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평범한 부부
(183/199)
183화. 평범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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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평범한 부부
2022.10.03.
루베르가 반인반수를 전부 우리에 넣어서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아직 풀어줄 수는 없었지만, 철창에 갇혀 있는 모습보다는 반인반수의 표정과 감정이 안정적으로 보였다.
일단 작전을 무사히 마친 칼렌은 카마리와 함께 무너진 공방 앞으로 다가왔다.
그곳엔 이클리트와 아멜리아가 카힐로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베르를 대표해서 라니가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곳에서 반인반수들을 보살피고 있을게요. 이쪽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 라니.”
아멜리아는 모여 있는 이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작전은 무사히 마쳤고, 다들 고생했어요. 우리가 최종적으로 막아야 했던 키르케는.”
아멜리아가 키르케를 입에 담자, 모두의 시선에 긴장이 서렸다.
그녀 역시 깊은숨을 삼키며, 짧게 읊조렸다.
“키르케는 죽었습니다. 바스티얀 대공, 아니. 에드조프가 죽인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보다 더 엄청난 사실에 다들 헛숨을 삼켰다.
“에드조프와 키르케, 두 사람은 같은 편이 아니었던 겁니까?”
칼렌이 의아한 듯 묻자, 아멜리아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키르케는 에드조프를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겨우 진정한 아이의 말에 의하면, 자신에게 있던 독을 키르케의 뱀이 가져갔다고 했다.
이클리트는 에드조프가 키르케를 죽인 이유가 어쩌면 그 독을 가져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뱀의 일족의 독이 있어야, 반인반수를 밀주로 조종할 수 있으니까.
‘키르케는 자신의 모든 힘을 에드조프에게 넘긴 거야.’
에드조프에겐 이미 반인반수의 무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건.
‘세인트. 키르케가 분명 세인트한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
이걸 알아내기 위해선 결국, 최후의 장소로 가야만 했다.
“이제 우리는 시간의 숲으로 가야 해요.”
아멜리아의 말을 듣고 있던 루베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시간의 숲은 우리 루베르의 땅에 있습니다.”
이클리트는 북쪽, 루베르를 떠올렸다.
“배를 타고 갈 시간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마법 도구를 사용해서 워프했을 테니까요.”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워프를 하는 마법 도구라니.
그런 걸 바로 구하기는 아무리 그녀라도 쉽지 않았다.
“가주님, 저희가 저희의 힘을 피오레를 위해 쓰겠다고 했잖아요.”
라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워프를 할 수 있는 마법 도구도…….”
“혹시 몰라서 만들고 있던 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들기 몹시 까다로운 만큼, 하루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루베르가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아멜리아는 환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하루라니! 너무너무 고마워!”
“아닙니다, 가주님. 이것도 우리 루베르를 위한 일인걸요.”
“부디 무사히 시간의 숲으로 가셔서 반드시.”
루베르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의지가 담긴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솔라에서 평범한 태양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특별한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내일을 맞이하게 해달라는 이들의 소망이 아멜리아에게 깊숙이 와닿았다.
이클리트 역시 끊임없이 고민하고, 흔들렸던 무언가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나설 수 있는지.
아니, 나서야만 하는지.
이클리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멜리아를 향했다.
‘저 웃음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때, 카힐로가 굳어진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가주님, 대공 전하. 저는 아이를 데리고 포르티셰 공작가로 돌아가겠습니다.”
“카힐로 경이 시간의 숲으로 같이 안 간다고요?”
아멜리아는 당황했으나, 이클리트는 어쩐지 침착했다.
“예. 저는 대공 전하와 가주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도록, 기다리겠습니다.”
카힐로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보며 속삭였다.
“그러니 꼭 돌아오십시오.”
뭔가 비장한 그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내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클리트를 살피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
카힐로는 카마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서, 먼저 걸음을 돌렸다.
사실, 그의 걸음은 무거웠다.
그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이건 이클리트의 부탁이자 명령이었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돌아오실 겁니다. 제가 끝까지 대공 전하의 곁을 지킬 테니!’
‘아니, 카힐로 경. 그대는 이곳에 남아.’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대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고자 해.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반드시 그 아이를 지켜야 해.’
‘대공 전하…….’
‘황제의 피가 섞인 황녀다. 내 말 무슨 뜻인지, 그대라면 알겠지.’
황제도, 황위 계승자도 모두 시간의 숲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클리트는 카힐로에게 어쩌면 살아남은 마지막 황위 계승자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마치, 지난날 전 카르티아 공작 각하의 부탁처럼.
하지만 카힐로는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돌아오실 겁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예전과 다르시니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그는 그저 믿고, 그들을 기다릴 뿐이었다.
***
칼렌과 카마리도 시간의 숲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정비를 위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루베르와 남겨진 아멜리아는 루베르를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내가 뭔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어.”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멜리아의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제자리에서 주춤했다.
이클리트는 말없이 그런 그녀의 뒤로 다가가 몸을 기댈 수 있게 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그녀의 몸이 약해졌다는 것을 들킬 수 없었기에.
아멜리아도 그런 이클리트의 배려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요.”
“그러니 쉬셔야 합니다.”
이클리트는 길게 말하지 않은 채, 라니에게 물었다.
“근처에 쉴 곳이 있을까?”
