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조금씩, 꿈을 꾸다
(130/199)
130화. 조금씩,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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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조금씩, 꿈을 꾸다
2022.04.01.
이사나의 여유로운 어조 끝에, 카마리의 목소리가 매섭게 박혔다.
“당신도 강하면서. 나한테 잡히지 않을 수 있었으면서.”
카마리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서 이대로 그를 제압하지도, 그렇다고 풀어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막상 이 자리에 서긴 했으나, 그녀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놓아줄 수도 없다.’
카마리의 망설임을 읽은 이사나가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까 봐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사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카마리를 응시했다.
카마리의 칼이 어느새 이사나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워낙 날카롭게 벼린 칼이기에, 가슴에 닿자마자 옷깃을 찢고 피가 새어 나왔다.
카마리가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칼을 떼어내자, 이사나가 그 틈을 이용해선 순식간에 카마리를 끌어안았다.
이사나의 품에서, 카마리는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마지막으로 꽉 끌어안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엔 꼭 죽여요. 내 수작에 넘어가지 말고. 다음에 만나면, 우린 진짜 적이니까.”
“…….”
“말했잖아. 날 좋게 보지 말라고. 카마리 경한테 미안해지고 싶지 않았어. 카마리 경의 신념은 지켜주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다음엔 반드시, 날 죽여야 해요.”
한순간 흔들렸던 카마리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이면서 이사나를 붙잡고자 했다.
하지만 이사나는 카마리를 거세게 밀쳐버리고서, 순식간에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이사나 경!”
카마리가 곧장 창가로 달려갔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저격수의 특기는 날렵함과 엄폐술이니.
작정하고 사라진 이사나를,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카마리의 마음속에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치솟았고, 창틀을 움켜쥔 손끝은 하얗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곧장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에게 다가가서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배신자를 처단할 수 있었는데, 제 부주의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카마리의 입에서 나온 배신자라는 말이 아멜리아에게 아프게 와 닿았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카마리의 어깨를 보면서,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카마리 경. 일단.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카마리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치미는 감정을 그저 꾹 삼킨 채, 붉어진 눈동자를 감추며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마 두 번 다시 이사나로서의 그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가, 자꾸만 카마리의 심장을 습하게 두드렸다.
***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자신의 침실로 보낸 뒤, 세스가를 만났다.
세스가는 아멜리아의 표정을 보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이사나 경. 그자가 루비엔 왕자였나 보군.”
“예. 황자 전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이어진 아멜리아의 말에 세스가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한때 루베르와 잘 지내기도 했었고, 어린 이사나를 보기도 했었으니까.
“루베르도 결국은 희생자지. 정령도 사라지고, 수인도 버틸 수 없었을 거야. 그들 처지에서도 루베르를 도와줄 여력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루베르 입장에서는 충분히 원망할 수 있어.”
“결국 모든 건, 시간의 숲 때문에 벌어진 일이네요.”
“그러니까 이 끔찍한 고리를 이젠 끊어내야지. 더는 그 숲 때문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필이면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숲.
이게 알려지면 또 분쟁의 씨앗이 될 테고, 루베르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말 것이다.
아멜리아는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시간의 숲 때문에 희생된 건 루베르만이 아니니까.
‘이제 겨우 힘껏 살아가기 시작한 대공 전하를. 세상에 의미를 두고, 여러 감정으로 채우며 움직이고 있는 그분을, 또다시 가둘 수는 없어. 그 숲 때문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어!’
***
긴 밤이 끝나가고, 곧 있으면 새벽이었다.
아멜리아는 케이트를 만나서, 저택이 흔들린 일을 지진으로 치부하며 둘러대야 했고, 티어들에게 호위를 더 강화해달라고 부탁한 뒤, 마미까지 다독이고 나서야 침실로 향할 수 있었다.
칼렌과 다른 티어들에게는 도저히 이사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그가 배신하고 떠났다고.
그가 이사나가 아니라는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하아…….”
아멜리아가 침실로 들어서자, 이클리트가 침대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클리트의 어깨에 붕대를 감아 놓은 모습부터 눈에 들어온 아멜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가 꽤 깊은지, 붕대에는 피가 스며 있었다.
아멜리아는 곧장 서랍에서 새 붕대를 찾아서는 이클리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꼭 끌어안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벌써 이렇게 피가 묻었잖아요. 갈아야 한다고요.”
이 일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비밀이기에, 치료사를 부를 수도 없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혼자서도 잘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해주고 싶어요.”
이클리트는 애써 태연한 척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결국 말없이 등을 보였다.
아멜리아는 침대 위로 올라와서는 그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칼에 베인 상처가 아프게 와 닿았다.
사실, 칼에 베인 상처보단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라지긴커녕, 그때의 끔찍한 참상을 그대로 새겨놓은 듯한 흉터가 더 쓰라리게 그녀에게 보였다.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아멜리아가 천천히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 안겼다.
이클리트는 잦은 떨림이 느껴지는 그녀의 열기에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면서, 버석거리는 입술을 뗐다.
“돌이켜보면, 이사나 경이 많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
“황궁에서 보낸 그 편지도 그렇고. 그 편지와 함께 보낸 제비꽃도 그렇고. 내가 제비꽃을 좋아한다는 거, 이사나 경도 알았거든요. 같이 그 제비꽃 정원에 있었으니까. 우리 어머니 얘기를 해주면서요…….”
