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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웃자고 한 소리예요 (43/199)

43화. 웃자고 한 소리예요2021.05.31.

아멜리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마미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16553710768697.jpg“마미, 부탁해. 난 이런 거 잘 모르니까. 마미가 여기선 일류잖아? 야성미 넘치는 대공 전하도 고져스하게 바꾼 마미니까.”

16553710768704.jpg“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16553710768697.jpg“사교계에서 내 남편 기를 살릴 수 있게 도와줘!”

에드조프의 탄일 기념 무도회. 이 무도회에 자신과 이클리트 대공 전하를 초대한 유치한 이유가 훤히 보였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다. 오히려 그녀 역시 이 무도회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족들은 대부분 거기 모여 있으니, 아주 확실하게 경고해줄 수 있을 테니까.

16553710768697.jpg‘더는 그분을 모욕하지 말라고. 그분은 이제 황위 계승자이자, 이 피오레 공작의 남편이야. 남편의 기는 아내가 세워야지.’

사교계에서의 무기는 무도회에서 나오는 법! 마미의 말처럼 그 화려한 곳의 권력도 중요한 법이다. 다소 유치하긴 해도, 귀족들의 세계가 그러하니, 따를 수밖에. 그렇게, 모두를 사로잡을 만큼 아름답게 꾸민 아멜리아는 곧장 이클리트와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그녀는 피오레 가주보단 그의 아내인 대공비로 온 것이다.

16553710768697.jpg“늦어서 죄송해요. 아,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여기 계셨네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멜리아는 이제야 에드조프에게 눈길을 주며 싱긋 웃었다. 에드조프는 파고든 모멸감에 턱이 떨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난번과 그녀의 모습이 달라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증오와 분노 대신 공허한 무관심이 깔려 있었다. 자신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의 시선과 행동이 온통 이클리트에게 쏠려 있었다. 아멜리아는 일부러 이클리트에게 더 바짝 붙어서는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목소리를 굴렸다.

16553710768697.jpg“어머, 대공 전하. 보타이가 삐뚤어졌어요. 하여튼, 한시도 제 손이 안 갈 수가 없다니까요.”

16553710768736.jpg“하지만 보타이는 멀쩡…….”

16553710768697.jpg“멀쩡하긴요.”

그녀는 이클리트를 마주하며, 억지로 그의 보타이를 손봐주곤, 그의 머리카락도 괜스레 쓸어주며 살포시 속삭였다.

16553710768697.jpg“다정해야 하니까, 웃으세요.”

16553710768736.jpg“…….”

16553710768697.jpg“역시, 너무 멋있어요!”

아멜리아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자꾸만 숨이 타박타박 타들어 갔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다. 사랑하는 사이를 연기하는 것. 그럼에도 이클리트는 그녀에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계속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까.

16553710768736.jpg“아멜…….”

그녀를 부를 새도 없이, 아멜리아가 고개를 돌리며 멀뚱하게 서 있는 귀족들을 응시했다.

16553710768697.jpg“어머, 근데 제가 늦게 도착해서 다들 인사도 없이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시는 건가요? 그럼 제가 너무 민망하잖아요.”

웃으며 내뱉는 듯하지만, 그 어조가 날카로웠다. 귀족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예를 취했다.

16553710798247.jpg“처음 뵙겠습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16553710798247.jpg“인사드립니다, 클리오 대공 전하.”

16553710798247.jpg“참으로 아름다우신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명, 주인공은 에드조프였는데 그녀가 등장하면서 모든 시선이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향하게 되었다. 대놓고 이클리트를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 알렉드라는 그 모습에 표정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16553710798262.jpg“건방진 년.”

그의 입술이 차갑게 뒤틀렸다.

16553710798262.jpg“반반한 얼굴로 시선을 끌다니. 창녀와 다를 게 없군. 천박하긴.”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아멜리아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며 끝까지 우아하게 웃었다. 이클리트도 그런 아멜리아를 따라서 억지웃음을 띠며, 그녀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녀는 오늘 너무 아름다웠다. 그저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부족할 만큼. 그녀가 그리는 미소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저렇게 작게 웃지 않는다. 행복하면, 더없이 해사하고 환하게 웃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거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 노력이 누굴 위한 노력인지 알기에. 그녀에게 닿는 그의 시선이 미칠 것 같았다.

16553710768697.jpg“절 보지 말고, 앞을 보고 웃으세요, 대공 전하.”

