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잃어버린 황후2021.07.23.
“데려가지 마. 데려가지 마!”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는 클로에의 모습에 에드조프는 충격에 휩싸여 몸이 굳어졌다.
“어마마마. 저예요. 어마마마의 하나뿐인 아들이에요. 제발, 어마마마. 제가. 제가 얼마나 어마마마를 보고 싶어 했는데…….”
아멜리아도 놀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에드조프를 찾고 계셨는데. 그런데, 그를 두고 알아보지 못하시는 거야? 어느새 클로에는 이클리트를 끌어안으며 읊조렸다.
“아가, 가자. 가. 여기서 나가자. 응? 아가, 제발…….”
애처로운 클로에의 속삭임에 이클리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자꾸만 기분이 묘해졌다. 분명 그녀가 말하는 아가는 자신이 아닌데. 눈앞에 에드조프일 텐데. 이분은 에드조프의 어머니인데. 에드조프는 이클리트를 안아주는 클로에의 모습에 살기를 느끼며 외쳤다.
“이 괴물 새끼가 누굴! 떨어져. 내 어머니다. 너 같은 새끼가 탐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이클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클로에를 보호하며 입을 열었다.
“진정하십시오, 형님.”
“뭐?”
“제 어머니라고 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제가 황후궁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닥쳐! 네놈이 뭔데 황후궁으로 모시겠다는 거냐. 내가 모실 것이다. 내 어머니니까, 내가 모신다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에드조프의 모습에 아멜리아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만두세요, 대공 전하! 이렇게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에드조프는 부서질 듯한 시선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아멜리아도 이런 에드조프의 모습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마치, 어머니를 잃은 아이 같은 태도였다. 아멜리아는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의 이런 모습은 세간엔 비밀 아닌가요? 모두가 보게 되면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멜리아에 이어 클로에마저도 이클리트의 곁에 있으니, 그 모습이 자꾸만 그를 자극하며 결국 누르지 못한 분노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에드조프는 주위를 살피다가, 기사 동상에 꽂혀 있던 창을 뽑아 들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대공 전하, 지금 무슨…… 윽!”
“비켜.”
에드조프는 아멜리아를 밀쳤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섬뜩해진 시선으로 에드조프를 노려봤다.
“뭐 하는 거야.”
“네놈이야말로 주제넘게 뭐 하는 거지? 빼앗기지 않는다. 아무것도. 네놈한테는 절대! 죽어라. 너 같은 괴물, 짐승 새끼는 이곳에서 사냥당하는 게 마땅해. 다른 짐승 새끼들과 똑같이 죽어!”
에드조프가 창을 휘둘렀고, 이클리트는 피하지 않은 채 에드조프를 노려보았다.
“그만 해요!”
아멜리아가 경악하며, 들고 있던 리볼버를 쏘려는 순간.
“바스티얀!”
공기를 흔드는 목소리. 아스란이 에리얼과 황실 근위병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클리트의 바로 코앞에서 창을 멈춘 에드조프는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손을 내렸다. 잔뜩 겁에 질려 있던 클로에는 아스란과 시선이 마주치더니, 이내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에드조프가 손을 뻗을 새도 없이, 이클리트가 클로에를 받아 안았다. 아스란은 곧장 이클리트에게 다가가서는 클로에를 데려왔다. 어떻게 보면 몇십 년 만에 아들을 만나는 자리인데. 아스란은 이클리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이클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멜리아는 곧장 아스란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
클로에를 품에 안은 아스란은 아멜리아의 모습을 훑어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황후를 찾은 것이냐?”
“예? 아, 예.”
“어디서 찾았지?”
“그게, 어떤 지하실…….”
“지하실 근처에서.”
아멜리아가 말을 맺을 새도 없이, 이클리트가 끼어들어 말을 돌렸다. 아스란은 지하실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선 그제야 이클리트를 똑바로 보았다.
“지하실? 설마 거길 들어간 것이냐? 그곳이 열려 있었어?”