“…….”
“계속,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말을 했었어요.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그래도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점점 자책이 실리면서, 심장이 더욱 불안하게 뛰었다.
“부인께선 신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때, 뜻밖의 서늘한 말에 아멜리아는 움찔했다.
“네?”
“부인은 마치 신처럼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하고, 그 많은 걸 다 안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그걸 당신이 다 해결할 수는 없어요.”
“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보다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사나 경까지 챙길 필요 없습니다. 이건 이사나 경의 몫입니다. 도와줄 순 있지만, 부인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건 오만이에요.”
이클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는 아멜리아와 마주했다.
“부인은 항상 나부터 챙기라고 하죠. 다치지 말라고. 위험해지지 말라고. 자기 자신을 제발 챙기라고. 부인이야말로.”
냉정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어느새 떨림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만 보고 있어요. 나아가 이 솔라 제국 전체까지. 이러다간, 정말 당신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마주 보는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연신 아멜리아를 훑어내리며 서늘하게 읊조렸다.
“당신이 다칠까 봐, 불안하고. 위험해질까 봐, 항상 초조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꼭꼭 숨겨두고 싶어. 그저 내 곁에만 두고, 지켜주고 싶단 말입니다.”
숨 막히게 파고드는 눅진한 갈망 끝에, 다시금 애달픔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나도 정말 바라는 게 아니니까. 부인을 말리진 않을 겁니다.”
한때는 정말로 그녀가 위험에 휘말리지 않게, 어딘가에 가둬두고 싶었다.
위험한 건 전부 자신이 하면 되니까.
그녀는 그저 소중한 자신의 아내로 있어 주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아멜리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멀리, 높이 날려고 하는 그녀의 날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밀주의 의미를 알리고, 자신이 반인반수라는 것도 밝혔다.
그녀가 항상 바랐던 것.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그 길을 택한 거다.
“부인이 바라는 걸 함께 이루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초조해하지 말아요. 천천히, 차근차근하면 되는 거잖아요.”
“…….”
“이상하게 당신이 꿈꾸는 세상에, 당신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묘하게, 속내를 꿰뚫린 기분이 들었으니까.
“나는 오직 당신만 보고 있어. 당신만 무사하면 돼. 당신만 행복하면 되고, 황제가 되려는 이유도. 내가 만들 솔라 제국도, 다 당신이 꿈꾸는 것이고, 당신이 원하는 거니까. 그 세계에 당신이 없으면, 내겐 가치 있지 않아요.”
섬뜩할 정도로 완고한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공 전하, 그건!”
이클리트는 단숨에 아멜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필요할 때, 날 떠올려 달라고 했죠. 내게 이렇게 기대기도 해요. 함께 하자고 했잖아.”
아멜리아는 그의 품에서 자꾸만 혼자 끌어안고자 했던 불안감을 조심스럽게 덜어냈다.
“미안해요. 자꾸만, 나도 모르게 초조하게 그랬어요. 그러니까 대공 전하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전부가 되지 말아줘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대답 없이 그저 더욱 그녀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그러다가 그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자, 아멜리아가 웃음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대공 전하의 치료가 우선이네요.”
아멜리아는 이번엔 제대로 이클리트를 마주 보고는 그를 안아주면서 붕대를 바꿔주었다.
여전히 이사나가 이클리트를 이렇게 공격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밀주를 마시면, 대공 전하도 많이 힘든 거죠?”
이클리트는 틈만 나면 계속 그녀를 안으려고 하면서 말했다.
“조금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말에 아멜리아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그 상황에서 이사나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그가 몹시 노력했다는 걸, 아멜리아는 알았으니까.
“……부인만이 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네?”
이클리트는 방금 대답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사실, 아직은 아멜리아가 그에겐 전부였다.
그녀만이 중요했고, 그녀만 있으면 다 괜찮았지만.
그건 그녀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꾸만 자신에게 여러 가지 세상을 가져오려고 했으니까.
“부인이 바라는 세상을 보고 싶어졌고, 그 또한 나한테는 중요하게 됐습니다.”
이클리트는 어쩐지 조금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이사나 경과 세인트, 루베르를 포함해서. 그리고 언젠가 우리에게 찾아올 아이를 위해서도.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는 평범한 세상을, 나도 만들고 싶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멜리아는 멍해졌다.
어쩐지 아무 반응이 없는 모습에 이클리트가 다시 살포시 고개를 들었다.
“부인?”
“아, 아니. 대공 전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 몰랐어요. 그러니까…… 사실 너무 기뻐서…….”
진심으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면서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클리트는 가만히 아멜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 아버지로서, 이 세상은 괜찮다고. 좋은 곳이라고. 너는 행복한 아이라고, 쓰다듬어주면서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였던 의미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픔을 알기에 공감할 수 있고, 그 공감은 훗날 그가 황위에 올랐을 때.
솔라 제국을 평등하게 이끌 통치력이 될 것이다.
‘훗날, 내가 사라져도. 그에게 남겨진 의미는 전혀 무의미해지지 않을 거야.’
부디, 꿈을 꾸기 시작한 그의 세상을 볼 수 있기를.
아주 조금만 엿볼 수 있기를.
‘조금만 더, 내게 시간이 주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