 잠시 나가 있어라.”
그때,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고, 마미는 되묻지 않고 곧장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들고 있던 초대장을 가로챘다.
“대공 전하?”
“안 가면 안 됩니까?”
“네?”
“아니, 가지 말아요.”
아멜리아는 불시에 마주친 그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까부터 계속 불안해 보이던 그의 모습이 자신이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만약, 그 불안의 원인이 이 황궁 때문이라면. 아멜리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대공 전하.”
“…….”
“가야 해요. 초대장 주세요.”
“……어째서?”
“아무리 작은 무도회라도 황실에서 초대한 거니까. 난 이곳에 온 손님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고요.”
“하지만 거기엔 에드……!”
순간 짓이겨진 감정이 엉망으로 튀어나왔다가 멈칫했다. 이클리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한껏 힘주어 붙잡았다.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제 표정은 그야말로 엉망으로 추할 테니까. 그는 혀에 맺힌 것을 가까스로 꾹 삼키며, 말을 돌렸다.
“아닙니다, 미안해요. 지금 한 말은 잊으십시오.”
그녀가 부를 새도 없이, 이클리트는 침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아멜리아는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의 빈자리를 보다가 목소리에 힘을 줬다.
“마미. 거기 있으면 들어와.”
마미는 아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다. 방금 빠져나간 대공 전하의 표정이 아주 무시무시했으니까.
“괜찮으세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괜찮은 척하고 있을 여유도 없지. 마미, 네 힘이 좀 필요해. 아니. 아주 많이 필요해. 이건 나보단 네가 전문이니까.”
“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부터 좀 제대로 무도회에 가야 할 것 같거든.”
*** 겨울궁 후원에서 작은 무도회가 열렸다. 공식 무도회는 아니지만, 무려 포르티셰 공작이 황제께 직접 양해를 구하고 에드조프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인지라, 절대 작은 규모의 무도회라고 할 수 없었다. 많은 귀족이 에드조프에게 눈도장을 찍으며 끊임없이 탄일을 축하했다.
“축하드립니다, 황자 전하.”
“진심으로 탄일을 축하드립니다!”
“작지만 성의로 받아주십시오, 황자 전하.”
보통은 대공이라는 호칭을 썼을 텐데, 황실을 의식해서인지 모두 황자라는 칭호로 에드조프를 칭송하고 있었다. 에드조프는 그런 그들을 향해 더없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오늘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근사했다. 눈부신 은발 아래, 태양이 깃든 황금빛 눈동자가 여유 있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황금 자수가 새겨져 광채를 띄는 화려한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결코 그 화려함에 묻히지 않을 만큼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젊은 나이에 저토록 절륜하고, 무려 차기 황제로 유력하니. 혼기가 찬 영애를 둔 귀족들이 눈독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하면 제 딸을 황후로 만들어 황실의 일원이 될 수 있었으니까. 영애들은 어떻게든 에드조프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사로잡는 영애는 없었다. 그는 잘 만들어진 눈빛으로 영애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하나같이 내게 쓸모없는 인형이군.’
그렇다고 메사리나처럼 탁월하게 예쁜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에드조프가 영애들에게서 완전히 눈을 떼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꾸만 정원 입구를 무심코 바라볼 정도로 기다리는 누군가가. 그때,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갑자기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알렉드라가 걸어왔다.
“황자 전하.”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알렉드라의 옆에는 젊은 남자가 함께 있었다. 에드조프는 약간의 피로함에 풀어졌던 입꼬리를 다시 부드럽게 올렸다.
“오셨습니까, 포르티셰 공.”
“하하! 제가 좀 늦었습니다. 무도회의 주최자인 제가 먼저 와서 황자 전하를 모셨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공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 제가 다 감격했지요.”
“제가 황자 전하의 탄일을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습니까? 카르티아 공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또 무슨 고서를 발견했다면서 나가버리는 바람에. 참!”
“카르티아 공의 고서 사랑은 유명하지요.”
“그저 괴짜일 뿐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데릭 르미엘이라고 합니다.”
알렉드라의 옆에 있던 사내가 곧장 에드조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렉드라는 그제야 그를 에드조프에게 소개했다.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황자 전하. 제가 잘 키우고 있는 녀석입니다. 훗날 황자 전하의 곁에서 좋게 쓰이게 될 겁니다.”
