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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우린, 제물이었다 (2) (129/199)

129화. 우린, 제물이었다 (2)2022.03.28.

해가 바뀌면서, 솔라 황제가 숨기고 있던 야욕이 무섭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루베르를 속국으로 삼지 않고, 다섯 공작가로 만들어서 환심을 샀던 이유. 그건 루베르를 이용하기 위해. 시간의 숲을 열 봉인의 열쇠를 탐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루에를 불러놓고서 계속해서 루베르를 옥죄기 시작했다.

16553739266087.jpg“그대들은 정령을 신으로 섬기며 살았지. 수인과도 잘 지냈었고.”

16553739266087.jpg“…….”

16553739266087.jpg“그렇다면 시간의 숲을 열 봉인의 열쇠에 대해서, 그대들은 아는 것이 아닌가? 이제 솔라 제국의 공작이 되었으니, 제국을 위해서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루에는 황제의 말에 표정이 굳어지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39266087.jpg“저희도 열쇠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16553739266087.jpg“이봐, 루베르 공. 정령도 그대들을 지켜주지 않고, 수인도 마찬가지였어. 이제 그대들을 지켜주는 건 솔라 제국이라고. 그렇다면 솔라 제국을 위해 의무를 다해야지.”

16553739266087.jpg“폐하께서 주신 호의는 감사하나, 정말로 열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도 지금 말씀하셨지요. 버려졌다고. 예. 저희도 갑자기 버림받았습니다. 그런 저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솔라 황제는 루에의 말에 선득해진 시선으로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16553739266087.jpg“이런. 루베르 공이 이토록 짐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다니…… 여전히 솔라에 불만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16553739266087.jpg“그런 것이 아닙니다, 폐하.”

16553739266087.jpg“만약, 다섯 공작가로서 반군을 일으킨다면. 이는 황제로서 가만 볼 수가 없는 사항인데…….”

루에는 솔라 황제의 섬뜩한 어조에 흠칫하며 곧장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16553739266087.jpg“그런 의미가 아님을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정말로 모릅니다. 정녕 알았다면, 폐하와 솔라 제국에 도움을 드렸을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16553739266087.jpg“흐음…….”

16553739266087.jpg“폐하, 제발. 루베르는 반군이 아닙니다. 솔라 제국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같은 제국민으로서, 루베르를 지켜주십시오!”

루에가 간곡하게 외치는 말에, 솔라 황제는 더없이 냉랭한 표정으로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16553739266087.jpg“그럼 정말 쓸모없군.”

황제의 말이 루에의 가슴에 칼처럼 박혀 들었다.

16553739266087.jpg“외모가 독특하니, 다른 쪽으로는 쓸모가 있으려나…….”

루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술을 꽉 깨물고서 이 굴욕적인 모든 걸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루비엔이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16553739266087.jpg‘모두가 도망치고, 숨어버렸으면서. 우린 왜 이렇게 계속 고통받아야 하는 거지?’

  이후, 루베르는 솔라에서 저주받은 이방인으로 내몰렸다. 필요에 의해 가졌다가, 필요가 없어졌기에 온갖 조롱과 학대의 대상이 되어 궁지로 내몰리고 또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루베르가 여전히 정령에게 매달리며, 기도하는 모습에 결국 루비엔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정말이지 치가 떨리고 지긋지긋해졌다. 루비엔은 섬뜩해진 시선으로 루에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16553739266087.jpg“황제는 결국 우릴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다섯 공작가라니, 솔라 제국민이라니, 그건 다 개소리라고!”

16553739266087.jpg“…….”

16553739266087.jpg“그러니까 차라리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 그냥 반군을 일으키자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엎어버리기라도 하자고!”

루에는 루비엔의 철없는 소리에 예전과 다르게 냉랭한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16553739266087.jpg“다 죽자는 소리야?”

16553739266087.jpg“형님!”

16553739266087.jpg“루비, 이건 이기고 지는 전쟁 게임이 아니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야. 살아남아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어. 언젠가 정령들이 돌아오면. 수인들도 돌아오면. 그때 다시 루베르를 일으켜서…….”

루에의 말에 루비엔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16553739266087.jpg“형님이 그날 말했잖아. 우린 버려졌다고! 정령은 숨어버렸고, 수인도 마찬가지야. 맹약은 무슨! 우릴 내팽개치고 없어져 버렸는데! 그들도 우릴 수호자로 이용했을 뿐이야. 솔라 제국 황제와 다를 게 없다고!”