라니는 피곤해 보이는 아멜리아를 염려하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마을이 하나 있어요. 그곳 여관에서 좀 쉬고 계세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자신만 쉰다는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은 가주님이 하실 거 없으세요. 시간의 숲에 가시면 못 쉴 텐데, 쉴 수 있을 때 쉬세요. 아침에 데리러 갈게요.”
“그럼 부탁한다.”
아멜리아 대신 이클리트가 대답하고서,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음을 돌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가 망설이지 못하게 곧장 날아서 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들 고생했는데…….”
“그대가 쓰러지면 저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겁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대공 전하…….”
“너무 무리하게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말아요.”
다정하게 꾸짖는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조금만 쉴게요.”
사실 현기증도 현기증이지만, 이상하게 몸이 너무 무겁고, 졸렸다.
***
여관으로 가기 전,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엉망이 된 서로의 옷을 갈아입었다.
귀족처럼 보이면 시끄러운 것도 시끄러운 거지만, 일단 아멜리아가 황제의 명으로 수배가 떨어졌기에.
두 사람은 마치 촌부와 농부처럼 변복했다.
아멜리아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머리 두건 아래로 숨겼고, 앞치마가 달린 드레스를 입었다.
이클리트 역시 범상치 않은 얼굴을 가리고자,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허름한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녀는 살짝 삐뚤어진 이클리트의 모자를 고쳐주다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어쩐지 엄청나게 잘 어울리네요.”
“오히려 이렇게 입고 있는 게 더 편합니다.”
“하긴. 대공 전하의 첫 모습이랑 비슷해요. 나는 좀 이상한가?”
“살짝 곤란하긴 하네요.”
“네?”
“뭘 입어도 너무 예쁘니까.”
“그건 대공 전하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입어도 너무 멋있으니까. 아예 두건으로 얼굴을 감춰야 하나?”
아멜리아는 능청스럽게 웃고서는 살포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마주 잡았다.
그리고 뜻밖의 속삭임이 그녀의 심장을 두드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평범한 부부 같네요. 정말로 평범한, 부부.”
나직이 번지는 부부라는 말에 아멜리아는 눈가가 자꾸만 뜨거워졌다.
다시 돌아온 이후, 그가 한 번도 부인이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살짝 신경 쓰였었는데.
게다가 그들에게 지금 평범한 부부라는 말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절실히 원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네요. 너무 좋네요. 평범한, 부부.”
이클리트도 아멜리아와 같은 감정을 느낀 듯, 아릿하게 치미는 숨을 겨우 꾹 눌렀다.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는 함께 다정하게 여관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변복이 성공했는지,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이클리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인에게 짧게 말했다.
“방이 있는가?”
주인은 이클리트 옆에 꼭 붙어 있는 아멜리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하나면 되겠소?”
“하나면 된다. 그리고 내 아내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치료사도 부탁하지.”
이클리트는 주인에게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챙겨주었다.
주인은 겉보기와 달리 주머니가 꽤 두둑한 모습에 미소를 참지 못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오. 금방 불러다 드리리다.”
아멜리아는 치료사라는 말에 난색을 보였다.
“그냥 쉬면 되는데…….”
“이래야 내 마음이 안심됩니다. 내 투정, 조금만 들어줘요.”
그의 입에서 나온 투정이라는 낯선 단어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대공 전하께서 투정이라니. 안 들어줄 수 없게 하시네요.”
“이렇게 하면 잘 들어줄 것 같았습니다.”
또 한 번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아멜리아는 기분이 간질간질해져서는 자꾸만 감추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
“흐으으음…… 응?”
아멜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이다가 흠칫 놀라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클리트가 그녀를 토닥거리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더 자도 돼요.”
“내가 잤어요?”
창가를 바라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 있었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푹 자버리다니!
“푹 자서 다행입니다. 치료사는 다녀갔어요.”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더 놀랐다.
치료사가 온 줄도 몰랐었으니까.
“이렇게 잘 줄 몰랐는데. 어디 많이 안 좋다고 하던가요?”
아멜리아가 긴장해서 묻자, 이클리트는 살짝 떨리는 입꼬리를 숨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몸이 받아들이는 중이라, 많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했습니다.”
하긴, 이렇게 긴장의 연속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지.
“그런 거라면 다행이에요. 봐요. 나 괜찮다고 했잖아.”
“일어났으면 뭘 좀 먹을까요?”
이클리트는 준비해둔 식사를 권했다.
하지만 어쩐지 아멜리아는 영 입맛이 없었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속이 좀 안 좋은데.”
“그래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이클리트는 완강한 어조로 직접 수프를 떠주었다.
“너무 안 먹어도 안 좋다고 했습니다. 아니, 앞으로는 더 잘 먹어야 합니다. 안 그럼 더 피곤해질 테니까.”
목소리엔 힘이 들어갔는데, 눈빛은 애원하고 있었다.
갑자기 저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충견 모드라니!
“알았어요. 먹을게요. 그런 표정 하면 안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몇 번이고 수프를 받아먹었지만, 결국 끝까지 먹을 수는 없었다.
예전엔 음식 먹는 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대공 전하께서 뭘 감추고 계신 걸까? 내 몸이 너무 많이 안 좋아서? 나한테 남은 시간이 이렇게도 없는 걸까.’
아멜리아는 어쩐지 조금, 무섭기도 했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본능적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서 그대로 그의 입술을 살포시 머금었다.
“이거.”
그녀는 어느새 그에게 한껏 몸을 기댄 채, 조금 더 깊이 그의 입술을 훑어 내리며 아찔한 숨을 내쉬었다.
“이게,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