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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변함없이, 한 가족 (156/199)


156화. 변함없이, 한 가족
2022.07.01.


덜컹거리는 마차 안, 오한이 서릴 만큼 차가운 뱀의 비늘이 아젠의 숨통을 죄었고, 아젠은 부들거리는 눈빛으로 제 앞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키르케를 노려보았다.


“이게 감히 뭐 하는 짓이지?”

키르케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친 채, 말했다.


“백작님이야말로 뭐 하시는 건가요? 우리 사이에 이러면 곤란한데.”

“윽!”

아젠이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뱀이 더욱 아젠의 몸을 휘감았다.

어느새 뱀의 머리가 아젠의 턱밑까지 고개를 쳐들고서 끈적한 침을 뚝뚝 흘리며 송곳니를 보였다.

금방이라도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자꾸 움직이지 마세요, 백작님. 그 송곳니에 살결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바로 심장이 멎는답니다. 아주 맹독을 가진 아가예요. 지금은 죽일 생각 없는데, 백작님 실수로 죽어버리면 너무 허망하잖아요?”

“너 같은 년이, 감히 백작을 농락하는 것이냐.”

“체자렛 백작가와 우린 이제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나? 괜히 쓸데없는 소리 입 밖으로 꺼내서, 한 가족끼리 다치게 하지 말자고요.”

“네년이 무슨!”

“제가 백작님의 따님을 얼마나 예뻐하면서 보호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그게, 무슨 말이지?”

키득키득 웃던 키르케의 입매가 순식간에 섬뜩해지면서, 뱀보다 더 뱀 같은 동공을 번뜩였다.


“레이디 메사리나. 그 어여쁜 영애가 위험했을 때, 제가 많은 도움을 줬답니다.”

아젠은 키르케의 말에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도움이라니…….”

순간, 아젠의 머릿속으로 메사리나가 무사히 중앙청을 빠져나왔던 일이 생각났다.

이후, 반인반수에게 당할 뻔한 상단을 구해주고 영웅이 되었지.

뭔가 딱딱 들어맞는 타이밍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설마 하던 생각이, 키르케의 입술 끝에서 명확해지고 말았다.


“레이디 메사리나가 신성회 신관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아주 곤란했었죠. 게다가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 피오레 공작 각하의 추문 사건까지. 제가 그 일을 덮어주고, 사교계에서의 명성 또한 예쁘게 지켜주려고 반인반수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니, 체자렛 백작가도 반인반수와 얽혀 있는 건 피할 수 없을 거예요.”

아젠은 메사리나의 경솔함에 치를 떨었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어떻게 그런 괴물을 이용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 모녀와 얽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태생도 모르는 계집을 멋대로 집 안으로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백작님, 조용히 그 입 다물고 계세요.”

키르케는 아젠을 향해 한껏 상체를 숙이고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와 눈동자를 마주했다.


“당신이 아는 걸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체자렛 백작가도 피해갈 수 없을 테니까. 사실 우린, 꽤 오래전부터 같은 배를 타고 있었잖아요.”

처음엔 겁에 질려 했던 아젠도 어느새 키르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릴수록, 또 다른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이렇게 보니 더더욱 닮았군.”

아젠의 한마디에 키르케의 미간이 좁혀졌다.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수인의 힘을 보였을 때, 뱀이 아니라는 걸 보고 확신할 수 있었지. 내 입 하나 막는다고 끝까지 비밀일 수 있을까?”

키르케는 다시금 길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수 없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좀 더. 좀 더 무르익은 뒤 밝혀져야 해요. 그래야 슬픔으로 안 끝나. 아주 고통스럽게. 더 고통스럽게 아스란이 몰락해야 하니까!”

휘몰아치는 광기와 증오 앞에 아젠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쭉, 한 가족으로 입 닥치고 있어. 어차피 그 실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도 체자렛은 끝이야!”

키르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젠을 죄고 있던 뱀도 스르르 똬리를 풀고서 키르케에게 휘감겼다.


“곧 다시 보도록 하죠, 백작님.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뱀과 키르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젠은 손목에 남아 있는 뱀이 휘감은 붉은 흔적을 문지르며 단호한 표정을 띠었다.

그땐 저 협박이 너무 무서웠고, 지켜야할 것이 있었지만 이젠 다르다.

설령 백작가를 잃는다고 해도.


“어차피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지.”

