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184/199)


184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2022.10.07.


몇 번이고, 그의 입술 끝을 물었다가 떼면서 그녀의 눈망울이 열기를 머금고서 수줍게 흔들렸다.

아멜리아는 자꾸만 불확실한 앞날을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끝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껏, 사랑만 하고 싶었다.

그녀가 전해주는 이 커다란 사랑 앞에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면서,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더 피곤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았는데…….”

그가 슬쩍 고개를 들고서, 살짝 부어오른 아멜리아의 입술을 깊이 머금으며 짙어진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그대 앞에선 항상 아무것도 참을 수가 없게 돼.”

이성과 갈망이 마구 교차하면서, 끊임없이 파고드는 입술이 점점 더 눅진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한가지의 감정으로 덜컥, 걸려들었다.


“어쩔 수가 없게 돼.”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손길과 몸짓이 조심스러웠다.

심지어 조금은 경직된 것도 같았지만, 아멜리아는 그 이상한 점을 당장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가 주는 온기에 취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윗옷을 슬쩍 끌어내려선,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제비꽃을 똑바로 응시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숨기려고만 했던 아멜리아도 그의 시선을 따라서 자신의 남은 시간을 제대로 마주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함께할 방법을 찾고 싶어요.”

“대공 전하…….”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고 싶어.”

아멜리아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벅차올라서, 그게 가능하고 안 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는 그녀의 제비꽃을 쓰다듬다가,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아멜리아는 절로 몸을 들썩였다.

낯익은 온기는 항상 그녀에게 닿아 열병을 앓게 한다.

애타던 속삭임이 점점 절박하고 간절해지면서, 아멜리아는 이 간질거리고 묘한 감정에 숨이 타박타박 타들어 가며, 심장이 자꾸만 아릿해졌다.

그녀는 어느새 손을 뻗어서는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 하나하나를 마치 새기듯 더듬었다.

이클리트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깊이 담았다.

눈꺼풀의 깜빡임도.

숨을 쉴 때마다 잘게 움직이는 입술도.

살포시 휘늘어진 눈동자에 비치는 모습까지 전부 다.

그러다가 꾹꾹 누르고 있던 그의 마음조차 조금 새어 나왔다.


“그대의 곁에, 내가 더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멜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멈칫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의미로 마음이 설렜다.


“괜한 생각 하셨네요. 언제나 저는 당신이 필요한데. 그런 생각 하면서 참지 마요.”

단 한 번도, 이렇게 스스로 그의 속마음을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말해준다는 것이, 아멜리아로서는 몹시 기뻤다.


“나만 참는 게 아니라, 아멜리아 그대도 언제부터인가 참고 있어.”

“네?”

사실, 이클리트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였다.


“공작이 되고, 그 의무를 알게 되면서. 당신 역시 여러 가지 감추는 법을 알아버렸어. 사실 나는 그게 싫어요.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대공 전하도 많이 힘들었나요?”

이클리트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금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러지 마. 내가 아니라면 남에게라도 보여줘요. 그마저도 못하면, 진짜 너무 아플 테니.”

‘내가 아닌 남에게도’라는 말이 뭔가 섬뜩하게 와닿아서, 아멜리아는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그런데 왜 나를 예전처럼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거예요?”

이클리트는 그 말에 눈빛이 나직이 가라앉았다.


“우리 이혼한 거, 그거 아직 유효한 건가요?”

말을 할수록 불안해지는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고서, 이클리트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부인.”

다독이듯 다시 불렀으나, 아멜리아는 불안감이 진정되지 않았다.

입을 맞추면서, 오히려 이클리트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있었다.

처음엔 깨닫지 못했던 이상한 점을 하나하나 눈치채면서, 아까와는 다르게 그녀의 심장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여전히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밤새 서로에게 닿아 있었으나, 묘하게 채워지지 못하는 갈증 하나에 서로가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하지만 그 부족함을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 채, 이젠 깨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아멜리아는 먼저 몸을 일으켜 세워서는, 벗어둔 드레스의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멜리아?”

이클리트가 곧장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조금 차가워진 그녀의 몸 위로 로브를 씌워주었다.


“먼저 씻도록 해요. 안 그러면 감기 걸릴 겁니다.”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주고 싶은 거라니…….”

“이거.”

아멜리아가 그의 손바닥에 쥐여준 것은 바로 그녀의 필체가 담긴 쪽지였다.


“이건…….”

“제대로 대공 전하의 수호신이 되고 싶으니까.”

수호신이 된 사람이 그를 위해 무언가를 쓰면, 그것이 꼭 한번은 그 사람을 지켜준다는 풍습.

이클리트가 조심스럽게 쪽지를 펼치자, 눈시울이 붉게 흔들렸다.

-이클리트, 당신을 정말로 많이 사랑해요.-
 


“나는 언제나, 언제나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지만, 아멜리아는 그를 믿고, 그를 지키고 싶었다.

왜냐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당신이 내게 가장 소중하니까.”

아멜리아가 예전처럼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클리트는 이젠 너무 당연하게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이 찬란한 빛 앞에 자연스럽게 입매가 풀어졌다.

