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낯선 눈동자2021.07.19.
“대공 전하…….”
숨 막힐 듯, 깊이 파고든 그의 손길은 그녀를 조금도 풀어줄 틈이 없었다.
“괜찮습니까?”
이클리트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멜리아는 곧장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난 괜찮…… 윽!”
하지만 일순 파고든 통증이 입을 다물 새도 없이 비집고 나왔다. 이클리트는 두려운 시선으로 그제야 손에 생경하게 닿는 감촉을 느꼈다. 그의 손바닥에 아프게 묻어나는 피.
“다쳤잖아.”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허하게 흩어졌다.
“난 괜찮아요. 근데 여길 어떻게 온 거…….”
순간, 안개가 더 짙어지면서 이상하게 이클리트의 주변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마치, 그를 잡아끄는 것처럼.
“대공 전하? 대공 전하?”
아멜리아가 그를 불렀지만, 이클리트는 오직 제 손에 묻은 그녀의 피에 시선이 박혀 있었다. 안개가 독처럼 그에게 스미며, 자꾸만 제어하지 못할 분노가 그의 머릿속을 뒤집을 듯 휘저었다.
“안 돼. 당신은 다치면. 당신이 다치면 나는…….”
“대공 전하? 난 괜찮다니까요. 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점점 이상해지는 그를 느꼈다. 거칠어지는 그의 호흡. 어느 순간 초점조차 엉망이 되고 있었다. 지난번, 무너지듯 자신을 안았던 모습과는 달랐다. 분명 대공 전하가 맞는데.
‘대공 전하가 아닌 것 같아.’
이클리트는 어느 순간 아멜리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꾸만 윙윙거리는 소리가 그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교란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이제야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보인다. 지하실. 여긴, 그가 갇혀 있던 그곳이다. 그를 끊임없이 깨우고 또 깨웠던 그곳.
‘넌 괴물이다.’
‘그러니까 어서 보여 봐. 어서. 넌 괴물이니까!’
윙윙거리던 목소리가 선명해지면서 그의 의식을 지배했다.
‘그래. 난 괴물이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더한 괴물이 될 거야. 들끓었던 피가 점점 차가워지면서 그의 심장을 완전히 얼려버렸다. 마치, 감정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어떤 것도 당신을 다치게 하지 못해. 내가, 내가…….”
더없이 낮은 어조가 섬뜩하게 공기를 긁었다. 아멜리아는 뭔가 이상한 이클리트의 모습에 자꾸만 불안하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대공…….”
“다, 죽여 버릴 것이다.”
그녀를 짓누르는 엄청난 살기에 아멜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이클리트는 안개 속으로 빨려가듯 사라졌다. 사방에서 죄어오는 공기에 아멜리아는 온몸을 떨면서도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멎어버렸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눈동자가 기이했다. 마치 피처럼 붉디붉은.
“……홍안……?”
이클리트는 무언가에 정신이 완전히 묶여버린 채, 안개 속을 파헤치며 달렸다. 깨질 듯한 분노를 표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클리트의 공격에 쓰러진 흑표범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흑표범에게 걸어갔다. 지하실에서 울리는 환청이 점점 더 그를 삼키며, 움직이게 했다.
‘변해라. 넌 괴물이니까. 어서. 어서!’
“윽!”
이클리트의 표정이 괴롭게 뒤틀렸다. 여기서 멈춰야 하는데. 그녀의 피를 본 순간. 안개를 타고 파고든 자극적인 향이 그의 분노를 끊임없이 갈구하며 커졌다. 그때, 쓰러진 흑표범이 꿈틀거리자 발톱에 묻은 그녀의 피가 보였다.
“하…….”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그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시뻘건 안광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마치 새의 발톱처럼 변한 그의 손이 순식간에 흑표범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흑표범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져 몸이 축 늘어졌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피가 묻은 흑표범의 발톱을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것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이 설령 한 줌의 피라도.
“한낱 짐승 따위가 감히.”
이클리트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면서, 흑표범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순간. 탕-! 아멜리아의 총성과 함께 사방으로 찬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클리트는 겨우 이성을 붙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아멜리아…….”