오히려 체자렛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지은 모든 죄의 죗값을 이제라도 치려야 해.’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잃는 건, 그만 끝내야 하니까.

***

저택으로 돌아온 아멜리아는 곧장 마미와 케이트를 불렀다.

마미와 케이트는 클리오 대공에 대한 일이 몹시 충격이었으나, 곧장 받아들이고서 피오레의 사람으로서 의연함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흔들리면, 다른 이들도 불안해하기에.

그렇게 되면 피오레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물론 마미는 괜찮은 모습으로 서 있는 아멜리아가 걱정이었다.


“나는 지금 바로 체자렛 백작가로 갈 거야.”

마미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체자렛 백작가를 지금 바로 가신다고요?”

“준비하겠습니다. 여긴 걱정 마십시오.”

놀란 마미와 달리, 케이트는 곧장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백작가에서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른 새벽에 칼렌 경과 다른 블러드 아이리스들을 전부 소집해줘.”

“예, 공작 각하.”

백작가에 다녀와서, 그들과 아이냑을 처형 전까지 구출할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다른 루베르는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도와준다고 했으니, 일단 그쪽에 맡기고.

피오레 공작령 루베르도 일단 피오레 이름 아래 보호될 거다.


‘그리고 이제, 이사나 경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해.’

칼렌을 피오레 공작령으로 보내지 못하고 대기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더는 숨길 수 없었으니까.

이사나가 떠났다고, 카마리가 직접 말했다.
 


‘루베르 가주로서 떠났고, 다시 그 이름으로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아마 다음에 만나게 되면 적이 될 수도 있겠죠.’


‘카마리 경…….’


‘걱정 마십시오. 이제 망설이지 않습니다. 저는 가주님과 대공 전하를 끝까지 지킬 겁니다. 카힐로 단장님이 저를 구해주신 이유이니 말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와 달리 카마리의 표정이 그녀답지 않게 너무 슬퍼 보여서.

정말로 그가 떠났다는 게 실감 났다.

비록, 그의 복수의 대상에 대공 전하와 수인이 얽혀 있긴 했지만.

루베르가 위험해진 이상, 어쩌면 그가 루베르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기에.

더는 이사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서둘러 줘, 케이트.”

“알겠습니다.”

케이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걸음을 뒤로 돌렸다.


“마미, 넌 내 투알레트를 도와줄래? 이제 피오레 공작으로서 어디서나 날 지켜볼 테니까, 빈틈을 보이면 안 돼.”

“가주님. 대공 전하께선…….”

마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고, 그런 마미를 보면서 아멜리아는 눈매가 풀어졌다.


“내가 직접 너에게 말해주지 못하고, 남들에게 듣게 해서 미안해.”

“전 괜찮아요. 가장 중요한 가주님이 이미 알고 계셨고, 그런데도 대공 전하를 택하신 거잖아요. 저도 제가 본 게 더 중요해요.”

“뭘 봤는데?”

“대공 전하와 가주님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시던 그 모습. 그 행복했던 모습이요.”

“마미…….”

“저는 항상 가주님이 행복해지길 바랐어요. 대공 전하의 곁에서 가주님은 제가 본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해 보였고요. 그러니 대공 전하는 제게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얼른 다시 가주님의 곁으로 돌아오시길 바라요. 그걸 위해서, 가주님도 지금 괜찮으신 거잖아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마미는 다 알고 이해해준다.

그만큼 마미 역시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마미를 꼭 끌어안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슬픔과 외로움이, 마미의 다독거림 앞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맞아. 나는 진짜 괜찮아.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지키고 싶어. 예전과는 내가 다르잖아? 그분을 지킬 힘도 있어.”

“가주님…….”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그분만 지킬 수 없어. 피오레 공작으로서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어. 하나하나 지키면서, 그분이 돌아올 곳을 만들어야지. 내가 그분 덕분에 행복했듯, 그분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처음엔, 폐하의 손에서 반드시 대공 전하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바람결에 들려준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마음을 바꿨다.
 


‘나는 이제 어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황제에게 그저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아이냑의 처형 날짜를 자신에게 알려준 건, 그분도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그들을 지키고 싶은 거니까.


‘예전처럼 황제에게 상처만 받고 계시지 않아.’

어쩌면 상처를 치유하고, 과거를 끊어내기 위해선 대공 전하가 스스로 황제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그분을 믿어. 그래서 더더욱, 그분을 황제로 만들 거야.’