아멜리아가 여전히 웃으며 이클리트를 나무랐다.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걸 들켰다는 게 부끄럽기는커녕.

16553710768736.jpg“쉽지 않네요.”

16553710768697.jpg“그래도 하셔야죠. 그게 의무고, 예법이니까.”

16553710768736.jpg“시선을 자꾸 빼앗기니까.”

16553710768697.jpg“…….”

16553710768736.jpg“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손가락 사이로 깊이 파고든 채, 붙들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속삭임과 손짓에 일순,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달뜬 숨을 꾹 삼켰다. 그와 닿아 있는 손끝을 타고 체향을 품은 열기가 아찔하게 번졌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애써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절대로 그에게 쉽게 눈길을 주지 않고서.

16553710768697.jpg“그런 말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사실 그녀는 그에게 살짝 화가 난 상태였으니까. 이클리트도 그런 그녀의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그러다 에드조프와 시선이 부딪히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단 한 남자의 시선만 미치게 한 게 아니었다. 에드조프, 그의 눈빛이 다른 때와 달랐다. 스스로도 그런 표정인 줄 몰랐던 게 더 위험했다. 그의 무의식 속 무언가를 건드린 게, 싫었다. 그때, 알렉드라가 드디어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이클리트는 에드조프에 관한 생각을 애써 접었다. 지금은 이자에게서 그녀를 지켜야 했다.

16553710798262.jpg“처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피오레 공.”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아멜리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뻗었다. 제대로 웃어야 하는데, 웃어지지 않았다.

16553710768697.jpg“저도 처음인데, 처음인 것 같지 않네요, 포르티셰 공.”

그의 까칠한 입술이 손등에 닿자 절로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이자가 루베르를 그렇게 가둬버린 작자. 이 무도회의 목적도 귀족들 사이에 차별을 두고, 선을 긋기 위한 것. 정말이지 너무나도 경멸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16553710798262.jpg“벨반 공은 안녕하십니까? 좀 더 가주의 자리를 지켰어도 됐을 텐데. 너무 성급했던 게 아닌가, 싶군요. 아! 물론 새로운 가주를 반기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알렉드라는 무례한 말을 전혀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16553710798262.jpg“아름다운 레이디께서 대회의 같은 자리가 버거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예쁜 것만 입고, 예쁜 것만 봐야 할 나이인데. 그곳은 썩 예쁘지는 않거든요.”

16553710768697.jpg“대신 누군가 잘못한 문제를 예쁘게 바로 잡을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아주 기대가 크답니다.”

알렉드라는 아멜리아의 말에 비웃음을 삼켰다. 대회의에서 지까짓 게 뭘 하겠다고. 지금 이 여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16553710798262.jpg‘눈요깃감이지.’

16553710798262.jpg“그러고 보니, 아주 화려하게 가주에 올랐다던데. 마탄을 연발로 쏘는 재주가 있으시다고. 작위 수여식에선 축복의 꽃을 불꽃으로 피웠다지요. 축복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 발칙한 발상이지만 흥미롭군요.”

16553710768697.jpg“…….”

16553710798262.jpg“이거, 아주 궁금합니다. 그 자리에 있지 못한 이들도 많을 테니, 피오레 공께서 재미난 구경을 시켜주시죠.”

그녀의 능력을 고작 재주라고. 그것도 구경시켜 달라며 폄하하는 알렉드라의 속내에 이클리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녀를 흠집 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럴수록 냉정한 표정으로 이클리트를 붙잡았다. 그 작은 손짓에, 이클리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16553710768736.jpg‘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알렉드라는 미동조차 없는 아멜리아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16553710798262.jpg“아, 곤란한가? 뭐. 그냥 웃자고 한 소리입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요.”

16553710768697.jpg“불꽃은 아니고 제 사랑하는 남편에게 특별한 탄일 선물을 드릴 텐데, 그 덤으로 보여드리지요.”

16553710798262.jpg“덤?”

16553710768697.jpg“마미!”

아멜리아가 마미를 부르자, 그녀가 곧장 장총을 건네주었다. 귀족들은 어느새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고, 알렉드라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16553710798262.jpg‘저걸로 뭘 한다고. 그래 봤자 잔재주.’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장총을 장전하고서 이클리트를 보며 말했다.

16553710768697.jpg“대공 전하.”

16553710768736.jpg“…….”

16553710768697.jpg“오늘을 정말 축하해요.”

