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196/199)
196화.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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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2022.11.18.
이사나가 몹시 진중한 표정으로 명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냑이 이번에 황궁으로 들어가게 된 루베르의 이름을 적은 명부였다.
반년 동안 무수한 노력 끝에, 이번에 루베르도 황궁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공작 각하!”
“흠…… 이자는 지난번 토지 계획을 잘 세웠고.”
“각하! 루베르 공작 각하!”
“그리고 이자는 세를 잘 계산했지. 그래, 다들 괜찮네.”
“루비엔!”
“응?”
명부에 빠져 있던 이사나는 자신을 부르는 페르소의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페르소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하하. 미안. 아직 그 호칭이랑 이름에 익숙하지 못해서…….”
“이제 익숙해지셔야죠.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으신데. 평화 회담 준비도 서두르셔야 하고요.”
페르소의 말에 이사나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거 진짜 할 거 많아. 이제 막 일 배우는 사람한테, 너무 많은 걸 떠넘기는 거 아니야? 명분은 그럴싸하긴 한데, 일부러 너무 힘드니까 나한테 주는 건 아닌지. 아주 합리적인 의심 중이야.”
페르소는 피식 웃었고, 이사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신 기분 좋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현재 페르소는 이사나의 곁에서 여러 가지로 그를 돕고 있었다.
이사나는 더는 피오레 공작가 블러드 아이리스의 단장이 아닌, 루비엔 루베르의 이름으로서 루베르 가주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반년 동안 솔라는 많이 변했다.
루베르의 위치가 그랬다.
예전처럼 저주받은 이방인 취급 받으며 루베르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솔라 곳곳에서 자유롭고 평범하게 살아갔다.
거기다 황궁에서 중요 직책 또한 조금씩 맡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번 평화 회담이 그랬다.
루베르가 이런 공식적인 회의를 이끌게 되었으니까.
평화 회담이 열린 지 겨우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 평화 회담은 다른 때와 달랐다.
솔라와 프리메가 그저 생색내기, 이름뿐인 평화 회담이 아닌 진정한 평화를 나누고, 동맹을 돈독하게 유지하기 위해 개최되는 것이니까.
게다가 이번 평화 회담엔 인간이 아닌 타 종족도 함께 화합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페르소가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이사나를 도와주듯, 사라진 줄 알았던 수인들도 차츰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수인들 대부분이 시간의 숲에서 지내고 있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세인트의 바람대로, 반인반수들도 점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분은 황궁에서 잘 지내시죠?”
“메리사 황녀 전하? 뭐, 종종 뵙고 있지. 나도 나지만, 황녀 전하도 바쁘셔.”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직접 황녀 전하를 황궁으로 모실 줄 몰랐어요. 끝까지 클리오 대공 전하를 기다리실 줄 알았으니까.”
페르소의 말에 이사나의 미소가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기다려. 당연히 기다리시지. 다만, 마땅히 황녀가 되셔야 했으니까. 그분의 잘못은 없으니. 원래대로 되돌린 것뿐이야. 가주님, 아니 피오레 공은 그런 분이니까.”
현재 황실에 살아 있는 황족은 메리사 황녀, 아스란 전 황제와 세실의 핏줄인 그녀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황궁에 정식으로 모신 것은 아멜리아의 의지였다.
물론 반발이 엄청났지만.
***
황궁 안으로 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몹시도 무거운 분위기에, 제대로 호흡하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알렉드라와 아멜리아가 시간의 숲에서 승하한 황제의 관을 가져왔으니까.
아스란 황제를 찾기 위해, 숲의 경계를 샅샅이 뒤졌던 알렉드라는 끝내 아스란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렇다고 황제에 대한 재판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시신을 두고, 아스란 황제의 마지막에 대한 결정이 이뤄졌다.
재판은 다섯 공작가와 장로회의 주관 아래, 일주일 동안 밤낮없이 이뤄졌다.
날카롭고 팽팽한 발언이 오갔고, 그 사이에서 헤이츨만이 중립을 지키며 폭풍 같은 역사를 냉랭한 시선으로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렇게 피 말리는 시간 끝에 내린 결과는 황위 박탈이었다.
“비록 솔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제국민을 기만하여 황제의 자격은 잃었으나, 장례는 신성회에서 수순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차기 황위인데…….”
