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시작은 역시 그 편지(1)2021.09.17.
“내가, 당신을 울릴까 봐.”
울린다는 말이 아멜리아의 심장으로 섬뜩하게 박혔다. 저 말의 뜻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싶었다. 아니, 외면하고 싶었다. 지금껏 그가 로사 유모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 이유를.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오한이 온몸을 찔러댔다. 비의 서늘함이 몸에 배어 한기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사실 그도 걱정이었다.
‘분명 많이 다쳤을 거야. 아니라고 하곤 있지만.’
그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이렇게 살아남아 있는 게 기적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분명, 그의 상처 위에 세운 걸 테고. 물론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날았을까? 꿈에서 본 그 검은 새처럼?’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내 냉소를 그렸다.
‘하, 아멜리아. 제발.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하자. 왜 자꾸 꿈에 그 검은 새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대공 전하와 관계없어. 자꾸 이런 위험한 생각하지 말라고.’
그보단……. 아멜리아가 머뭇머뭇 이클리트를 바라보자,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이클리트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해요?”
“……안아줘요.”
뜻밖의 말에 이클리트가 당황하자, 아멜리아는 부끄러움을 꾹 삼키며 애써 의연한 척 말했다.
“추우니까. 좀 안아달라고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는 절대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거다. 게다가.
‘정말 춥기도 하고.’
이클리트는 잘게 떨고 있는 아멜리아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아니면, 안기 싫은 거예요?”
“그럴 리가. 믿기지 않을 뿐이지.”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몸을 소중하게 안아주었다. 그녀의 몸이 몹시 차가웠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몸을 천천히 문지르고, 더듬으며 어떻게든 열기를 일으키려고 했다. 아멜리아는 막상 그에게 닿자, 더 몸이 떨려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보듬으며, 동굴 천장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여전히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비라도 그치면 나을 텐데…….’
그가 날씨를 다루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일시적으로 내릴 수는 있지만, 완전히 멈추거나, 계속 내릴 능력은 없는 것이다. 그 정도로 날씨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그건 신이니까. 하지만 이클리트는 평범한 인간, 아니. 그저 반인반수의 괴물일 뿐이었다. 아무리 안고 있어도 체온이 오르지 않자, 이클리트는 경직된 숨을 삼키며 그녀를 잠시 품에서 떼어놓았다.
“왜 그래요?”
“이렇게 안고 있는 것보단, 이게 더 나을 겁니다.”
“네?”
“조금만. 참아줘요.”
이클리트가 순식간에 웃옷을 벗어버렸다. 갑자기 눈앞으로 그의 맨살이 보이자 아멜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오, 옷 벗는 게 습관인 뭐 그런 거예요?”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됩니다. 체온을 유지하려면, 살과 살이 맞닿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인 옷을 벗길 수는 없으니까.”
“지금 그 상태로 날 안겠다고요? 아!”
하지만 이클리트는 곧장 그녀의 어깨를 당겨서 힘껏 안아주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눌려버린 아멜리아는 절로 후끈한 열기가 달아올랐다. 이클리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서로를 볼 수 없으니까. 그럼 덜 부끄러울 겁니다. 불쾌해도, 좀 참아요.”
스스럼없이 불쾌하다고 말하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사실, 그도 추울 것 같아서 안아달라고 한 건데. 이렇게 안겨 있으니, 걱정한 것과 무색하게 그는 너무 뜨거웠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정말로 온몸으로 달뜬 온기가 맴돌았다.
“……불쾌하지 않아요. 대공 전하시잖아요.”
“…….”
“오히려, 고마워요. 이 말을 진작 했어야 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리고, 이클리트는 그제야 긴장했던 입꼬리를 풀면서 조금 더 안온한 손길로 그녀를 다독였다.
“다, 괜찮습니다.”
가만히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몸이 조금 들썩일 정도로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그래, 그의 마음이 들린다. 오롯이 그녀를 향해 반응하고 있는 그의 마음이 심장을 적셨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피부로 와 닿는 감각에 안도가 번졌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라고. 그에게 분명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그렇지 않으면, 빗소리마저도 꿰뚫고서 그녀를 채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용기를 내야 할 건 아멜리아, 그녀였다. 그는 끊임없이 손을 내밀고 있었으니까. 그 손을 잡고, 정확한 진실과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이클리트는 제 품에서 차츰차츰 잦아드는 떨림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를 안은 제 몸이 바짝 긴장한 채, 자꾸만 목구멍으로 숨이 걸렸으나. 그녀가 무사하다는 안도감. 그녀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조금은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했다. ***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둠은 더 짙어졌고, 물 향이 섞인 공기가 상쾌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동굴 천장에서 잔잔해진 하늘 위로 무수한 별이 보였다. 그토록 두려웠던 순간도 지나면, 저렇게 아름다운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 이제 괜찮아. 준비됐어.’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서 몸을 뗐다. 한숨도 자지 않고 있었던 이클리트는 그녀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움찔 반응하며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이제 괜찮은 겁니까?”