에드조프는 그의 말에 웃고 있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내 곁으로 제 사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도 고작해야 사교계 입성도 안 한 풋내기 기사를?’
이런 식으로 훗날 자신이 황제가 되면, 다섯 공작가 안에서 포르티셰의 세력을 넓히려고? 이번 무도회를 연 것도 순수하게 자신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포르티셰 공작가가 그만큼 막강하다는 걸 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다 알면서도, 에드조프는 아직은 참았다.
‘아직은 이자가 필요하니까. 게다가 이 무도회는 내게도 쓸모가 있고 말이야.’
그때, 에드조프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멈췄다. 이윽고 그의 입꼬리가 싸늘한 곡선을 이뤘다. 그의 시선 끝에 이클리트가 서 있었다.
“이클리트!”
에드조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그에게 걸어갔다. 그제야 모든 귀족의 시선이 이클리트에게 향했다. 그들 모두 경악과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이클리트를 보며 수군거렸다.
“세상에. 정말 클리오 대공이야?”
“진짜? 황궁에 온 거야?”
“피오레 새 가주의 남편이라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올 줄은 몰랐는걸?”
수군거리는 귀족 누구도 이클리트에게 예를 갖추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비웃음 가득한 시선으로 구경하기 바빴을 뿐. 알렉드라는 표정 가득 경멸을 담았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분위기 망치기나 하지. 저런 더러운 피.”
순식간에 소란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이클리트는 이런 소란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익숙했다. 이런 시끄러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클리트를 거슬리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딱 하나였다.
“왔구나, 이클리트.”
에드조프는 그때처럼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잘 만들어진 표정으로 이클리트를 향해 의연한 미소를 보였다.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아직인가 보군. 솔직히 같이 올 줄 알았는데. 따로 오는 건가? 에스코트하지 않아? 부부잖아.”
그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존재에 이클리트의 표정이 변했지만, 겉으론 차분하게 답했다.
“준비가 길어지나 봅니다.”
사실 함께 가려고 했으나, 그녀가 먼저 가라고 했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그 사실 하나가 납덩이처럼 무겁게 그를 눌렀다.
‘내게, 화가 난 거겠지.’
괜한 욕심을 부린 자신에게. 감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으니까.
“싸운 건 아니고? 그래서 내가 편하게 지내라고 각방을 명한 건데. 이제라도 필요하면 에리얼에게 말해. 네가 머물 침실은, 절대 치우지 않을 테니까.”
이클리트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서 그를 응시했다. 역시 그 명을 내린 것은 에드조프였다.
“그나저나 내 초대를 거절할 줄 알았는데, 역시 오는군. 그녀는 여전히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해. 그렇지?”
“…….”
“표정이 왜 그래. 기분 좋은 내 탄일에. 웃어. 그리고 축하해야지. 네 표정 때문에 무도회를 망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도 네 존재 자체가 여길 엉망으로 만드는데.”
“……탄일을 축하드립니다, 형님.”
이클리트는 상체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들썩였지만, 꾹 눌렀다. 소란 피울 수 없었다. 특히 황궁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니까. 에드조프는 이클리트의 반응에 이제야 이 무도회가 흥미진진해졌다.
“클리오 대공 전하.”
그때, 알렉드라가 그제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클리트에게 다가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황자 전하의 탄일 축하 무도회에서 보게 될 줄 몰랐는데.”
“포르티셰 공도 잘…….”
“아,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께서도 탄일이셨지요. 죄송합니다. 같이 축하해드려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알렉드라는 노골적으로 이클리트의 말을 끊었다. 게다가 일부러 에드조프는 황자로 칭하고, 이클리트는 대공이라 칭하며 대놓고 이 자리에서 서열을 정하고 있었다. 결코 두 사람은 같은 황자가 될 수 없다고. 탄일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조프와 이클리트는 같은 날,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누군가는 축복 속에 태어나, 지금도 축하받고 있었으나, 누군가는 추악한 욕망 속에 태어나, 끊임없이 버려지다가 결국 내쳐졌다. 아무도 그가 태어났음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서.