차기 황위라는 말에 다들 표정에 난감함이 드리웠다.
아멜리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조프 역시 시간의 숲에서 사망했고, 시신도 수습되지 못했지.”
“그는 더 이상 대공도 아니고, 황족도 아니니 거론할 필요가 없는 일이오.”
귀족과 장로들이 날 선 목소리로 에드조프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그럼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는…….”
결국, 그 이름이 거론되자 아멜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루시아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봤으나,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는 잠시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언제 돌아오실지 모를, 먼 여정입니다.”
아멜리아의 말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도 이클리트에 대한 행방을 깊이 묻지 않았다.
시간의 숲이 열렸다는 건, 그가 열쇠로서 뭔가를 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행방불명 같은 상황도 그것과 관련 있을 테니.
아마 여기서 가장 슬픈 것은 그녀이기에, 다들 아멜리아를 배려했다.
알렉드라는 비어 있는 황좌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일단 다섯 공작가가 나서서 황궁을 지키기로 하지.”
“물론 그렇게 해야겠지만, 그건 임시방편인데…….”
“그래도 황족이 황궁을 지켜야, 차후 무슨 일이 생겨도 수습이 가능할 겁니다.”
“살아남은 마지막 황족이 있습니다.”
아멜리아의 말에 다들 시선이 얼어붙었다.
“카힐로 경이 클리오 대공 전하의 부탁으로, 황녀를 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황녀라면!”
귀족들이 경악했으나, 아멜리아는 다소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수인의 피가 섞인 반인반수지만, 아스란 전 황제의 피를 이은 엄연한 황녀 전하이십니다. 클리오 대공 전하와 같다고 볼 수 있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녀 전하의 존재를 부정하시겠습니까?”
황녀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클리오 대공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에는 여전히 수인의 존재가 그들에겐 낯선 간극이었다.
“마, 마지막 황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피오레 공작 각하의 뱃속에 클리오 대공 전하의 피가 이어져 있는데.”
“그렇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귀족들이 희망적으로 말했으나, 아멜리아는 완강하게 선을 그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입니다. 어린아이를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그날은 이견이 좁혀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됐지만, 이후 나선 것은 뜻밖의 이들이었다.
바로 장로회와 신성회가 나선 것.
그들이 황녀에게 메리사라는 이름을 축복으로 내리고, 황족으로 받아들이면서 변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
이사나는 여전히 장로회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루베르와 수인에 대해 지금 솔라의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고 좋아지긴 했지만…….’
신성회 대신관 미야는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여서, 이제 제국민 모두가 태양신의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신성회는 몰라도 장로회의 속내는 어떨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황녀를 자기 입맛대로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니까.
물론 다섯 공작가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중이지만.
‘뭐, 속내가 그렇다고 해도 반인반수 황녀를 받아들인 것도 지금 장로회로서는 기적이긴 하지.’
완전하진 않아도 변화는 빨랐고, 그 변화를 위해 아멜리아는 홑몸이 아닌데도 정말로 한시도 쉬지 않았다.
이사나는 그게 걱정이었다.
‘마미가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지. 다들 제자리를 찾아가지만, 그분은 아니구나. 대공 전하께서 안 계시면, 그분에게 제자리는 없어.’
그렇기에 그저 혼자, 버티는 거다.
“루베르 공작 각하.”
카마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사나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페르소 역시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카마리 경!”
이사나가 카마리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 중이었다.
카마리는 여전히 피오레 공작가를 지키고 있었기에, 솔라리스에서 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다.
이사나는 너무 당연하게 카마리의 손을 잡았고, 카마리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진 않아도, 주변에 티어들이 다 있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카마리도 이사나의 손을 더 꽉 마주 잡았다.
“일부러 보라고 이러는 거죠. 카마리 경, 요즘 너무 예뻐져서 신입 티어들이 엄청 다가온다고 칼렌 경이 그러던데.”
“칼렌 경이 그런 말도 합니까?”
“말뿐만 아니라, 내 눈이 되어주고 있지.”
“흐음…….”
“좀 봐주시죠. 카마리 경이 예전처럼 철벽 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계속 붙어 있을 수도 없고.”
귀엽게 툴툴거리는 이사나의 모습에 카마리 피식 웃었다.