아멜리아는 그를 향해 말간 미소를 그렸다.
“괜찮아요. 비가 그친 것 같아요. 같이, 별이나 볼래요?”
그녀가 손을 내밀자, 잠시 얼떨떨하던 이클리트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웃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아무래도 이제 준비가 된 듯싶었다. 모든 얘기를 시작하고, 들을 준비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바람조차 잠잠한 적막 속에 이번엔 비가 아니라 별이 폭우처럼 쏟아질 듯, 하늘에 박혀 있었다. 비 내린 후라서 그런지 하늘이 거울처럼 맑아서 더 그렇게 보였다. 아멜리아는 원 없이 하늘을 보며 이클리트에게 말했다.
“지금 풍경도 예쁘지만, 대공 전하가 보여줬던 그 풍경을 잊지 못해요. 내가 좋아하는 제비꽃이 끝도 없이 피어 있었고, 그 위를 날아다니던 그 루나비들을. 그 기적 같은 풍경들을 말이에요.”
“…….”
“대공 전하께서 나를 위해 보여준 건,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이 아니었던 거예요. 시들지 않았던 제비꽃, 내 드레스에 피웠던 그 꽃까지. 너무 아름다워서 멈춰버릴 거라는 그 시간들을, 대공 전하께서 만드신 거죠?”
아멜리아의 시선이 이클리트를 올곧게 응시했다. 이클리트는 그 눈빛을 보며 더는 흔들리지 않고, 그녀를 잡고 있지 않은 또 다른 손을 뻗었다.
“당연히, 당신을 위한 거였으니까.”
그때,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진흙땅에서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경악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도, 이클리트는 그녀의 주변으로 계속해서 꽃을 피우며 속삭였다.
“내가 제비꽃을 피웠던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덤덤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 하니까. 오직, 당신을 위해서였어.”
마침내 그녀의 주변으로 제비꽃이 보랏빛으로 하늘거렸다. 아멜리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들이, 정말로 이뤄졌다. 정말로 그가, 그가 꽃을 피운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게…….”
마법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고? 지금의 마법은 매개물이 없으면 불가능하잖아. 그렇다면 그는 고대 마법사인가? 시간의 숲이 없어도, 정령과 소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대가 어둠이 싫다면.”
그의 손가락이 하늘을 향했다.
“어둠을 없애버릴 수도 있어.”
순간, 주변이 환해진다. 아멜리아는 어쩐지 익숙한 광경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지난날. 체자렛 백작가 복도에서 어둠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었을 때, 갑자기 사방이 환해지면서 그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냥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설마, 날씨를…….”
그가 손을 내리자, 다시금 어둠이 내려앉았다.
“맞아요. 날씨를 다룹니다.”
그의 말에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됐다. 처음 그가 자신을 구해줬을 때, 그 말도 안 되는 지진도. 그를 주위로 불었던 바람도. 갑자기 적절하게 내렸던 비와 안개까지. 항상 기적 같은 날씨 속에, 그가 있었다. 설마, 설마 했었지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우연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대공 전하께서 하신 거네요.”
“이제 숨기는 거 없이, 전부 보여주려고요. 당신도 이제 들을 준비가 된 거 아닙니까?”
이클리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목소리로 끊임없이 그녀를 안정시키는 듯했다.
“로사 유모의 편지는 내가 쓴 겁니다. 시작은 내게 당신의 편지가 먼저 도착했었어요.”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가 멈칫했다.
“내 편지가, 대공 전하께 갔다고요?”
“처음 로사 유모에게 편지를 보낸 주소를 확인해봐요. 아마 로드에 적힌 고유 번호가 잘못 표기되어 있을 겁니다.”
“아, 그럼…….”
