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내 발아래 무릎 꿇도록 (153/199)


153화. 내 발아래 무릎 꿇도록
2022.06.20.


황궁으로 돌아온 알렉드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황제의 발표가 그에겐 석연치 않았으니까.


‘폐하께서 수인 여인에게 속았다고? 하지만 대공의 정체가 밝혀지던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 의연하셨는데······.’

게다가 황제는 대공을 사로잡아 처벌한다고 했으나, 오히려 참형하지 않고 보여주기식으로 참혹한 쇼를 한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에리얼이 알렉드라를 발견하고서는 곧장 달려왔다.


“포르티셰 공작 각하.”

“폐하께서 귀환하셨나?”

“예. 공작 각하께 명을 내리셨습니다.”

“무슨 명이지?”

“솔라리스 광장에서 사흘 후, 반역자 아이냑을 공개 처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처형의 총책임을 공작 각하께 맡기셨습니다.”

“······.”

“아이냑과 관련된 루베르도 수소문하여 처리하시라는 명입니다.”

그 반군 자식의 공개 처형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관련된 자 모두를 색출하여 처리하는 거라면······.


“이클리트는 어떻게 하지? 같이 공개 처형하는 것인가?”

“아이냑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더 남은 배후가 있을 테니, 이클리트는 계속 고문하여 조사할 것입니다.”

알렉드라는 에리얼의 말에 미간이 굳어졌다.

가장 큰 배후는 분명 대공이다. 그러니 대공을 처형하면 아래 배후는 자연스럽게 무너지게 되는데.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하겠다고?

이런 생각은 전혀 말이 되질 않지만.


‘폐하께서 마치 대공을 취하고 있는 거로 보이는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폐하께선 그 반인반수로 뭘 하려는 거지?’

황실이 수인과 얽혀 있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드라는 개인적으로 계속 에드조프에 관해서 찜찜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따로 조사해봐야겠군.’

어디선가 자꾸 바람이 불어와, 알렉드라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그는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어내고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관련된 루베르부터 처리해야 했으니까.


 

***

밤새 은밀히 황궁으로 달렸던 이클리트는 현재 그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지하 미궁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여기 돌아왔다는 공포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몸은 여기 묶여 있으나, 바람을 이용하여 황궁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사실 이걸 위해서 제 발로 황제에게 무릎 꿇기도 했고 말이다.


‘아이냑의 공개 처형이 얼마 안 남았군.’

현재 아이냑은 카힐로와 함께 있었다.

이러다간 아이냑과 더불어 카힐로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공개 처형 전까지, 두 사람을 탈출시켜야 하는데······.’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클리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점점 커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들어온 이를 보며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이내 이클리트는 뭔가를 깨닫고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 옛날, 이 지하실에 황제 폐하와 에리얼을 제외하고 또 한 명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게 바로 그대였군. 아젠 체자렛 백작.”

이클리트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젠이었다.

이클리트는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이곳에서의 자신의 기억을 뭔가가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힘이 커지면서, 그 안개가 사라지며 모든 것이 떠올랐다.

체자렛 백작도 황제의 이 금기의 실험에 가담했다는 걸 말이다.

아젠은 굳어진 표정으로 이클리트를 응시했다.

지난날, 어린 이클리트를 묶어두고 그 앞에 있었던 것처럼, 또다시 반복된 상황.

하지만 그 역시 원치 않았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젠은 자신도 모르게 체통도 잊은 채, 비명 지르듯 외쳤다.


“당신이 백작가에서 태양을 뜨게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이렇게 될 거라면, 애초에 그 아이를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이클리트는 아젠이 아멜리아를 언급하자, 피가 식었지만, 꾹 참고서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그대도 이 실험과 관련 있다면, 에드조프의 유모. 키르케,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아는 건가?”

키르케라는 이름에 아젠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곧장 감추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 찰나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 의문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이클리트는 기억해냈다.
 


‘네가 진짜였다면, 내 독으로 무기를 만들었을 텐데.’

  
자신을 무기로 만들려고 했으나, 만들지 못했다고 읊조렸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키르케, 그 여자였다.

게다가 저렇게 숨기려고 하는 아젠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여자도 분명 관련 있는 것이다.’

이클리트가 알고 싶은 것은 황제와 키르케가 대체 무슨 원한으로 얽혀 있는지였다.

아젠, 이자는 알 것 같았다.

그때, 아젠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시간의 숲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 황제 폐하께서 수인을 통해 반인반수를 낳았지요. 그렇다면 그 여자 수인을 어디서 데려왔을까요?”

“······키르케, 그 여자는 아닐 테고.”

“그 여자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클리트는 황궁에 사는 뱀 두 마리를 떠올렸다.


‘그 말이, 그 뜻이었나? 그럼 나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황제가 자신을 낳은 수인을 살려뒀을 리가 없을 텐데······.

아젠은 혼란스러워하는 이클리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여동생이 낳은 아이는 대공 전하가 아닙니다. 대공 전하, 당신의 힘은 뱀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젠의 말에 이클리트는 그제야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검은 독수리의 일족이다.

아젠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뱀의 일족과 맺어졌다면, 반인반수도 뱀이어야 합니다.”

“그럼, 나와 같은 존재가 또 있단 말인가?”

설마 이 황궁에 있는 건가?

그래서 황궁에 뱀 두 마리가 산다고 했던 거야?

이클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 뱀의 일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누구······.”

하지만 아젠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이클리트에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그때와 같은 끔찍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단지 마나를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빌어먹을 마나 때문에 난 가장 소중한 걸 잃었었으니까! 그런데 또 그리 둘 수는 없습니다.”