“그럼 마음 쓰지 않게.”
카마리가 잡은 이사나 손을 확 끌어서는 그대로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갑자기 키스 당해버린 이사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카마리는 태연하게 말했다.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보여줄 거면 더 화끈해야지.”
“……내가 이래서 카마리 경을 좋아하지.”
“나는 공작 각하를 아끼고 있어요.”
“나는 더 많이 아끼는데? 근데 그 호칭은 좀…….”
카마리는 엄지손가락으로 이사나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당분간은 솔라리스에 머물 계획입니다.”
“피오레 공도 오셨겠네요.”
“헤스틴 공작 각하를 만나고 계십니다.”
“두 분이 요즘 자주 만나시지.”
“아기님에게 좋은 차도 만들어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시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나는 카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가 일부러 더 자주 아멜리아 곁에 있으려고 하는 걸 아니까.
“세스가 황자 전하께 소식은 없죠?”
현재 세스가는 시간의 숲을 조사하면서 이클리트에 대한 흔적을 은밀히 찾고 있었다.
“없어요. 그래도 믿을 수밖에. 언젠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실 거예요. 대공 전하가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우리보다 더 애타게, 너무 사랑하는 그분의 곁으로.”
그때, 멀리서 카마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나가 아쉬운 표정을 띠었지만, 카마리는 덤덤하게 이사나의 손을 풀었다.
“가보겠습니다.”
뭔가 딱딱한 카마리의 반응에 이사나는 묘하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그럼. 내가 나중에…….”
“우리 루비, 나중에 봐요.”
“응?”
뜻밖의 호칭에 이사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이미 카마리는 저만치 가버린 후였다.
홀로 남겨진 이사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하. 진짜 미치겠다…… 평생, 못 당해내겠네.”
***
겨울 궁 오랑제리에서 아멜리아는 루시아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아멜리아는 제법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선선한 바람을 느꼈다.
이곳 오랑제리는 어쩐지 카르티아 후원을 닮은 듯했다.
‘그곳을 대공 전하께서 제비꽃으로 한가득 채워주셨지.’
예쁘기도 너무 예뻤지만, 처음으로 그와 깊이 사랑한 곳이니까.
오직 그녀를 위해서 첫 순간을 너무나도 동화처럼 만들어준 대공 전하의 마음이었다.
“또, 또 대공 전하 생각하지?”
루시아가 일부러 볼멘소리하자, 아멜리아는 피식 웃었다.
“마음껏 기억하고 싶어요. 한순간도 잊고 싶지 않거든요.”
아멜리아의 말에 루시아의 눈동자도 아련하게 가라앉았다.
“단 한 순간도, 희미해지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어. 나도 여전히 남편을 잊기 싫거든.”
아멜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전 헤스틴 공작에 대해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루시아의 옷이 굉장히 화려했다.
그녀는 대부분 검은색 옷을 입었으니까.
“헤스틴 공, 오늘 드레스가 너무 예쁘네요.”
“이제 좀 곱게 입은 모습을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해서.”
루시아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피오레 공, 아니 아멜리아 당신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는지 모를 거야.”
“헤스틴 공…….”
루베르의 피가 섞였기에, 항상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남편은 아마 지금쯤 홀가분한 표정을 띠고 있을 거다.
그래서 루시아는 더는 자책 없이, 웃으며 남편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러니 살아간다고 자책 마. 대공 전하는 당신이 더 찬란히 살길 바랄 테니까. 더 웃으며 지내길 바랄 테니까. 그 아이와 함께.”
***
어느새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온 오랑제리로 마미가 등불을 여기저기 켜두었다.
루시아가 떠나도, 아멜리아는 여전히 이 오랑제리에 머물러 있었다.
마미는 그녀의 어깨와 무릎에 두툼한 담요를 깔아주었다.
“고마워, 마미.”
“힘드시면 꼭 부르세요.”
“물론이야.”
마미는 지금부터 그녀가 뭘 할지 잘 알았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되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느새 주변이 적막해졌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보다 편안해진 표정으로 책상에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능숙하게 첫 문장을 썼다.
-사랑하는 이클리트, 당신에게-
지난날,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기다리며 매일 편지를 썼듯.
이번엔 그녀가 그를 기다리며 이렇게 매일, 편지를 쓰고 있었다.