이클리트는 더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소동으로 대공비가 길을 잃어 지하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전 대공비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을 뿐. 황후 폐하를 발견한 것은 우연입니다. 하지만 대공비가 황후 폐하를 지켰습니다.”
아스란은 클로에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클리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숨겨진 속내가 읽혔다. 이번 소동과 더불어 황후 폐하에 대해서 아멜리아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 그러니 괜히 따로 불러내 추궁하고, 책임을 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아스란은 냉정하게 선을 긋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달라지긴 달라졌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공비를 보호하고 말이야.’
아스란은 아멜리아를 보며 말했다.
“피오레 공에겐 큰 은혜를 입었군. 황후를 지켜주어 고맙다. 그 공을 인정하지. 황제로서, 반드시 보상할 것이다.”
“아닙니다, 폐하.”
“그리고 이런 소란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황궁에 처음 온 손님인데, 짐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아스란은 곤란한 듯 웃으며 가장 중요한 말을 했다.
“짐의 체면을 생각해서 오늘 보고, 들은 것은 전부 잊어라.”
고개 숙인 아멜리아는 흠칫했다. 아스란은 이클리트를 응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울 수 있다면 전부 지워.”
이클리트는 그런 아스란을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물론입니다, 폐하.”
아스란은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는 여전히 감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에드조프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대공으로서, 포르티셰 공을 도와서 사태 수습할 생각을 해.”
에드조프는 정신을 잃은 클로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돌아섰다.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에드조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날 것의 감정으로 불안해하는 에드조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처절했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아스란이 돌아서고, 에리얼도 이클리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근위병들과 물러났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듯했다. 이클리트는 위태롭게 서 있는 아멜리아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부인?”
아멜리아는 그의 속삭임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그녀의 말엔 많은 의미가 눌려 있었다. 아스란은 끝까지 이클리트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조프에겐 대공으로서 사태를 수습하란 말을 했으면서, 이 또한 이클리트는 제외였다. 아멜리아는 원치 않는 동질감을 느꼈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배려를 느끼며, 정말로 괜찮다는 듯 웃었다.
“괜찮습니다. 부인만 무사하면 돼요. 그나저나 부인, 상처는…….”
그의 말간 미소에 아멜리아는 안도하며 점차 떨려오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부인?”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겨우 외면하고 있었던 상처의 통증이 결국 그녀의 정신을 앗아갔다.
“미안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그냥 곁에. 곁에만 있어, 줘요…….”
아멜리아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이클리트는 힘없이 쓰러지는 아멜리아를 꽉 안고서 비명처럼 외쳤다.
“부인, 부인? 아멜리아!”
*** 아스란은 클로에를 황후궁 침대에 눕히고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이다. 하지만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가 있다. 아무것도 몰라서, 이 심장을 매 순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그럼에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 에리얼이 아스란의 곁으로 다가왔다. 상념에 잠겨 있던 아스란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입을 열었다.
“누가 황후를 꺼낸 것이냐.”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황궁에서 날뛰던 짐승들은 전부 포획, 대부분 사살됐습니다. 티어들의 활약이 컸습니다.”
아스란은 불안한 어조로 되물었다.
“혹, 반군의 짓이더냐?”
“침입자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폐하, 외람되오나 황후 폐하께서 스스로 나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에리얼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읊조렸다.
“종종, 있지 않았습니까.”
다섯 공작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아스란은 클로에를 완전히 가둬두지 않았다. 물론 외부에선 그녀를 만날 수 없지만, 그녀가 마음먹으면 황후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그건 아스란의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돌아오면 제게로 와주길 바라면서. 아주 기적적으로 그녀의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었기에.
“일단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그 지하실.”
아스란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지하실 문을 해제한 건 아니지?”
“준비하라고 하셔서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닙니다.”
아스란은 에리얼과 그 지하실을 해방하여 이클리트를 유인할 작정이었다. 확인할 것이 있었기에.