“아젠, 백작?”

“그러니 더는 그 아이와 엮이지 마십시오. 이 황실도, 그 여자도, 전부 다 미쳤으니까!”

아젠은 단지 이 말을 하고자 여기 왔을 뿐,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비밀로 인해 위험해지는 건 사절이었다.

그렇게 그가 곧장 지하실을 빠져나가자, 이클리트가 외쳤다.


“잠깐 기다려! 아젠 백작! 백작!”

그때, 목소리를 높이던 이클리트가 움직임을 멈추고서 있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면서, 낯익은 체향이 그의 심장을 움직였다.


“······아멜리아······.”

그녀가 이 황궁에 온 것이다.

***

아멜리아는 제대로 피오레의 공작으로서 의복을 갖춰 입고, 칼렌과 다른 티어들과 함께 여름궁에 서 있었다.

하지만 서 있는 내내, 황실근위대의 눈초리와 태도엔 서늘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태양의 제단의 일이 피오레와 관련 없다고 황제가 말했음에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려 다섯 공작가의 피오레의 공작이 황궁을 찾았는데, 마치 적군을 대하는 태도라니.

티어들은 몹시 불쾌했으나, 아멜리아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허리를 곧추세운 채 공작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어떻게든 황궁으로 잠입해서 이클리트를 만나려고 했다.

분명 그 지하 미궁에 갇혀 있을 테고, 그곳이 어디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때마침, 세스가가 의식을 되찾으면서 아멜리아를 찾았다.

황제로서는 세스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솔라 제국의 문제로 황자가 다쳤으니, 프리메는 곧장 격분했고, 그 격분을 잠재우기 위해선 세스가의 태도가 중요했다.


‘아마도 친분이 있는 날 이용해서 중재하려고 하겠지.’

아멜리아는 더없이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야. 타이밍도 좋았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서, 여름궁 내부를 떠올렸다.


‘일단 들어가서 세스가 황자 전하를 알현한 뒤, 황자 전하께서 시간을 끌어주면 몰래 빠져나와서 지하실로 가야 해.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공 전하를 데리고 나와야만 해.’

대공 전하가 움직이지 않으면, 클로에 황후 폐하에 대한 진실을 말해서라도 설득해야만 했다.

그때, 마침내 여름궁의 정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허락이 떨어졌다.

아멜리아가 곧장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갑자기 근위대 단장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 모습에 칼렌이 사나운 표정으로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하지만 단장은 칼렌의 말을 무시하고서,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들어가시기 전, 몸수색하겠습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몸수색이라니. 공작 각하께 지금 무슨 예법에 어긋난 행동이란 말입니까!”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단장은 냉랭한 어조로 말하면서, 허리에 찬 칼집을 덜컹거리며 위협적으로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럼, 협조해주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단장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아멜리아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하지만 공작 각하······.”

그때, 아멜리아가 직접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드레스 춤을 붙잡고서 말을 이었다.


“이 드레스도 들어 올리길 바라는 건가?”

기겁할 만한 말에 단장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공작 각하!”

“어째서? 몸수색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내가 만약 무기를 숨겼다면, 이 풍성한 드레스 아래밖에 더 있겠는가?”

아멜리아는 드레스 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섬뜩한 협박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아무것도 없다면. 감히 귀족을. 그것도 공작을 추행하려고 했으니, 그 죄를 물어도 되겠지?”

단장의 표정은 더더욱 파랗게 굳어졌다.

공작을 추행이라니! 이는 곧장 목이 달아날 일이었다.


“아닙니다, 공작 각하.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충분······.”

하지만 아멜리아는 선득한 표정으로 서서히 드레스 춤을 올리기 시작했다.


“충분하다니. 감히 공작의 몸수색을 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의 신념인데, 제대로 지켜야지. 그리고 그 신념 끝에 받아야 할 결과도 원칙대로 다 받아야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느새 단장은 아멜리아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서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그런 단장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여름궁에 방문한 귀빈인가, 아니면 그대의 적인가?”

“고, 공작 각하······.”

“그대 눈앞에 나는 다섯 공작가의 공작인가, 아니면 그대가 그 칼로 해쳐야 할 적인가?”

팽팽하게 옥죄는 분위기 앞에, 아멜리아의 뒤로 서 있던 티어들조차도 숨소리 하나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허락을 맡고, 세스가 황자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그 칼로 위협하며, 내게 제대로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건 대체 어떤 예법이지? 아니. 그 이전에 대체 단장의 눈앞에 있는 나는 누구지?”

아멜리아는 한 치의 자비 따윈 보이지 않고 더욱 거세게 단장을 몰아붙였다.


“다시 한번 묻겠다. 그대 눈앞에 나는 피오레 공작가의 공작인가, 아니면 그대의 적인가?”

 

 
칼렌과 티어들이 아멜리아의 양옆으로 움직이며, 단장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단장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선, 곧장 칼집을 내려놓고서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워낙 시기가 시기인지라, 공작 각하께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아멜리아는 용서라는 말을 담지 않은 채, 그대로 단장을 지나쳐서 걸음을 옮겼다.

살벌하기까지 한 위압감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이 순간, 누구에게도 쉽게 보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피오레 공작가의 명예가 흔들렸다.

여기서 자칫 자신이 빈틈을 보인다면, 위험해지는 건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피오레의 가주로서 위엄을 지켜야 해. 이제부터 피오레 이름 아래 있는 모두를 지켜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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