“어차피 자리하신 거, 덤으로 축하받으시면 되지요. 그나저나 이 정원,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종종 여기서 검술을 하기도 딱 좋지요. 아, 대공 전하는 오랜만이라 기억 못 하시려나?”
알렉드라의 도발에도 이클리트는 황량한 시선으로 건조하게 답했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낯선 곳입니다, 이곳은.”
“그러시군요. 하긴, 대공 전하께서 어린 나이에 북부로 가셨으니. 이해합니다.”
이클리트의 말에 귀족들은 키득거렸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애초에 어울리지 않지.”
“황자 전하와 함께 서 있으니 더 확연하게 차이가…….”
“그야 어미가 천하기 때문이지.”
알렉드라는 더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이클리트에게서 등을 보였다.
“황자 전하, 클리오 대공 전하께선 여기가 더없이 신기하실 테니, 구경하게 내버려 두고 어서 오시지요. 아직 황자 전하께 선물을 바치고자 하는 귀족들이 많으니 말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공. 오랜만에 만난 동생인데, 인사는 마저 끝내야지요.”
“하하. 별거 아닌 거에도 이리 마음 쓰시니, 역시 솔라의 앞날이 밝지요.”
알렉드라의 비웃음 끝에, 귀족들은 이클리트를 완전히 무시했다. 괜히 얽혀서 포르티셰 공작가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무시도, 이런 소란도, 이클리트는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꽉 차지하고 있는 건 오직 아멜리아, 그녀뿐이었다.
‘어떻게 화를 풀어줘야 하지…….’
“하긴. 낯설 수밖에 없지. 네가 이 황궁에서 있었던 곳은 지하 실. 딱, 거기뿐이니.”
그러나 자꾸만 에드조프의 목소리가 성가시게 그를 방해했다.
“네게 탄일은 축하할 날이 아니지. 이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져, 결국 폐기처분당했으니.”
에드조프는 이클리트에게 성큼 다가와 다정한 척, 어깨를 으스러지게 붙잡으며 단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네가 여기 계속 있으면 있을수록, 널 향한 말은 많아지고 세상은 시끄러워져. 넌 이런 것에 익숙하지만, 아멜리아는?”
또다시 그의 입에서 멋대로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너 때문에 그 여자의 평판도, 명예도 떨어질 거다. 너만 아니었어도, 귀족들은 그녀에게 인사하러 갔을 거야. 그러다 네가 반인반수라는 게 드러나면.”
“…….”
“내 곁에서 그녀는 고귀한 황후가 될 테지만, 네 곁에선 그 여자도 더러워질 거야. 그러니까 이만 네 주제를 알고, 꺼져.”
“그 여자가 아니라, 피오레 공작입니다.”
침묵하던 이클리트가 싸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뭐?”
“그리고 그분은 날 원합니다, 형님이 아니라.”
순간, 에드조프의 시선에 여유가 사라졌다. 하지만 반대로 이클리트의 차디찬 시선 끝엔 여유가 섞였다.
“날 선택한 겁니다. 형님은 이제 쓸모없어져서.”
그 여유가 결국 에드조프를 제대로 자극했다.
“대체 너 같은 게 무슨 자신감으로!”
“그야 당연히…….”
이클리트가 운을 뗀 순간.
“피오레의 새 가주?”
아멜리아가 정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귀족들의 시선을 전부 빼앗을 만큼,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강렬한 붉은 드레스에 허리까지 결 좋게 쏟아지는 보랏빛 머리카락. 기나긴 속눈썹 아래 우아하게 휘늘어진 녹안까지. 살포시 웃는 미소가 공기마저도 간지럽혔다. 에드조프는 자신도 모르게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어떤 영애를 봐도 무심했던 그의 안광에 오묘한 빛이 뒤섞였다. 이클리트 역시 아멜리아를 멍하게 보다가 점점 눈빛이 열기에 일렁였다. 아멜리아는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이클리트와 에드조프에게로 걸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들이키는 호흡이 달라지면서 에드조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아멜…….”
하지만 아멜리아는 에드조프를 보지도 못했다는 듯, 지나쳐서는 그대로 이클리트의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그야 당연히 그녀는.
“늦어서 죄송해요. 제 남편의 탄일인데, 아무렇게 나올 수가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