“그 녀석, 정말 지하실에 갔던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후 곧장 지하실을 살폈는데, 흑표범의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목덜미가 뭔가로 아주 날카롭게 꿰뚫렸는데, 클리오 대공 전하의 솜씨가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피오레 가주를 구하기 위해 거기로 뛰어들었다는 건가. 녀석이 달라 보였어. 그렇지?”
“예. 폐하께 화내는 듯 보였습니다.”
“맞아. 녀석이 감정을 보였어.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도. 북부로 버려졌을 때도, 꼼짝도 안 했는데. 죽음만을 갈망하며 텅 비어 있었는데. 그래서 사용하기가 더 어려웠지.”
감정이 생겼다는 건 중요했다. 그걸 이용해 목줄을 채울 수 있었으니까.
“확실히 이클리트에게 피오레 가주는 몹시 소중한 것이군. 거길 제 발로 들어갈 정도로. 그렇다면 그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피오레 가주를 지켜내겠군.”
아스란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작전을 세우지 않아도 성공한 셈이다. 문제는 그 지하실 문을 누가 해제했나, 하는 거였다. 그 지하실은 특수한 공간이었다. 오직 이클리트를 위해 만들어진 미궁이었다. 거기선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새어나가지 않았고, 탈출하려고 해도 그 문이 열리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건 이클리트가 특별한 수인일 경우, 그곳에 가둬둔 채 열쇠로 만들기 위한 감옥이었다. 아스란은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이 이상했다. 하필이면 마법처럼 자욱했던 안개. 일부러 만든 달 없는 밤. 돌아온 이클리트…….
“정말로 그놈에게 수인의 힘이 없을까.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앞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아. 치명적인 약점이 생겼으니,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는 건, 다른 의미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절대 쉽게 죽어서도 안 된다는 걸 의미했다. 삶에 미련이 없던 짐승에게. 반드시 살아야 할 본능이 생긴 것이다.
‘녀석이 정말 시간의 숲을 풀어줄 열쇠라면. 피오레 가주가 있는 한, 내 손에서 영원히 이용되겠구나.’
*** 알렉드라는 기사들과 상황을 수습했다. 사실 기사들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시야가 보이지 않아, 검이 무용지물이었기에. 루시아와 헤이츨은 홀 안을 정리했고. 카마리는 티어들과 귀족들을 전부 대피시키면서 한숨 돌렸다. 하지만 알렉드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을 긴장시켰다.
“대체 이런 상황에 피오레 가주는 어디 있는 거야. 무도회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면서. 설마 무서워서 먼저 도망친 건가? 이러고도 다섯 공작가의 가주라고 할 수 있냔 말이야.”
주인을 모욕하는 발언에 카마리와 티어들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카마리는 아멜리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가주님은 무사하시겠지. 혹여 잘못되셔서 대공 전하께서 그날처럼 폭주하시면 안 되는데.’
“바깥 안개는 사라졌습니다.”
그때, 카마리가 그토록 찾았던 이사나가 걸어왔다.
“이사나 경!”
카마리는 이사나를 보자마자 반가움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건지! 이사나는 카마리를 향해 눈을 찡긋하면서, 알렉드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저희 주인님은 불의 마탄으로 늑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하셨고, 그래서 그나마 저희가 날뛰는 늑대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요. 그 외에도 아주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알렉드라는 이사나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로 무슨!”
“아마 폐하께서 따로 말씀하실 테니, 기다려보십시오.”
“어머, 폐하께서?”
루시아의 말에 알렉드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헛소리!”
알렉드라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헤이츨도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카마리는 그제야 이사나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대체 어디 있었던 겁니까?”
“카마리 경, 난 머스켓티어에요. 당연히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내가 놀고 있었을까 봐?”
“그게 아니라!”
카마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위험했을까 봐.”
“…….”
“짐승들 먹이라도 됐으면, 그 배를 갈라서라도 가만 안 뒀을 겁니다.”