아멜리아는 하늘을 향해 물의 마탄을 연발로 쏘아 올렸다. 날카로운 총성이 끊임없이 울렸다. 다들 아까운 마탄을 대체 왜 하늘을 향해 쏘는 건가, 싶었다. 그때, 알렉드라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그녀가 쏘아 올린 물의 마탄이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16553710798262.jpg“악!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흠뻑 젖어버린 알렉드라가 버럭 외친 순간. 귀족들은 알렉드라가 아닌 그의 뒤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했다.

16553710798247.jpg“세상에, 무지개가…….”

16553710798247.jpg“어머, 너무 예뻐요.”

에드조프는 차가워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쏟아지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마치 이 정원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 된 것처럼. 수채화처럼 피어난 무지개에 귀족들은 감탄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클리트가 몰래 햇빛을 더 강하게 비추니, 무지개가 점점 더 짙어지면서 그 영롱함을 더했다. 아멜리아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16553710768697.jpg‘다행이다. 이게 될까, 싶었는데!’

불꽃을 터트렸던 걸 응용해서 생각했다. 아주 특별한 선물을 그에게 주고 싶었으니까.

16553710768697.jpg‘햇살이 도와줘서 다행이야.’

아멜리아는 진심을 담아, 이클리트에게 오직 그를 위한 하늘을 선물했다.

16553710768697.jpg“제 남편의 오늘이 무채색이 아닌, 저토록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기만을 바랍니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해요.”

아멜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이번엔 정말로 행복하게 웃었다. 이클리트에겐 저 하늘의 무지개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미소가 그 어떤 것보다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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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드라는 쫄딱 젖어버린 모습으로 분노했다.

16553710798262.jpg‘또 저딴 눈속임 따위로 감히 나를!’

이 무도회의 주인공을 자꾸만 가로채고 있다. 주목받아선 안 된다. 저런 천한 피가 무지개와 어울린다고? 가당치도 않지! 아멜리아는 그제야 알렉드라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16553710768697.jpg“어머, 정말로 죄송해요. 저도 처음 해보는 거라서, 조절을 잘못했네요. 그래도 포르티셰 공이라면 이해해주실 거죠?”

16553710798262.jpg“……물론입니다. 이렇게 멋진 무지개를 보여주셨는데.”

16553710768697.jpg“그럼 포르티셰 공께서도 답례해주시겠어요?”

순간 뜻밖의 말에 알렉드라의 표정이 멈칫했다.

16553710798262.jpg“답례 말입니까?”

아멜리아는 더없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10768697.jpg“포르티셰 공은 검을 엄청 잘 쓰시잖아요. 검의 가문이니까.”

알렉드라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16553710798262.jpg“그래서 검술을 겨뤄보자는 겁니까?”

16553710768697.jpg“검술은 재미없고. 예전에 무희들이 칼춤 추는 걸 본 적 있는데. 혹시 칼춤을 보여줄 수 있나요? 포르티셰라면 더 멋진 칼춤을 출 수 있겠죠? 이 자리에 어울리는 구경거리가 될 듯싶은데.”

아멜리아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다.

16553710798247.jpg“감히 긍지 높은 포르티셰 공작가의 검술로 무희 따위나 추는 칼춤이라니. 구경거리라니!”

데릭이 발끈하며 나서자, 이클리트가 곧장 그 앞을 막아서며 데릭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알렉드라도 애송이 계집애의 시건방진 소리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그런 알렉드라를 빤히 보며 엷은 미소를 그렸다.

16553710768697.jpg“저도 포르티셰 공처럼 웃자고 한 소리예요, 웃자고. 재미있지 않나요? 아깐 재미있으셨잖아요.”

그녀는 알렉드라가 했던 말로 똑같이 받아쳤다. 그 모습에 알렉드라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때마침, 춤곡이 흘러나왔다. 아멜리아는 알렉드라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16553710768697.jpg“제가 좋아하는 춤곡이네요. 포르티셰 공께서 즐기라고 마련한 자리이니, 재미있게 즐기도록 할게요. 그럼 이만.”

그렇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여유롭게 퇴장할 수 있었다. 알렉드라는 그 모습에 턱이 어긋날 정도로 힘을 주었다.

16553710798262.jpg‘이 발칙한 계집이 감히!’

에드조프는 이클리트와 걸어가는 아멜리아를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귀족들의 시선 한가운데에 섰다. 좋아하는 춤곡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일단 아멜리아는 그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무조건 아멜리아의 걸음에 맞추면서, 슬며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클리트는 움찔하며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여전히 그녀는 화가 난 표정이었다.