그에게 가장 소중한 이름을 속삭인 순간,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존재에 이클리트가 다시금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뜨거운 손길이 그의 뺨을 감싸며 안온한 목소리가 그를 다독였다.
“아가, 울지 말렴. 아가, 울지 마. 다 괜찮으니까.”
한 여인의 손길과 목소리에 이클리트의 머릿속이 그제야 맑아지면서 안개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곧장 아멜리아의 모습이 꽉 채웠다. 이클리트는 제게 다가온 의문의 여인은 생각지도 않은 채, 순식간에 아멜리아에게로 달려갔다.
“아멜리아!”
이클리트가 안개를 빠져나오자, 아멜리아가 바닥에 쓰러진 채 겨우 총을 잡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뱉으며 그녀를 안았다.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이클리트, 그가 보였다. 그것도 자신이 평소 알던 그 모습 그대로. 붉은 눈동자도 아니고, 무섭도록 섬뜩한 모습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익숙하고 다정한 그의 모습이었다. 아멜리아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말갛게 웃었다.
“내가, 도움이 됐어요?”
이클리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지도, 풀지도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내가 또 늦어버려서. 그래서…….”
“아니에요. 딱 맞춰서 왔어요.”
통증에 자꾸만 몸이 떨려서, 그녀의 목소리가 헝클어졌다. 이클리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눈앞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그러다 그녀에게 닿아 있는 제 손에 묻은 흑표범의 피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의 표정을 읽고는, 오히려 자신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부인, 지금 내 손이…….”
“괜찮아요. 내 손이 깨끗하니까, 이렇게 닦아주면 되지.”
아멜리아는 지난번 그가 해준 것처럼 말하며 웃었다. 다친 건 그녀인데, 자꾸만 자신을 다독여주는 모습에 이클리트는 한숨을 삼키며 완전히 이성을 되찾았다. 이미 벌어진 일, 멍청한 모습 보이며 이러고 있는 건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당장 치료사에게 가야 합니다.”
여길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그때,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던 안개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안도했다. 그런데 안개가 사라지면서 누군가가 보였다. 그것도 낯선 여인의 모습이.
“대공 전하, 저기…….”
이클리트는 그제야 낯선 여인의 존재를 깨달았다. 안개 속에서 자신을 다독였던 그 여인. 그런데 점점 또렷해지는 여인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굉장히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여인의 모습.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 듯 길게 쏟아져 내렸고, 그 너머 푸른 눈동자가 몽환적으로 빛났다. 여인은 추운 듯 몸을 웅크렸다가 이클리트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가, 여기 있었구나.”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아는 듯 말하는 여인의 모습에 당황했다.
“대공 전하, 아는 여인인가요?”
“황후, 폐하?”
“네?”
아멜리아는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황후 폐하라니요? 저분이요? 클로에 황후 폐하? 하지만 그분이 여기 왜?”
클로에는 무척이나 반가운 듯, 이클리트에게 팔랑팔랑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예를 갖추기 위해, 이클리트에게서 벗어나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런 아멜리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역시나 당황해하는 이클리트에게 바짝 다가가서는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아가, 아가!”
그러곤 이클리트의 얼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갑자기 와락 안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너무…….”
애틋하게 번지는 목소리. 이클리트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아멜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황후 폐하를 아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직접 뵌 건 지금이 처음이에요. 단지.”
이클리트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멜리아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병이 깊어, 기억을 잃으셨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구나.’
아무래도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에드조프일까.’
아가, 라고 불렀으니. 그런데 이클리트와 클로에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눈동자 색이 같아서 그런지, 조금 닮아 보였다.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이 난리에 황후 폐하께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서 모셔야 해요. 밖에선 난리가 났을 거예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어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멎었지만, 여전히 깊은 상처가 그의 눈에 아프게 닿았다. 그는 클로에에게서 벗어나, 아멜리아를 다시 안아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런 이클리트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가지 마. 이제 가지 마. 옆에 있어!”