태양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비추는 세상.

수인과 루베르와 인간이 하나 될 그 세상을 위해, 그분은 반드시 황제가 되어야 한다.


“나도 이제 어리지만은 않으니까.”

예전과 다른 마음으로.

그분을 도울 수 있길 바라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그럼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잘 부탁해, 마미.”

“맡겨주세요!”

 

 

***

황제의 전언은 순식간에 소식지로 제국 곳곳에 퍼졌다.


“메사리나, 메사리나!”

후지아는 희열에 찬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메사리나의 침실로 들어왔다.


“세상에! 소식지 봤니? 괴물이었어. 클리오 대공이 반인반수, 짐승, 괴물이었다고!”

기뻐하는 후지아와 달리 메사리나의 표정은 애매했다.

물론, 그녀도 기뻤다.

키르케에게 말한 이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답답하고 초조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분명 클리오 대공이 반인반수가 맞는데.

이게 밝혀지기만 하면 아멜리아는 끝장인데.

아멜리아가 황명으로 평화 회담을 맡고, 계속 승승장구하는 모습만 보이다니.

속이 뒤틀리려던 찰나, 회담에서 폭발 사건과 함께 아멜리아도 나락으로 추락한다고 생각했다.


“후후후후. 아멜리아, 그 계집의 낯빛이 얼마나 뒤집혔을까. 그러게 주제도 모르고 나대더니. 괴물에게 속아서 결혼하고, 그 더러운 짐승과 뒹굴기까지 했으니! 사교계에서 그 이름이 얼마나 우습게 됐냐는 말이다. 응? 메사리나?”

하지만 메사리나의 귀에 후지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야. 작위까지 박탈당하고, 엉망으로 망가져서 솔라에서 추방당해야지. 그런데 뭐? 그저 속았다고?”

속았다니.

속은 게 아니다.

이미 클리오 대공이 괴물인 걸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 괴물의 힘을 그 계집이 이용한 건데.

대체 왜!

메사리나는 뭔가 자신이 생각했던 식으로 아멜리아가 추락하지 않자, 초조했다.


‘폐하께서 감싸신 건가? 설마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나서신 건 아니겠지?’

클리오 대공은 황궁에 갇혀 있다.

지금 아멜리아의 곁엔 아무도 없는데.

설마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건 아니겠지?


‘그 계집이 이제 와 다시 대공 전하에게 가 버리면…….’

불안한 생각에 메사리나는 입술이 짓이길 정도로 깨물고서 숨을 헐떡였다.

후지아는 불안정한 메사리나의 모습에 당황했다.


“메사리나? 왜 그러니? 이렇게 좋은 날 왜 이러는 거야? 응?”

“이걸로는 안 돼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어떻게든 그 괴물과 아멜리아가 같이 추락해야 한다고!”

그때, 노크와 함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백작님이 황궁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오! 세상에. 드디어 오셨구나. 황궁에 너무 오래 계셔서 걱정했는데. 메사리나, 일단 정신 차려. 아무리 기뻐도,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선 안 돼.”

메사리나는 아젠이 돌아왔다는 말에 일단 표정을 바로 했다.


‘그래. 일단 아버지에게서는 완전히 멀어졌겠지. 이참에 체자렛 후계자의 자리를 더 확실히 손에 넣어야 해.’

계속 황궁에 계셨으니, 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고 말이다.
 

***

후지아와 메사리나는 곧장 홀로 달려가서 아젠을 반겼다.


“오셨어요, 여보! 이번엔 너무 늦으셨네요. 걱정 많이 했어요. 그 소식도 들으셨죠? 저도 얼마나 놀라고 황망한지…….”

후지아가 아젠의 팔을 안으려고 했으나, 아젠이 거칠게 후지아를 쳐냈다.


“여보?”

아젠은 후지아를 지나쳐서는 메사리나에게 다가갔다.

메사리나는 그런 아젠의 모습에 떨리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돌아오셨어요, 아버지. 언니에 대한 일은 저도 너무 놀라서…….”

 
짝-!

순간, 날카로운 파음과 함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여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젠에게 뺨을 맞은 메사리나는 마구 흔들리는 눈빛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아젠은 냉랭한 눈빛으로 메사리나를 노려보며 그보다 더 싸늘한 말을 씹어 내뱉었다.


“너 같은 걸 집안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닌 너를 백작가 영애로 만들어줬더니. 가문을 이런 식으로 기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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