16553710768736.jpg‘역시. 그 일 때문에 여전히 내게 화난 거구나.’

아까는 웃어주었는데.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16553710768736.jpg‘어떻게 화를 풀 수 있지?’

이클리트는 몹시 긴장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눈을 굴리며 아멜리아를 의식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여전히 그를 외면했고, 그럴 때마다 이클리트의 표정은 불쌍할 정도로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멜리아도 이클리트의 그런 표정이 읽혔지만,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16553710768697.jpg‘나 아직 화났어. 풀린 게 아니라고!’

솔직히, 그에게 몹시 서운한 게 있었다. 춤곡이 하나 끝나고, 이어 다른 음악이 시작되었다. 주춤하던 귀족들도 어느새 피오레와 연을 만들기 위해 그녀에게 춤 신청을 했다.

16553710798247.jpg“공작 각하,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이클리트는 저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꼭 붙들었지만,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속삭였다.

16553710768697.jpg“허락해주실 거죠, 대공 전하?”

어쩐지 싸한 말투.

16553710768736.jpg“예, 아. 물론…….”

16553710768697.jpg“고마워요.”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돌아서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이클리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16553710768736.jpg‘어떡하지…….’

그는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무거운 숨을 삼켰다. 이클리트에게 떨어진 난제였다. 한 번도 누군가의 화를 풀어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16553710768736.jpg‘선물을 주나? 사과해야겠지? 뭐라고 사과하면 될까? 그냥 두 손 모아 빌면…….’

16553710798247.jpg“저런 예의도 모르는 레이디가 피오레 가주라니. 그런 같잖은 재주 하나로 공작 각하를 모함하고.”

그때, 데릭의 한마디에 이클리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16553710798247.jpg“저격수는 비겁해. 결국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건 검이니까. 총이 상대나 될 것 같으냐고.”

데릭은 아까 전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부들거렸다.

16553710768736.jpg“검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군.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개처럼 훌륭하고.”

데릭은 갑자기 다가온 이클리트의 한마디에 발끈했다.

16553710798247.jpg“개라니. 감히 대공 전하께서도 포르티셰 가문을 모욕하십니까!”

16553710768736.jpg“그럼 그대는 지금 피오레 가주를 모욕하는 게 아닌가?”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지만, 데릭은 눈치채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16553710798247.jpg“아무리 공작 각하라고 하나, 제 주인을 먼저 모욕하셨습니다.”

16553710768736.jpg“그래서 사과하지 않겠다?”

16553710798247.jpg“피오레 가주께서 먼저 사과하지 않는 한, 그럴 수 없습니다.”

16553710768736.jpg“그렇군. 나도 감히 그분을 모욕하는 건,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이클리트가 데릭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응시했다. 그 모습에 데릭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읊조렸다.

16553710798247.jpg“결투입니까? 하지만 설마 재미로 결투를 하진 않으시겠죠?”

데릭은 도발했고, 이클리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10768736.jpg“당연히. 대가로 가장 중요한 걸 잃어야지.”

때마침 음악이 멈추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들 이클리트와 데릭을 응시했다. 아멜리아도 뭔가 좋지 않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16553710768697.jpg‘무슨 일이지?’

그 순간, 이클리트가 데릭 앞에 가장 소중한 뭔가를 던졌다. 바로 아멜리아가 준 반지.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했다.

16553710798247.jpg“뭐, 뭐야. 지금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16553710798247.jpg“결투 신청을 한 거야?”

16553710798247.jpg“그것도 피의 결투를?”

아멜리아는 몸이 떨렸다.

16553710768697.jpg‘지금, 뭐 하시는 거야. 피의 결투라니?’

보통은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대련이지만, 피의 결투는 달랐다. 기사가 가장 소중한 것을 걸게 되는데, 그건 자신의 심장을 의미했다. 즉, 승자가 패자의 목숨을 원하면 목숨까지 줘야 하는 잔혹한 결투였다. 데릭은 여유롭게 자신의 검을 뽑았다.

16553710798247.jpg“전 제가 쓰는 검이 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기사에게 빌리시면…….”

이클리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미처 치우지 못한 목검 하나를 들었다.

16553710768736.jpg“이걸로 하지.”

데릭은 이클리트의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겨우 목검으로 진검을 상대한다는 건가?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여기면?

16553710798247.jpg“지금 장난하십니까?”

하지만 이클리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53710768736.jpg“아니. 이걸로 맞으면 꽤 아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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