어쩐지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외치는 클로에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난감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이클리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당황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전 괜찮아요.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어요. 안개가 없어져서 좀 살 것 같고요.”
“하지만…….”
“다리가 다친 건 아니니까, 어서 가요. 시간 끌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클리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클리트에게 아주 꼭 붙어 있었다. 솔직히 그는 클로에가 조금 불편했다.
‘내가 왜 이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을까. 설마 수인인 모습을 들켰던 건 아니겠지? 제정신은 아닌 듯해서, 모르는 것 같긴 하지만.’
그때, 클로에가 고개를 들더니 이클리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가.”
부드럽게 번지는 속삭임. 이클리트는 그 낯선 단어에 마음이 술렁였다. 이상하게 웃는 모습이 아멜리아를 닮은 것 같았다.
‘머리 모양 때문에 그런가.’
게다가 자꾸만 다른 감정이 그를 건드렸다. 그녀를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그가 아주 많이 부러워했던 것. 에드조프를 가장 무한한 애정으로 쓰다듬어주던 모습. 그에겐 낯설다 못해,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
이클리트는 지하실을 빠져나가기 전, 다시 한번 이곳을 둘러보았다.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어린 시절의 모습. 저 우리에 갇혔었고, 저 채찍으로 맞았으며, 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오늘이 싫었고, 내일이 지옥이었다. 간절히 죽어달라고 자신에게 빌었던 나날. 눈을 뜬다는 게 절망이었고, 숨을 쉰다는 것이 잔인하기만 했었다. 이곳은 절대로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의 가장 끔찍한 비밀이었다.
‘그녀가 여기로 온 건 우연일까. 내가 여길 찾아올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는데.’
순간,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녀석이 날 여기로 데려왔으니까.’
새하얗고, 새하얀 ‘그것이’. *** 지하실을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바깥 안개는 자욱했다. 아멜리아는 다시금 리볼버를 들었다. 혹시나 아직 늑대가 남아 있다면, 황후 폐하를 보호해야 했으니까.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말렸다.
“총은 안 됩니다. 상처가 더 벌어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를 위험하게 할 순 없잖아요.”
“제가 전부 지키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워낙 클로에가 이클리트에게 딱 붙어 있어서, 이클리트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냥 들고만 있는 거예요. 늑대만 나타나지 않으면 굳이 쓸 일 없죠. 안개도 좀 사라지면 좋겠는데…….”
그들은 일단 주변을 경계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대충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아멜리아는 도통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클리트는 슬쩍 바람을 움직여보았다. 역시나 꿈쩍하지 않는 안개. 하지만 대충 사람 냄새를 품은 공기를 따라가고자 했다. 그런데 이클리트의 바람과 별개로 갑자기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이곳은 유리로 만들어진 복도였다. 아멜리아는 유리 너머 밤하늘도 선명하게 보이자, 이제야 안도했다.
“하. 다행이네요. 이제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나 봐요.”
멍하니 이클리트를 붙잡고 있던 클로에가 나직이 속삭였다.
“달 없는 밤이 끝났어.”
이클리트는 뭔가를 아는 듯한 클로에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달 없는 밤은 반인반수에게 치명적인 날.’
바로 숨기고 있던 야성이 멋대로 드러나는 날이었다. 클로에는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가, 이제 걱정하지 마.”
이클리트는 불안한 시선으로 읊조렸다.
“대체 뭘…….”
그 순간.
“어마마마?”
아멜리아는 에드조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이때, 에드조프가 그답지 않게 불안정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보고 있었다.
“어마마마, 어째서 여기 계시는. 아니. 왜 그 괴물과 같이 계시는 겁니까?”
에드조프는 클로에가 이클리트와 가까이 있는 모습에 눈빛이 얼어붙으면서 광적으로 외쳤다.
“그 더러운 손 치우고, 저리 꺼져. 네가 어마마마와 같이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에드조프가 클로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클로에가 에드조프를 피하며 외쳤다.
“싫어.”
뜻밖의 한마디에 에드조프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마마마?”
하지만 클로에는 아까와 달리 미친 여자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저리 가. 오지 마. 데려가지 마. 데려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