솔라 황제가 필요 때문에 내린 독이 든 선의. 루비엔은 수인도 똑같다고 여겼다. 수호자라는 복종이 필요해서 선의를 내렸을 뿐!

16553739266087.jpg‘그런데 멍청하게, 루베르는 그걸 계속 믿고 있단 말이야? 언젠가 그들이 도와줄 거라고?’

술 취한 그날, 분명 버림받은 거라고 스스로 인정했으면서. 형님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루베르 전체가 변하지 않을 것이다.

16553739266087.jpg“형님, 나는 이제 루베르도 지긋지긋해.”

16553739266087.jpg“루비엔…….”

루비엔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증오하며 노려보았다. 헝클어진 분홍 머리카락 사이로 노예의 낙인처럼 새겨진 문양과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는 선홍빛 눈동자. 일순, 루비엔의 미간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16553739266087.jpg“나는, 이제 이 눈동자도 싫어. 이대로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루베르도 싫고, 수인도 싫어. 루베르를 지켜야 한다고 했지. 계속 이렇게 당하고 또 당하면서.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근데 난 못하겠어.”

16553739266087.jpg“루비엔!”

16553739266087.jpg“미안해. 형님 혼자 다 해. 난, 이제 정말 싫어!”

루비엔은 그 길로 루베르를 빠져나갔다. 겉모습을 철저히 바꾸고, 이름까지 버리면서 제 안에서 루베르를 철저히 지워버렸다. 그때는 이게 옳은 것이라고. 이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역시 도망치고 만 것이다. *** 몇 년 후, 솔라 황제가 승하하고, 아스란 황제가 다섯 공작가의 선택으로 심판에 통과하여 황위에 올랐다. 당연하겠지만, 다섯 공작가의 선택에서 루베르의 선택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선택이 배제되었다. 아스란 황제의 통치하에 루베르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대우는 더 참혹하고 열악해졌다. 루베르는 속국처럼 차별받고, 뒷골목에선 루베르의 신비한 외모를 탐내면서 노예로 이용하거나 엉망으로 망가뜨리며 죽이기 일쑤였으니까. 그런데도 중앙청은 모른 척했고, 아스란 황제 역시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루에가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그 동생이 가주가 되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루비엔, 아니 이사나는 그 소식을 듣고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16553739321087.jpg‘형님이, 돌아가셨다고…….’

게다가 루베르의 새로운 가주가 자신이라니. 이사나는 무시하고 외면했다. 자신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전히 루베르는 정령을 믿고, 수인을 영원한 친구로 여기는데. 절대로 원망하거나, 증오할 수 없는데. 자신은 그들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수인을 보게 되면 죽일 것 같고, 망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자신은 루베르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을 지키는 수호자 따위는, 될 수 없었다.

16553739321087.jpg‘죽어서라도 제발, 루베르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기를.’

이사나는 어렵게 구한 스켈레톤 플라워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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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3739321087.jpg“형님이 돌아가신 후, 제가 가주가 되었지만 저 또한 루베르를 떠났으니, 그 어떤 사교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얼굴을 보이지도 않아서 아무도 루베르 가주를 몰랐던 겁니다.”

이사나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흘렀다. 결국, 일부러 루베르 가주가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니었다. 그조차 루베르를 등지고 있었던 거다.

16553739321087.jpg“마나가 있어서 총을 잡게 됐고, 티어가 됐습니다. 용병으로 지내다가, 임무 실패로 죽어가던 저를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살려서 거둬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이사나로서 피오레가 첫 번째 집이 되었습니다.”

아멜리아는 그제야 이사나가 피오레에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16553739349597.jpg‘외조부께서 이사나 경을 구했던 거구나.’

계속해서 날이 서 있던 이사나의 목소리는 피오레를 얘기할 때마다 조금은 안온한 온기를 띠었다. 진심으로 그는 피오레를 아끼고 있었다.

16553739321087.jpg“피오레가 좋았습니다. 제가 루비엔이 아닐 수 있어서 좋았고, 완전히 이사나가 될 수 있어서. 결국 도피였지만, 그래도 한순간 전부 잊을 수 있었으니까.”

잊을 수 있었다는 말에, 이사나의 눅진한 감정이 묻어났다. 이사나가 지금껏 루베르와 관련해서 화합과 평화에 지독히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16553739321087.jpg‘태양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처럼. 그래서 가주님은 진정 그 얼어붙은 땅에도 축복의 꽃을 보여주고 싶으신 겁니까?’