한때는 그녀의 편지가 그의 내일을 지켜주었고, 이젠 이 쪽지가 그의 전부를 지켜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어둠을 지운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이제 너무 당연해져서.

지난 시간을 대체 어떻게 살아냈는지, 점점 기억이 희미해졌다.

아니. 이제 이 빛과 웃음이 없는 곳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시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이클리트는 쪽지를 소중하게 움켜쥔 채, 아멜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이런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없기에.


“사랑해요.”

그를 끊임없이 살고 싶게 하는, 이 넘치는 감정을.


“나는 더 사랑해요.”

사용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그댈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태어난 이유가 그게 전부라면, 충분히 행복했다.

아니, 그거면 된 것 같았다.

***

아멜리아와 이클리트, 카마리와 칼렌을 비롯해 다른 티어들까지.

전부 루베르가 만든 마법 도구의 필드 안에 섰다.

라니는 걱정 어린 표정을 겨우 지우며, 아멜리아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실 거예요. 이쪽은 절대로 걱정하지 마시고요.”

“걱정 안 해. 다들 정말 고마워. 그럼, 잘 다녀올게.”

잘 다녀오겠다는 말.

라니는 저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을 이번만큼은 간절히 붙들었다.

마침내 필드가 번쩍이면서, 이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손을 꼭 잡고서 긴장감을 조금은 내려놓고자 했다.

마침내, 눈앞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던 빛이 사라지면서 다른 의미의 불빛이 그들 앞에 드리워졌다.

북쪽 루베르의 땅.

지난번처럼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반겨줘야 했는데.

들이켜는 공기에 화염과 열기로 가득했다.

눈앞에 펼쳐진 이곳은 이미 폭약과 폭음이 시야를 깨부수고 있는 전쟁터였다.

아멜리아는 일순, 잡고 있던 이클리트의 손을 놓칠 뻔했다.


“벌써. 어떻게…….”

그 순간 폭약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고, 이클리트가 곧장 바람으로 막아내면서 외쳤다.


“여기 계속 있는 건 위험합니다. 일단 움직여야 해요. 칼렌 경!”

잠시 넋을 놓았던 칼렌도 곧장 다른 티어들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서 주변을 엄호했다.


“대공 전하, 가주님. 이쪽으로.”

카마리도 검을 빼 들고서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세이버를 든 기사와 부딪혔다.


“클리오 대공 전하, 피오레 공작 각하.”

아멜리아는 그가 포르티셰 공작가 기사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포르티셰 공은 벌써 도착하신 건가?”

기사는 주위를 살피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사는 이들을 알렉드라가 있는 임시 거처로 데려갔다.

알렉드라를 본 아멜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이미 한쪽 팔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포르티셰 공. 괜찮으신가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빨리 오셨군요.”

알렉드라는 이클리트를 응시했고, 이클리트는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예상보다 아스란 황제 폐하께서 빠르게 이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스란 황제 폐하보다 프리메가 더 빨랐던 거지요.”

프리메라는 말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프리메가 먼저 기습했습니다. 솔라에 열쇠가 있다는 걸, 프리메가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세스가 황자 전하에게서 정보가 샌 것인가?”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스가 황자께서는 프리메 쪽으로 무사히 넘어가신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막을 새도 없이 프리메와 솔라가 격돌하고 있습니다.”

격돌이라는 말이 아멜리아의 심장으로 무섭게 떨어졌다.

그녀는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프리메와 솔라의 목표는 대공 전하였다.

특히나 열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아스란은 더더욱 전쟁을 위해 몸집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루베르를 노예처럼 부리며, 진지를 설치하고 전쟁의 전초전을 벌이고 계십니다.”

“포르티셰 공께서는 폐하를 만나셨나요?”

아멜리아의 말에 알렉드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간언은 힘들 것 같습니다. 숲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가 점점 격해지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막을 수 있는 단계는 넘어선 듯합니다.”

“그럼…….”

아멜리아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알렉드라가 대신 이었다.


“전쟁입니다. 막을 수 없다면, 솔라가 이겨야 합니다. 피오레 공도 그걸 알고 준비해야 할 것이오. 우리는 솔라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으니.”

전쟁이라는 말에 아멜리아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솔라를 지켜야 한다면 더더욱 전쟁은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솔라가 이긴다면, 폐하께서는 어떻게든 시간의 숲을 차지하려고 할 텐데. 이 숲은,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단 말입니다. 우린 끝까지 막아야 해요.”

“계속 막는 길을 간다는 건, 지금의 황제 폐하와 반대편에 선다는 걸, 그대도 알고 하는 소리겠지.”

알렉드라의 목소리가 서슬 퍼렇게 떨어졌다.


“황명은 이미 내려졌고, 황명을 거스르기 위해선 결정해야만 하오.”

그는 진지한 시선으로 이클리트를 보면서 그가 내린 선택을 은연중 보였다.


“클리오 대공 전하, 저희에겐 새로운 지휘자가 필요합니다.”

그의 선택에 아멜리아는 온몸이 떨렸다.

저 말은 즉, 제대로 아스란을 막아서겠다는 것.

그건 결국, 내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