“하하. 걱정해준 건 고마운데, 너무 섬뜩하네요. 게다가 날 그렇게 약골로 본 거예요?”
“그만큼 걱정했다는 겁니다.”
“어머, 사랑싸움 좋네. 카마리 경의 새로운 남자야?”
카마리는 루시아의 말에 발끈했다.
“남자 아닙니다!”
“어머, 그럼 여자야?”
“그런 게 아니라!”
“누가 애인이냐고 했어? 남자냐고 했지. 카마리 경에게 엄청 잘해줬나 봐.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카마리 경은 쉬워지거든. 사랑에 너무 약해. 그게 귀엽다니까. 나도 이참에 카마리 경을 꾀어볼까? 나 여자한테도 엄청 잘해줄 수 있어. 여러 가지로.”
카마리는 루시아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체 공작 각하는 왜 계속 여기 계시는…….”
“루시아!”
그때, 이클리트가 정신을 잃은 아멜리아를 안고서 나타났다.
“루시아! 제발, 제발 그녀를 살려줘. 제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마치 울음처럼 울렸다. 카마리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폭주를 걱정했는데, 저렇게 절박한 대공 전하의 모습을 보게 될 줄 몰랐다. 루시아만이 침착하게 이클리트를 다독였다.
“나한테 이렇게 매달리면서 부탁하는 모습은 처음인데, 너무 좋네요. 역시 남자는 매달려야 짜릿해. 자꾸 이렇게 근사해지기만 하니, 내가 곤란한데.”
태평한 루시아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다급함이 날뛰었다.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루시아는 눈을 찡긋하며 손짓했다.
“걱정 말고, 따라와요. 대공 전하의 첫 부탁인데, 반드시 살려줄게요.”
*** 아멜리아는 그 지하실에 있던 거대한 우리 앞에 있었다. 그 우리엔 뭔가가 있었다. 아주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뭔가가. 앙상하게 펼친 검은 날개가 시커먼 어둠을 자아냈다. 마치 악마와도 같은 모습. 무섭고, 두려웠으나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그때, 몹시 지독한 목소리가 그녀에게로 밀려들었다.
-이 세상은. 없어져도 돼.
-죽을 거면 나랑 같이 죽어요.
이윽고, 날개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타들어 갈 듯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은.
‘대공, 전하?’
“하!”
아멜리아는 꿈에서 튕겨 나가듯, 눈을 번쩍 떴다. 바로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이클리트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부인?”
그녀는 곧장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그러다가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숨을 멈췄다. 붉은 눈동자가 아닌 푸른 눈동자. 자신이 너무나도 좋아하고 또 사랑하는…….
“부인?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는 거예요. 어디가 아픈 겁니까? 계속 아파요?”
이클리트는 어쩐지 이상한 아멜리아의 모습에 불안해하며, 곧장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행여나 놓쳐버릴까 봐. 이대로 사라져버릴까 봐.
“부인, 부인? 아멜리아!”
그때, 아멜리아가 손을 뻗어 이클리트의 얼굴을 더듬었다. 특히나 그의 눈동자를 연거푸 쓰다듬으며 잠시 입술을 물었다가 뗐다.
“날 봐요. 계속 날 보고 있어요. 계속, 나만 봐요.”
뜻밖의 애달픈 목소리에 이클리트는 심장이 철렁했다.
“보고 있어요. 당신만 보고 있어요. 내 눈엔 당신만 살고 있어요, 항상.”
그의 목소리를 따라서, 정말로 그의 눈동자에 오롯이 그녀가 있었다. 아멜리아는 꿈의 잔재를 털어내며, 겨우 안도하는 손길로 쓰다듬던 그의 눈가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또 한 번, 그저 악몽이었다고 확인하면서.
‘그래. 악몽이야.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 무서운 건, 대공 전하가 아니야.’
그렇게 텅 비고, 허망한 시선으로 죽음을 읊조리던 그 불쌍하고 가여운 자는. 아무리 악몽이었다고 해도 절대, 대공 전하가 아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