  이사나는 처음 라니와 다른 루베르가 보였던 태도처럼. 달라진다는 걸 믿지 않는 거다.

16553739321087.jpg‘결국, 가주님께서도 아직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선택을 쉽게 내뱉지 마십시오.’

16553739321087.jpg‘가주님이 희망을 품고, 그 희망에 걸려든 사람들이 또 저주에 걸릴까 봐 무섭죠.’

   함부로 희망을 내뱉고, 그 희망에 좌절하며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믿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거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그 절망감에, 홀로 무너지고 있었던 거다. 아멜리아는 믿음이 찢겨버린 이사나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16553739349597.jpg“지금껏 피해왔지만, 그래도 루베르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거 아닌가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이사나는 냉한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16553739349597.jpg“아예 외면했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텐데. 여전히 복수심이 드는 것도 그렇고. 몰래 약을 사서 루베르를 도와준 것도 그렇고.”

16553739321087.jpg“…….”

16553739349597.jpg“내게 남겼던 편지에도 루베르에 대한 염려를 느꼈어요. 이사나 경이 끊임없이 자신을 겁쟁이라고 말하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몰아붙인 것도. 결국, 외면하고 피했던 걸 후회하는 거 아니에요?”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던 이사나의 감정을, 아멜리아는 조금이지만 알 것 같았다.

16553739349597.jpg“하지만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루베르도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노력해보면…….”

아멜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사나에게 다가갔지만, 이사나는 쓰게 웃으며 아멜리아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16553739321087.jpg“예전으로 뭘 돌릴 수 있는 겁니까?”

16553739349597.jpg“이사나 경…….”

16553739321087.jpg“형님도 자꾸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완전히 돌릴 수는 없잖아요? 죽은 아바마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형님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비참하게 죽은 루베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평생 믿었던 신념조차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데.”

이사나의 목소리가 점점 스산해지자, 이클리트의 눈빛이 다시금 경계심으로 바짝 달아올랐다.

16553739321087.jpg“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어서, 전부 파괴라도 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가주님을 지킬 수 없죠.”

그는 이클리트를 노려보며,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16553739321087.jpg“수인도 여전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사나가 택한 것은 복수였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사나의 선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39349597.jpg“복수한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16553739321087.jpg“그래도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복수 끝이 파멸이라고 할지라도, 그거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아요. 죄송해요, 가주님. 제 마음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굳이 되돌아가야 한다면, 이사나가 아니라 이젠 루비엔으로 돌아갈 겁니다.”

루비엔으로 돌아간다는 건, 그때 하지 못했던 선택을 하는 것이다.

16553739321087.jpg‘억울하게 죽은 루베르를 위해. 그들의 절망과 절규를 새기며, 전부 엎어버릴 거야.’

그들을 대신하여 칼을 휘두르는 것! 이사나의 안광이 차갑게 번뜩이며 순식간에 아멜리아를 확 끌어당겼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참고 있던 분노를 드러냈다.

16553739528598.jpg“이사나!”

아무리 이사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그녀를 건드린다면 결코 살려둘 수 없었다.

16553739349597.jpg“대공 전하, 안 돼요!”

이클리트의 살기에 주변이 휘몰아치면서 공기가 칼날처럼 벼리어졌다. 하지만 이사나는 아멜리아가 항상 지니고 있는 리볼버를 빼앗고서는 가까이 다가온 이클리트를 향해 겨눴다. 이클리트는 재빨리 아멜리아의 앞을 지키며, 리볼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이클리트라고 해도, 마탄을 정통으로 맞으면 분명 숨이 끊어질 것이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뒤에서 어떻게든 두 사람을 말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16553739349597.jpg“이사나 경, 그만 해요. 대공 전하도 제발!”

하지만 이클리트와 이사나의 시선은 점점 더 팽팽해졌다. 이사나는 방아쇠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서 그의 시뻘건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16553739321087.jpg“원래 리볼버는 자살용이지만, 한방이면 끝날 테니까.”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이사나의 등 뒤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사나는 돌아보지 않아도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심장이 더없이 저릿해졌으니까. 이사나는 정말로 이사나로서의 모든 것이 끝남을 느끼며, 나직이 읊조렸다.

16553739321087.jpg“역시, 카마리 경은 강하네요. 전혀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카마리가 싸늘한 시선으로 이사나의 등 뒤로 칼을 겨눈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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