“네. 그 잘못 보낸 편지가 내게 온 겁니다. 물론 부인에겐 실수였지만, 내 인생엔 가장 큰 시작이었어요.”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방치했다. 그 새하얀 세상에서, 죽는 그 순간만이라도 어둠 속이 아닌 그런 환한 빛 속에서 죽고 싶었는데. 결국 죽지 못한 채, 카힐로에게 끌려와야 했다. 카힐로는 이클리트를 보면서 처음으로 화를 냈다.
“대공 전하, 나약해지지 마세요. 이제 겨우 그 감옥에서 해방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야죠. 제대로 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카힐로가 이클리트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외쳤지만, 이클리트는 새까맣게 비어 버린 눈동자로 카힐로를 쑥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대공 전하…….”
“내가 왜 살아야 해?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해방이 아니야.”
이클리트는 공기가 다 빠져버린 목소리로 끊임없이 죽음을 말했다.
“나는 죽고 싶어. 내가 가장 원하는 건, 이 삶에서 해방되는 거야. 죽어야 끝난다고.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돼? 내가 괴물이라서, 죽지도 못하는 거야?”
카힐로는 애원에 가까운 이클리트의 말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이클리트를 끌어안았다. 마음이 아팠다. 황궁의 지하실에서 이분은 대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당한 것인가. 대체 폐하께서는 그래도 자기 자식인데, 정말 시간의 숲. 단지 그 열쇠만을 바랐던 것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스란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수인의 힘이 발현되지 않은 것.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반인반수라고 여긴 아스란이 이클리트를 북부로 버린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북부에 버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클리트의 수인의 힘이 발현됐다. 그것도 반인반수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수인의 힘이. 마치 누군가 잘 감춰뒀다가, 황궁을 나선 순간 풀려난 것처럼 보이는 그런 기묘한 우연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내게 부탁한 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지켜달라고.’
카힐로는 누군가를 떠올렸다가 이내 한숨을 삼키며 멍하니 앉아 있는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벌써 여러 번,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었다. 이번엔 아예 자신의 눈을 피해, 야성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들키기까지 했으니. 다행히 헤스틴 공작부인이 눈 감아 주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
‘대체 어떻게 저분을 살게 해야 하지?’
저 마음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카힐로는 난감하기만 했다. *** 그 일 이후, 이클리트는 그저 죽은 듯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카힐로가 계속 감시하고 있으니, 직접 죽을 수가 없어 그냥 계속 누워만 있었던 것.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대로 있다 보면, 자신이 정말 괴물이 아닌 이상 죽지 않을까.
‘이 귀찮은 심장이 멈추지 않을까.’
무의미하게 귓가에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도 싫었다.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때, 노크와 함께 카힐로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엔 카힐로 혼자가 아니었다.
“대공 전하, 앞으로 대공 전하를 보필할 하녀입니다.”
하녀라는 말에 이클리트가 굳어진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한 늙은 여인이 서 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몹시도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었다.
‘하녀라…….’
아무래도 카힐로가 자신의 옆에 감시역을 붙여놓을 생각인 듯했다.
‘귀찮게 됐군.’
이클리트는 인사도 없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카힐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로사에게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네. 오늘 좀 컨디션이 안 좋으신지…….”
“괜찮습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예전에 남부에서 오랫동안 유모 생활을 했었다고요. 저런 아이 한 명 다루는 건 식은 죽 먹기죠.”
보기와는 달리 경쾌한 목소리 끝에 아주 시건방진 말이 튀어나왔다. 이클리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로사는 그런 이클리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가 되어서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긴 지루했거든요. 저런 분이라면, 지루하지 않고 좋겠어요. 믿고 맡겨주세요.”
카힐로는 로사의 말에 한시름을 덜었다. 사실 첫인상이 좋았다. 몹시 유쾌하고 긍정적이었으니까.
‘조금은 저분에게 좋은 영향이 있지 않을까.’
물론 의아한 건, 길게 일하지는 못할 거라고 말한 점이지만.
“그럼 부탁하네.”
카힐로가 빠져나가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클리트가 섬뜩한 어조로 읊조렸다.
“헛수고다.”
“…….”
“난 여기서 그냥 죽고 싶으니까, 날 돌봐줄 필요 없어. 돌아가.”
“죽기를 기다리시다니. 그럼 잘됐네요.”
이클리트는 뜻밖의 대답에 움찔하며 로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라는 듯 이클리트에게 다가왔다.
“그럼 같이 기다려보죠.”
“뭐?”
“저도 그래요. 저도 지금 제가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